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해온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시의 압력으로 인해 운명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영화계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외치며 결사항전 분위기입니다. 당장 올해 영화제 개최조차 점점 불투명해지는 상황입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오마이스타>는 누구보다 이 사태를 애가 타며 지켜보고 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그 스물일곱 번째로 영화 <소년, 달리다>의 강석필 감독입니다. [편집자말]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지난 2007년 2월 1일, 베를린국제영화제(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독일 베를린의 베를리날레 팔라스트(Berlinale Palast)에서 열리고 있다.

▲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지난 2007년 2월 1일, 베를린국제영화제(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독일 베를린의 베를리날레 팔라스트(Berlinale Palast)에서 열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1970년, 출범 30년이 되는 해를 성대히 자축할 꿈에 부풀어 있던 베를린영화제는 생각지도 않은 사태에 휘말리며 영화제의 존폐 위기까지 이르게 된다. 사정은 이랬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독일 영화감독 미카엘 베어호벤(Michael Verhoeven)은 베트남 소녀를 강간하고 살해한 미군들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 O.K. >를 영화제에 출품하고 공식 경쟁부문에 선정된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던 심사위원장 조지 스티븐스(George Stevens) 감독은 자신의 조국을 비난하는 이 영화가 심히 불편했다. 결국 그는 이 작품을 경쟁부문에서 빼줄 것을 요구했고 영화제 측은 이 요구를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사전검열이라며 강력히 항의했고, 급기야 심사위원회가 와해되기에 이른다. 당연히 수상작은 있을 수 없었다. 상영 일정이 남아있던 다른 영화들은 속속 상영을 거부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독일 영화계는 엄청난 논쟁에 휩싸였고, 영화제 무용론까지 나오기에 이른다.

영화 하나에 영화제는 휘청거렸다

 독일 영화감독 미카엘 베어호벤(Michael Verhoeven)의 영화 < O.K. > 한장면. 1970년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베트남 소녀를 강간하고 살해한 미국들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독일 영화감독 미카엘 베어호벤(Michael Verhoeven)의 영화 < O.K. > 한장면. 1970년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베트남 소녀를 강간하고 살해한 미국들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베를린영화제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제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의 동쪽, 그러니까 나라의 절반을 소련에게 내준 미국은 필사적으로 서베를린을 사수하고자 했다. 사방이 공산주의 동독에 둘러싸인 서베를린은 위태로우면서도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미국 군정은 이 외로운 섬 베를린에 자유의 깃발을 꽃아 휘날리도록 하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제만큼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장치도 없었다. 베를린영화제는 시작부터가 일종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였던 셈이다. 미국은 칸이나 베니스보다 늦게 시작한 베를린영화제를 띄우기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할리우드의 대스타들을 해마다 베를린영화제에 보냈다. 그 결과 출범 10년이 채 안 돼 'A-클라스' 영화제 등급을 받고 소위 '세계 3대 영화제'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누구나 알듯이 영화는 무한한 상상력 속에서 발전해 왔고, 사회비판은 상상력의 중요한 기둥이다. 1960년대 말 전 세계를 휩쓴 뉴웨이브의 핵심 슬로건 중의 하나는 '반전'이었다. 미국이 주축이 된 베트남전쟁이 주요 이슈가 된 것은 당연했다. 음악과 그림, 문학 등에서 베트남전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고, 영화도 예외일 수 없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 자유세계의 우월함을 표시하기 위해 베를린영화제에, 마치 그 자유를 시험이라도 하듯이 미군을 비난하는 영화 한 편이 똑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파장은 막대했다. 영화제는 휘청거렸다.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베를린영화제의 위기가 이때만이 아니었다. 1979년 마이클 치미노(Michael Cimino) 감독의 <디어 헌터(The Deer Hunter)>가 영화제 프로그램에 선정되자 이번에는 소련과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영화제를 보이콧했다.

이 이야기는 홍형숙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갖고 1998년 베를린을 찾았을 때 들은 일화다. 영화가 상영되고 함께 뒤풀이를 하던 교민들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국의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인지 많이들 궁금해 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외에도 여러 편의 독립다큐멘터리들이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함께 초청되었던 영화 <레드 헌트>(조성봉 감독의 작품으로 당시 경찰 및 관계 당국은 이적성 여부를 들며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시켰다-편집자 주)가 이미 한국에서 상영이 불허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교민들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한국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교민들에게서 들은 베를린영화제 이야기는 사실 영화제 측 입장에선 부끄러운 역사의 한 대목인데, 내가 더 큰 흥미를 느낀 것은 그 뒷얘기였다.

