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비스에서 '블러' 처리된 화면이 등장하기 시작한 넷플릭스의 간판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한국 서비스에서 '블러' 처리된 화면이 등장하기 시작한 넷플릭스의 간판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 넷플릭스


"저는 평생 담배 한 개비도 핀 적 없는 비흡연자입니다만, 요즘 담배 피는 장면들이 '블러' 처리된 영상물들을 볼 때 마다 갑갑해서 담배가 피고 싶어지더군요." (@Da*******)

어느 트위터 사용자가 영등위에 날린 쓴소리다. 비흡연자도 흡연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블러'(Blur) 처리(화면을 희미하게 처리하는 것)는 이제 한국 관객과 시청자들에겐 흔한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결코 좋아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여론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영상물등급위원회(아래 영등위)의 자의적인 검열 행위를 그 누구도 막아내지 못해서다.

그리고 최근, 지난 1월 7일 한국 서비스를 시작한 세계 최대의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이자 OTT(Over The Top) 사업체 넷플릭스의 콘텐츠들에도 저 영등위발 가위질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했다. 4월 들어 몇몇 '19금' 콘텐츠가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췄고, 이후 최근 며칠 사이, 서비스 시작 시 없었던 '블러' 처리된 화면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제보가 이어졌다.

원인은 영등위의 비디오물 등급분류와 관련이 있다.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영등위는 비디오물등급분류소위원회가 넷플릭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동영상 사이트의 영상물 역시 비디오물로 간주해 영상물과 같은 등급 분류를 받도록 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작년 11월부터 신청한 영등위의 영상물 등급분류(전체, 12세, 15세, 19세)가 늦어지면서 등급 분류가 이뤄지지 않은 (19금을 포함한) 콘텐츠에 대해 자체적으로 일시 서비스 보류 판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블러' 처리 역시 이 등급분류의 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에 대해 넷플릭스 사용자들과 영화 팬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기존 등급 분류는 차치하더라도 '유료 서비스'인 넷플릭스에 블러 처리까지 등장했다는 점에 특히 분개하는 사용자들이 적지 않았다. 가뜩이나 기존 영등위의 등급 분류를 반대하는 입장에 더해 영등위의 등급 분류가 늦어짐에 따라 넷플릭스의 콘텐츠 업데이트 역시 늦어지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던 터라 불만이 극에 달한 듯 보였다. SNS를 통해 직접 받은 영등위에 보내는 의견을 소개하면 대략 이 정도다.

넷플릭스도 예외없는 영등위의 손길

 영등위의 포스터 등급분류 전후의 영화 < 님포매니악 볼륨1 > 포스터.

영등위의 포스터 등급분류 전후의 영화 < 님포매니악 볼륨1 > 포스터. ⓒ 무비꼴라쥬


"영상물을 심의하고 가위질하고 등급을 매기는 행태가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향유할 수 있는 영상물의 '급'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합니다. 제작자의 표현의 자유, 시민들이 원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제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블러 처리가 나오는 순간 영화/드라마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집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영상물을 수정/변형하는 것은 소비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ma*******)

"성인은 자기결정권을 지니고 여가와 문화생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영등위의 블러 처리는 자유권을 박탈하는 행위다. 허구의 일탈도 허락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문화대국을 꿈꾸는가?" (@ho********) 

"이번 사태가 영등위 해체에 큰 역할을 할 것 같아 심히 우려되는 바입니다" (@ke****)

"넷플릭스 같은 유료 채널에 성인이 성인인증까지 하고, 내 명의의 신용카드까지 써서 결제했는데 블러처리된 장면을 봐야하는지. 만일 당신의 자녀가 블러처리 안된걸 본다면 신용카드를 미성년 자녀에게 덜컥 넘겨준 당신이 잘못입니다." (@go*****)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하는지, 구체적 근거가 아니라 영등위의 불확실한 잣대로 결정되는 것 같다. 마치 그들이 흡연 장면에 덧씌우는 '블러' 효과처럼." (@de******** )

비정상적인 검열제도와 같은 영등위의 등급 분류와 자의적인 블러·묵음 처리. (관련 기사 : 누가 '신세계' 황정민의 입을 막았나) 이에 대한 영화인들과 영화팬들의 불만은 이미 쌓일 대로 쌓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특히나 최근 몇 년 사이 영등위가 사회 분위기에 맞춰 더 보수화됐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외화 포스터 속 키스 장면까지 규제를 하는 영등위의 보수성이야말로 표현의 자유는 물론 한국영화 창작자들의 의욕과 예술성을 꺾는 자기검열을 부추기는 주범 중 하나로 지목돼 왔다. (관련 기사 : 영등위가 제안하는 '틀린 그림 찾기' 열전) 지난 2014년, 영화인들이 거듭 반대해 온 제한상영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언어표현 개선 토론회'라는 20세기에나 어울릴법한 토론회를 개최했던 것도 바로 영등위다. (관련 기사 : '표현의 자유' 억압... 영등위의 개선이 더 시급하다) 그런 영등위가 지난 4일 또다시 어처구니없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한심한 영등위의 사후관리 신고센터

 '사후관리 신고센터'를 오픈한 영등위.

'사후관리 신고센터'를 오픈한 영등위. ⓒ 영등위


지난 4일, 영등위는 '영상물 사후관리 신고센터를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영등위는 "다양한 형태로 제공되는 영상물이 관련법을 준수하여 올바르게 유통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운영되는 온라인 신고센터"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영상물 사후관리는 유해영상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영상물이 등급분류 관련 법적 의무를 준수하여 유통되는지 관리하는 업무로, 최근 디지털 기술 발달로 영상물을 이용할 수 있는 플랫폼이 IPTV와 VOD 서비스, 스마트폰 등으로 다양해짐에 따라 영상물 사후관리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영등위가 언제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이 바로 '유해영상물로부터 청소년 보호'다. 이제나저제나 우리 청소년들은 '성인물'을 비롯한 유해 매체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들이라는 한결같은 논리다.

이번 영상물 사후 관리는 플랫폼 증가로 인해 부족한 인력을 '신고와 포상' 제도로 땜질하겠다는 포석이 깔렸다. 사실 온라인/스트리밍 플랫폼의 경우 영등위의 등급분류 영역이 아니다. 영비법이 아닌 정보통신망법이 관여하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영등위의 이런 오지랖은 지난 21일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확정한 '제2차 청소년보호종합대책'에 영등위가 부응한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한 마디로, 청소년 보호를 명목으로 한 K-검열이 세계적인 플랫폼인 넷플릭스와 그 시청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랄까.

비단 넷플릭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까지 한국의 영화 애호가들과 시청자들은 이러한 '쌍팔년도'식 가위질에 분노해야 하는가. 왜 개별 사용자가 유료로 결제한 콘텐츠들까지 뿌연 안개와 묵음의 지뢰밭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가. 적지 않은 관객과 영화인은 영등위의 자성과 영비법의 개정을 촉구한 지 이미 오래다. 괜히 '영등위 폐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니다. 부디, 한 영화 팬의 아래와 같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길.

"우리에겐 영화를 온전하게 볼 권리가 있다."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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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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