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8일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포스터. 오는 5월 8일에 폐막한다.

▲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포스터 지난 8일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포스터. 여러 메시지가 중첩되어, 메시지의 주연과 조연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하지만 산탄총처럼 쏟아지는 인문학적 지식들을 관통하는 한 방이 있다. 오는 5월 8일에 폐막한다.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참사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시간이 지났다. 참사는 역사가 된다.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기억되기 위해, 역사는 교육의 공간에서 지식의 형태로 넘겨진다.

그런데 그 참사가 시험문제에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적 지식이 된 참사, 시험기간에 외워야 할 정보가 된 참사, 시험에서 각을 비틀어 튀어 보이는 답을 하기 위해 이용하는 참사. 이 과정에서 아픔과 눈물은 거세된다. 이렇게 기억되는 참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답안지에 쓰이는 참사가 또 다른 참사의 반복을 막을 수 있을까. 지난 8일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다.

홀로코스트가 "시험에 나올 법한 토픽"이라면

 지난 8일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공연 사진. 오는 5월 8일에 폐막한다.

▲ 공동 수업 시간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공연 장면. 헥터와 어윈이 공동으로 수업하는 이 시간은 선생과 학생들이 편을 나누어 싸우는 난상토론이 된다. 헥터는 홀로코스트가 시험 문제에 나왔을 때,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그들이 받았던 고통의 의미를 손상"한다며 이 주제에 반대한다. 하지만 어윈은 옥스브리지 반 학생들이 대입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이를 접근하도록 한다.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무대는 교실이다. 영국 셰필드 지방의 한 공립고등학교. '옥스브리지'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진학을 목표로 운영되는 이 고등학교의 특수반이다.

이 우등반의 커리큘럼에는 교사 헥터의 '일반 교양' 과목이 포함되어 있다. 헥터의 교육법은 아주 독특하다. 수업의 주제도 그때그때 다르고, 방식도 제각각이다. 시에 대해서 토론하다가, 프랑스어 그것도 조건법과 가정법 문장만 이용하여 상황극을 치르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산탄총으로 갈기듯 인문학 지식들이 난사된다. 문학과 역사, 영화와 음악을 넘나드는 진짜 교양 시간. 8명의 학생들은 헥터의 수업 시간에 뭘 배우는지도 잘 모르면서 성장해왔다.

하지만 교장은 이 "쓸모 없는" 수업, 그리고 그 수업을 진행하는 헥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답안지에 써먹지도 못할 지식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서 교장은 신임 보충교사 어윈을 초빙한다.

어윈은 지식의 활용에 능한 인물이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그에게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퍼포먼스이고, 오락"이다. 시험에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없다면, 그것이 진실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진실은 "아주 상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인 것"이다. 목적을 위해 활용되어야 할 수단에 불과하다.

가치관이 다른 두 교사 헥터와 어윈은 충돌하고 만다.

헥터 "쓸모가 있다? 모든 답안이 적당한 발췌문으로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같겠네요. 하지만, 그것들은 심장으로 배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있어야할 곳도 바로 여기(심장)이고요. 그걸 오염시키면 안 됩니다."
어윈 "그러면 아이들이 그걸 배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육이라는 건 머리가 하얗게 세서 난롯가에 앉아 있을 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시험이 다음 달입니다."

이 논전의 하이라이트는 홀로코스트를 "시험문제에 나올 법한 토픽"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한 공방이다. 헥터는 "사람의 죽음이 단순한 언어의 생략적인 표현으로 축소"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공동 수업시간에 충돌한 두 교사 그리고 두 교사를 각각 대리하는 학생들은 편을 나누어 서로에게 목소리를 높인다. 제일 잘생기고 영리한 데이킨은 어윈의 편이고, 그런 데이킨을 좋아하는 포스너는 헥터의 대리자이다.