그 뒷이야기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독일 영화계에서는 다양한 토론들이 이어졌다. 독일 영화인들은 정치적 이유 등 영화 외적인 문제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일이 없도록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결실이 일명 '영 포럼'으로 불리는 '새로운 영화를 위한 국제 포럼(International Forum of  New Cinema)'이었다. 베를린영화제의 경쟁부문은 그대로 가되, 정치적 이슈를 다루거나 예술적 실험들을 다루는 영화들을 이 포럼에서 소화하자는 것이다.

경쟁과 영 포럼 이렇게 두 부문은 같은 시기와 같은 장소에서 진행하고 상호 보족적인 프로그램으로 기능하되,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경쟁부문은 1968년 베를린 정부로부터 운영권을 부여받은 회사에서 운영했고, 포럼은 '독일 시네마테크의 친구들(Freunde der deutschen Kinemathek)'이라는 단체에서 맡았다. 물론 두 부문 모두 주 정부와 지방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다.

상업적 성격이 강한 영화들로 채워졌던 경쟁부문에 비해 포럼 부문은 비타협적인 작가 정신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첫해인 1971년 테오 앙겔로풀로스, 나기사 오시마 감독 등의 영화를 상영한 이래 포럼에서는 전 세계의 새로운 영화적 흐름과 중요한 의제를 소개하는 장으로 기능해왔다.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독일 교민은 많은 베를린 시민들은 지나치게 상업적인 경쟁부문보다는 이 포럼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포럼을 이끌어온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20년 넘게 포럼을 이끌어온 울리히 그레고르(Ulrich Gregor)라는 분이었다. 그로 말하자면 독일 시네마테크 운동의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으로서, '독일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설립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베를린영화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친구들'을 이끌고 포럼을 출범시켰다. 그는 30년 동안 이곳저곳을 뛰며 포럼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2001년 은퇴했다.

영화제의 전문성은 곧 사람이다

 울리히 그레고르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좌측)의 모습.

울리히 그레고르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좌측)의 모습.ⓒ 베를린영화제 아카이브


베를린영화제 얘기는 최근 부산국제영화제가 여러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자주 떠오르곤 한다. 베를린영화제는 물론 칸영화제 또한 비슷한 문제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

영화는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 파급력이 큰 대중 예술이라는 점에서 항상 권력과 긴장관계에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느냐다.

부산시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몇몇 영화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영화제"가 문제라며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번지수가 참으로 잘못됐다.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Chairman도 아니고 CEO도 아닌 Director로 표기된다. 말하자면 영화제의 색깔과 지향과 가치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임기 만료로 자동 해촉된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초대 수석프로그래머로서 영화제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96년 조촐하게 남포동 골목에서 시작한 영화제는 현재 2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찾고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영화제가 됐다. 영화제를 만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려 이룬 성과지만, 영화제의 키를 잡고있는 집행위원장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제는 해를 거듭하며 만들어지는 네트워크와 전문성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네트워크와 전문성은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중 제일 주요한 사람이 집행위원장이다. 집행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잡고있는 키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을 때 이를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은 관객과 영화인들의 몫이지, 돈줄을 쥐고있는 권력자의 몫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의 집행위원장 울리히 그레고르 또한 30년 동안 집행위원장 자리를 지켰다. 지금은 세계 최대 다큐멘터리영화제로 자리잡은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는 1988년 80편의 영화와 3천여 명의 관객으로 출발했다. 지금 IDFA엔 매년 3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몰린다. 말 그대로 초대형 영화제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장기집권'한 알리 덕스(Ally Derks) 집행위원장이 있다. 그녀는 영화제 30주년이 되는 2017년에 집행위원장 자리를 비로소 내려놓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시시콜콜 밤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것은 얄팍한 권력과 천박한 자본이나 할 일이다. 돈과 권력은 문화가 꽃피기 위한 후견인 위치에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영화제 하나 존폐 문제를 넘어

나스타샤 킨스키 '손도장 예쁘죠'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 핸드프린팅 행사가 4일 오후 부산 해운대 비프빌리지 야외무대에서 열렸다.
  
