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해온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시의 압력으로 인해 운명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영화계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외치며 결사항전 분위기입니다. 당장 올해 영화제 개최조차 점점 불투명해지는 상황입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오마이스타>는 누구보다 이 사태를 애가 타며 지켜보고 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그 스물세 번째로 영화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입니다. [편집자말]
며칠 전, 지갑을 잃어버렸다.

배우로서 <춘몽>이라는 영화를 촬영하다 다음 날이 쉬는 날이기에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과 술을 한잔 했고 그 사이 잠시 편의점을 갔다 오던 중 어디선가 잃어버린 모양이다.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던 나는 다음 날 다시 지갑을 잃어버린 수색역 인근의 술집과 편의점 근처를 몇 바퀴나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기대를 머금은 채 지갑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술집, 근처의 거리, 그리고 편의점에서도 지갑은 발견되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수색역을 어기적거리던 그 날, 우연찮게 <춘몽>의 감독님과 제작진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저 지갑 잃은 수색역의 멍한 이방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금세 끝난 촬영 덕에 촬영장에서 가까웠던 그 장소를 다시 찾아 혹시라도 길가 틈새 어딘가에 버려져있을지도 모를 지갑을 찾기 위해 샅샅이 근처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역시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지갑을 잃어버린 나에게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편의점 직원이 주워서 돈과 쓸 만한 것들만 빼내고는 버렸을 거야. 길에서 누군가 주웠다면 그 사람 역시 마찬가지일거야" 라고.

지갑과 나

 영화 <똥파리>의 한 장면.

영화 <똥파리>의 한 장면.ⓒ 양익준


나 역시 은근 그런 맘을 가졌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싶어 '지금 내 곁에는 없지만 지구 안 어딘가엔 존재하겠지'하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했고 몇 년 간의 시간이 새겨져 있는 그 지갑이 못내 그립다.

어떻게 보면 지갑이라는 것은 그저 물적 가치만을 지닌 게 아닐지도 모른다. 지갑과 그 안의 물품들은 그저 소지품이고 물건이기 이전에 어쩌면 '나'라는 독자적인 정체성과 역사성, 그리고 나의 문화적 가치를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귀한 친구에게 받은 그 지갑 안에는 나란 사람을 증명해주는 (코팅된 사진 및 태어난 날짜와 현재 기거하고 있는 주소가 적힌) 주민등록증이 있으며, 순간순간 필요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끔 여러 '카드 친구'들이 적새적소에서 자신들이 나설 때를 기다리고 있고, 지갑 안쪽에 자리한 사진 속의 인도 영성가 부부의 얼굴은 언제나 믿음을 갖고 지긋이 나를 바라보며 응원하고 계셨을 것이다.

이렇듯 그 작은 지갑은 꽤 오랜 시간 '나' 라는 존재를 채워나간 증명이며, 함께 오랫동안 동행한 친구 같은 존재이자, 양익준이라는 독립적인 이를 증명해주는 가치, 단 하나의 문화였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걸 잊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군데군데 상처가 난 지갑대신 삐까뻔쩍 새 지갑을 구입할 수도 있고, 여러 번의 전입신고로 뒷면까지 빽빽이 주소가 들어간 닳고 닳은 주민등록증은 재발급 받으면 될 것이며, 영성가 부부의 사진은 가끔씩 꺼내보는 대신 기억 속에 저장해 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똥파리>가 "응애!" 첫 울음 터뜨릴 때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님(뒷줄 우측)과 함께 독일 어느 작은 영화제를 방문했을 당시.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님(뒷줄 우측)과 함께 독일 어느 작은 영화제를 방문했을 당시.ⓒ 양익준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뒷 모습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뒷 모습이다.ⓒ 양익준 제공


서민들의 문화를 대변하는 산언덕 마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그 마을만의 역사와 문화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새 그러한 마을들이 하나둘 거대 기업가들과 정치가들의 악독한 합의로 인해 사라지고 있다. 고불고불한 골목, 동네 어귀의 목욕탕, 집 앞 골목 앞에서 고추를 말리며 이야기 나누는 할머님들, 그리고 까르르대며 뛰어노는 아이들마저 갈아엎고 공중분해시켜 마을이 있던 그 자리에 차갑고 두꺼운 철근을 쌓아 아무런 문화도 정감도 역사성도 읽히지 않는 신식 아파트를 깃발 꽂듯 꽂아 넣어버린다. 혹시라도 재수(?)가 좋아 그 신식 아파트에 입주한 주민과 혹은 별 수 없이 멀리 쫓겨가버린 주민들의 기억속에서도 그 마을의 삶과 역사와 문화는 송두리째 매몰돼버린 채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있게 될 것이다. 나의 데뷔작 <똥파리>를 찍던 아현동 산동네 역시…

첫 자식인 장편 <똥파리>가 처음 세상에 '응애!' 하며 소리 높여 소개됐던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제에 초청되어 뛰는 가슴으로 관객을 만나기 위해 극장 문을 통과할 때 환하게 웃음 지으며 팔꿈치로 똥파리 날개 짓을 표현해 환영해줬던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영화를 관람해주고 박수쳐주고 진심어린 질문을 해주시던 부산 시민과 영화를 사랑하는 전국, 전 세계의 관객들. 나의 데뷔작을 선택해주고 진심어린 애정을 담아 축하의 메시지를 전해준 이 프로그래머. 영화 상영 후 일일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칸 영화제 프로그래머와 로테르담 집행위원장과의 만남을 성사시켜준 큰 누나 홍효숙 프로그래머.