포스너 "맥락 속에 넣어보는 건, 그게 이해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라고. 그리고 무언가가 설명될 수 있다면 다 용납될 수 있다는 뜻이야."
데이킨 "그렇지만 홀로코스트를 맥락 속에 넣어보면, 수도원 해산이랑 다를 게 없어. 헨리 8세 이전에도 수도원의 해산은 이미 있었다고, 수십 군데에서."
포스너 "그래, 그렇지만 수도원 해산 때문에 내 친척들이 죽지는 않았거든."

비록 쓸모가 없을지라도, 넘겨져야 할 진실

 지난 8일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공연 사진. 오는 5월 8일에 폐막한다.

▲ 헥터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 헥터는 "쓸모 없는" 일반 교양 시간을 통해, 학생들이 심장으로 무언가를 배우기를 바랐다. 그리고 헥터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심장에 새기며 기억한 건 데이킨이 아니라 포스너였다. 포스너는 이후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삶"이지만, 홀로코스트가 일상에서 반복되는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끝까지 지키려 노력한다.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역사 앞에서 쓸모 있는 거짓과 쓸모 없는 진실 중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그건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 수업 이후 어윈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면, 그가 얼마나 약간의 진실과 많은 거짓을 기술적으로 잘 활용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방송의 진행자로서 승승장구한다. 의회에까지 입성해 대중을 어떻게 호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윈에게 매력을 느꼈던 데이킨은? "돈 많이 받는 대가로 거짓말 해주"는 세금 전문 변호사 -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배웠고, 그렇게 산다.

반면 포스너는 어떤가? 자신의 삶이 "완전 X 됐다"고 하는데, 그건 그가 셰필드라는 낙후된 지방 출신의 키 작은 학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소심하고 여린 성격에, 같은 반 데이킨을 좋아하는 동성애자이며, 심지어 유대인이기까지 하다. 포스너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다수의 것이 아닌 소수의 것이었다. 소수자로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홀로코스트는 그냥 역사가 아니었다. 그건 다수가 소수를 학살한, 세대를 거쳐서 여전히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는 참사였다.

헥터를 존경했던 포스너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 수 없었다. 비록 소수자이고, 삶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언정 '진짜'를 포기하지 않았다. 세속적 기준으로는 성공과 거리가 멀지언정, 최소한 그는 어윈처럼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살지 않았다. - 사실 어윈의 성적 정체성도 포스너와 같았다.

연극의 질문은 교실을 넘어서 현실로 온다.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더 중요한 기준인가, 아니면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가치인가.

헥터 "넘겨줘라. 때로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받아서, 느껴보고, 넘겨주는 거지."

헥터는 그 역사를 학생들에게 넘겨줬다. 연극의 커튼콜은 헥터의 손에서 학생들로 책이 전달되는 식으로 이뤄진다. 학생들이 받아서, 느껴보고, 넘겨줄 수 있는 역사. 할 수 있는 게 비록 그것밖에 없더라도 그거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참사가 어떻게 반복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이토록 잔인한 4월 16일을 기억해야 하는 것도, 4월 16일이 역사가 될 때 쓸모 없는 진실의 편에서 서야 하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다. 넘겨주기 위해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4월 16일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도치시켜서 신선해 보이는 답안지를 만드는 걸 우리는 견딜 수 있는가. 4월 16일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별 쓸모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보다 쓸모 있는 적절한 은폐를 종용하는 이들이 이미 이 사회에는 차고 넘친다.

그러니까 우리도, 심장으로 기억하고, 넘겨주자.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5월 8일까지 계속된다.

 지난 8일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출연 배우들이 4월 16일을 맞아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히스토리 보이즈>에서 데이킨을 연기하는 박은석 배우가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공개한 사진.

▲ 노란 리본 그리고 소년들 지난 16일,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출연 배우들이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히스토리 보이즈>에서 데이킨을 연기하는 박은석 배우가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공개한 사진. 홀로코스트를 대하는 이들의 자세처럼, 4월 16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선택이 필요하다. 참사는 "사람의 죽음이 단순한 언어의 생략적인 표현으로 축소"될 수 없으니까. ⓒ @jayten210



히스토리보이즈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연극 역사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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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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