부산국제영화제 핸드프린팅 행사는 제2회 영화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국내외 감독과 스타들이 참여했다. 이날 행사는 수많은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수연, 이용관 공동 집행위원장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독일 대표 여배우 나스타샤 킨스키는 10대 시절 모델로 데뷔, 이후 빔 벤더스 감독의 <빗나간 동작>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테스>를 통해 1981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 1981년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3개 부분에서 수상하며 세계적인 배우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나스타샤 킨스키 핸드프린트는 내년에 열리는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전야제 제막식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로 시작해 국제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영화제는 지역 사회의 협조도 중요하지만 성장을 위해선 무엇보다 인적 네트워크가 핵심이다. 이용관 및 강수연은 초기 영화제 때 각각 프로그래머와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서 그 외연 확장에 주력했다. 사진은 지난해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참석한 독일 출신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중앙) 핸드프린팅 행사 당시 모습. 강수연(우측), 이용관(좌측) 공동 집행위원장의 모습이 보인다.ⓒ 유성호


누군가가 내게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영화진흥위원회와 부산국제영화제를 꼽는다. 물론 영화인들의 창작을 위한 노고와 열정을 제외한 외적 요인을 말하는 것이다. 둘 다 모두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나온 산물들이다. 그런데 두 곳 모두 위기를 맞았고,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사회가 우경화되는 데 따른 이상 징후들이다.

따라서 영화제가 이 위기를 어떻게 견뎌내는가 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다시 건강함을 되찾을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 영화인들이 부산영화제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일종의 결기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순히 영화제 하나가 살아남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부산시는 영화인들이 일제히 보이콧을 선언하자 부랴부랴 기자 간담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반쪽자리 영화제가 될 것을 우려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영화인들의 보이콧은 영화제가 반 토막 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완전히 망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후 상황이 악화되어 영화제를 만들어가는 스태프들마저 떠나게 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부산시는 상상이나 해봤는지 모르겠다. 영화제 스태프들은 돈만 주면 구할 수 있는 인력시장의 일꾼들이 아니다. 단언컨대, 그 상황에서 영화제 사무국 책상을 채울 일꾼들은 없을 것이다.

나는 지난해까지 옆지기 홍형숙 감독과 함께 만든 영화 아홉 편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었다. 꽤 많은 편수다. 다음에 만들게 될 10번째 영화를 부산영화제에 출품할지 말지는 앞으로 몇 달 동안의 상황에 달려있다. 부디 다음 작품도 부산에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지 말기를, 내 수첩에서 부산영화제를 지우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 베를린영화제에 대한 얘기는 옛 기억을 더듬으면서 아래 글을 참조했다. 혹시 더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참고자료]
- 베를린영화제 영욕의 60년에 대한 회고
- 베를린 영포럼의 역사

강석필 감독은 누구?
 강석필 감독

1997년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프로듀서를 맡으며 다큐멘터리 부문에 몸담기 시작했다.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를 통해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조망한 <경계도시>(2002)의 제작 및 촬영을 맡았다.

그의 첫 다큐멘터리 연출작 <춤추는 숲>(2012)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고, 이후 <소년, 달리다> 역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당시 영화제에서 해당 작품은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인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했다. 현재 그는 홍형숙 감독과 함께 제작사 감어인필름을 꾸려가고 있다.


[BIFF를 지지하는 젊은 목소리]

[16 정윤석] 서병수 시장님, 성수대교 참사 유가족이 제게 묻더군요
[17 민용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나무를 기어코 베려 한다면
[18 김동명] 거짓말 같은... 결단코, 부산국제영화제
[19 이용승] 정치야, 축제에서 꺼져주면 안될까?
[20 김진열] 평범한 시민들이 BIFF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21 안선경]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미 이겼습니다
[22 김용조] 서 시장님, 전 자격 없는 영화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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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조광수] 20년 개근한 나, 올핸 부산 갈 수 있을까?
[25 이수진] 말한다, 벽이다, 그래도 말한다

[26 김태곤] BIFF 사태를 보며 불타버린 숭례문 생각함

* 우리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지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지키기 백만서명운동 사이트' (http://isupportbiff.com)에서 관련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isupportb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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