영화를 본 후, 개구쟁이처럼 혹은 쑥스러움에도 용기를 내 "씨발놈아!" 하며 내 영화를 봤다는 신호를 보낸 영화인들. 수도 없이 국내외에서 똥파리를 봐주시고(심지어 수많은 일정으로 인해 피곤해 조시면서까지) 매번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직접 건네주신 부산영화제의 시작이자 얼굴이며, 1회 때부터 힘껏 부산을 소개하러 다닌 김동호 명예위원장님. 독일 어느 작은 영화제의 골목 어귀에서 젊은 영화인들과 맥주를 나누며 즐겁게 그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수다에 동참하며 껄껄 웃으시던 이용관 집행위원장님.

이렇듯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다양한 영화적 양분을 경험한 나. (<똥파리>가 상영됐던) 8년 전, 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 안에서 생애 첫 장편 영화 테이프를 자랑스럽게 끊을 수 있었던 부산국제영화제. 그리고 올해 멋지게 21회가 치러져야 할 부산국제영화제.

모른 척 하는 것인가 진짜 모르는가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일인 1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 설치된 형형색색의 조명이 영화제 시작을 알리고 있다.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일인 지난해 10월 1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 설치된 형형색색의 조명이 영화제 시작을 알리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의 자랑이자 한국 영화인의 자존심이며 그 자체가 문화이고 역사다. 이것을 누가 허물려고 하는가.ⓒ 유성호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의 자랑이자 한국 영화인의 자존심이며 그 자체가 문화이고 역사다. 결코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문화적 가치이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야할 유산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에서 대한민국에서 사라져 잊힐 수도 있겠지. 혹은 다른 새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겠지. 모두가 동의하는 자연스럽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야. 하지만 그 잊힘과 대체됨이 막무가내식의 권력과 정치적 폭력으로 이뤄진다면, 20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사와 문화는 우리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리게 될지 모른다.

영화제는 그 고유한 독립성이 지켜져야 한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는 누군가가, 설령 국가라고 해도, 소유하려 해서는 안되며, 간섭하려 해서도 안된다. 그저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응원해주고 지켜줘야 한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한하면서도 다양하게, 또 자유롭고 건강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현재의 부산국제영화제라는 건강한 마을과 독립적인 문화를 잘못된 권력과 정치력으로 맘대로 침범하고 휘두르려 한단 말인가.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에 있는, 더 크게는 한국 안에 존재하는 무형이자 유형의 문화재이자 보물이다.

당신들은 남대문에 화재가 났다고 그 곳에 철 기둥으로 된 최신식 남대문을 지으라고 강제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려는 것인가! 이렇게 바꿔버리는 것이 당신들의 주 업무인건가! 이 사람들아!! 간섭하고 훼손하기보다 먼저 당신들이 부산국제영화제에 문화재 자격을 부여하는 게 오히려 합당한 처사가 아닌가!!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과 국가가 보호하여야 할 우리 모두의 보물인 것을 당신들은 정녕 모르는 것인가?

씨발 진짜.

글을 써도 후련하지가 않다.

제발 귀한 지갑 막 빼앗지 말고, 차라리 그 안에 오천 원짜리라도 한 장 넣어서 원래자리로 돌려놓으란 말이다!!

양익준 감독은 누구?

1975년생인 양익준 감독은 대중에게 배우로도 잘 알려져 있다. <품행제로> 단역을 비롯해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최근 영화 <계춘할망>의 조연으로 <춘몽>의 주연으로 참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첫 단편 연출작인 <바라만 본다>(2005)로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고, 미쟝센단편 영화제 등에 초청받기도 했다.

첫 장편 연출작 <똥파리>로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작품은 아시아영화펀드 후반작업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됐다.


[BIFF를 지지하는 젊은 목소리]

[① 백재호] 부산시민 여러분, 부디 부산국제영화제 지켜주세요
[② 이승원] 누가 BIFF라는 오아시스를 소유하려 하는가
[③ 이근우] "저는 이 영화 부산국제영화제에 낼 거예요"
[④ 조창호] 서병수 시장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한 장의 사진
[⑤ 박석영] 저는 믿습니다, BIFF 키워온 부산 시민들을

[⑥ 이돈구] 부산국제영화제는 내게 기적이다
[⑦ 박홍민] 영화제 제1명제: 초청되는 영화에는 성역이 없다
[⑧ 지하진] 영화 속 유령들까지 부산영화제를 지킬 것이다
[⑨ 이광국] 부산시장님, 많이 외로우시죠?
[⑩ 김대환] 많이 아픈 부산국제영화제야, 내가 너무 미안해

[⑪ 김진도] 부산 뒷골목, 노숙자 같은 남자가 세계적 거장이었다
[⑫ 김진황] BIFF에 대한 믿음,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⑬ 서은영] 자부산심 : 우리는 부산을 가졌다는 자부심
[⑭ 김태용] 해외영화인들이 계속 묻는다 "BIFF는 괜찮아요?"
[⑮ 홍석재] 영화제는 꿈! 꿈은 결코 당신 마음대로 꿀 수 없다

[16 정윤석] 서병수 시장님, 성수대교 참사 유가족이 제게 묻더군요
[17 민용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나무를 기어코 베려 한다면
[18 김동명] 거짓말 같은... 결단코, 부산국제영화제
[19 이용승] 정치야, 축제에서 꺼져주면 안될까?
[20 김진열] 평범한 시민들이 BIFF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21 안선경]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미 이겼습니다
[22 김용조] 서 시장님, 전 자격 없는 영화인인가요

* 우리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지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지키기 백만서명운동 사이트' (http://isupportbiff.com)에서 관련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isupportb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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