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해온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시의 압력으로 인해 운명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영화계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외치며 결사항전 분위기입니다. 당장 올해 영화제 개최조차 점점 불투명해지는 상황입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오마이스타>는 누구보다 이 사태를 애가 타며 지켜보고 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그 열한 번째로 <흔들리는 물결>의 김진도 감독입니다. [편집자말]
 영화 <흔들리는 물결>의 주역 배우 고원희(좌), 심희섭(가운데)과 함께.

영화 <흔들리는 물결>의 주역 배우 고원희(좌), 심희섭(가운데)과 함께. ⓒ 김진도 제공


'어지러웠다. 발이 지면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공중부양이라도 한 것일까? 온 몸이 중력을 잊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작년 10월 초 생애 처음으로 만든 장편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에 초청되어 레드카펫을 밟았을 때의 느낌이다. 수십 명의 취재진들이 쏟아내는 카메라 플래시의 불빛이 그 순간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레드카펫 위를 걷던 그 짧은 시간은 그 만큼 황홀하고 강렬했다. 부산영화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영화제가 나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었다.

만남들

 다큐멘터리 영화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선물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포토존을 지나 개막식 행사장 입장을 위해 잠시 대기했던 장소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주연배우들과 셀카를 찍으며 겨우 정신을 차리려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무> <스틸라이프> <천주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지아장커 감독과 그의 모든 영화를 함께한 여배우 자오타오였다. 지아장커는 데뷔작 <소무>를 통해 나의 위대한 영화감독 리스트에 항상 상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감독이었다. 그만큼 그를 사랑했고 존경했다.

하지만 신비에 가깝던 그 시간은 짧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내가 존경하는 감독과 배우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나는 이것을 부산영화제가 준 두 번째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선물은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을 보고 함께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었다. 15년 전 처음으로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후 누군가 나에게 존경하는 감독이 누구냐고 물으면 항상 처음, 혹은 두 번째로 대답하는 감독이 허우샤오시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나는 세상에 대한 예의와 인간에 대한 존엄, 그리고 고결한 정신을 배웠다. 영화는 결코 사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의 위대한 미장센을 통해 익혔다. 그리고 정직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만이 오직 배우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라는 것을 그의 연출을 통해 알게 되었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서도 그는 강조했다. 영화는 현실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매체라고. 이미 익히 들어온 말이지만 작고 왜소한 몸으로 직접 자신의 영화에 대해 정성을 다해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역사와 인간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이어온 한 영화장인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 선물은 해운대 클라우드 호텔 로비와 호텔 뒤편 횟집 골목에서 받았다. 두 번 정도 마주쳤을 것이다. 처음에는 노숙자 정도로 생각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며 돌아다니는 외국인이 한명 있었는데 묘한 아우라가 인상적이었다. 누굴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을 헤집어 봤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같이 담배를 피던 선배가 나에게 말했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라고. 다시 보니 번쩍하고 생각이 났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을 만든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틀림없었다. 그는 나에게 오랫동안 열정의 대상이었다. 영화 <나쁜 피>를 열 번도 넘게 봤다. 그의 영화는 슬프고 아름다웠고 처절했으며 충분히 시적이었다. 프랑스리얼리즘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것 같았다. 영화를 막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나에게는 흥분 그 자체였다.

거장들이 오고 싶어하는 BIFF

 올해로 스무돌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와 비아시아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부산을 찾는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허우샤오시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클로드 를르슈 감독, 레오스 카락스 감독.

지난해 10월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거장 감독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허우샤오시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클로드 를르슈 감독, 레오스 카락스 감독. ⓒ 오마이뉴스DB, 구글인명DB


선배 형의 설명이 이어졌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부산영화제에 자주 온다고. 그리고 부산영화제를 사랑한다고. 어디선가 전해들은 이야기겠지만 그가 부산영화제를 자주 찾고 좋아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에 왠지 마음이 뿌듯해졌다. 외국의 명장들이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 한국이라는 분단국가를 찾는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부산영화제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고 싶어 한다는 그 열의에서. 나는 부산영화제의 위상을 새삼 확인하는 것만 같아 마음 한쪽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렇듯 부산국제영화제는 세계의 거장들이 주목하고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싶은 명성과 권위를 갖춘 축제로 성장했다. 나는 이 사실이 한 없이 자랑스럽다. 이 모든 성과는 20년 동안 묵묵히 영화제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온 영화제 관계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또한 부산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원도 영화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굳이 영화관계자가 아니라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누구나 여권을 만들거나 비행기 표를 마련하는데 애쓸 필요 없이 매년 10월이면 이런 세계적 거장들을 극장에서, 거리에서, 혹은 해운대 바닷가에서, 언제든 만날 수가 있다. 이는 명백히 부산영화제가 막 영화를 찍기 시작한 신인감독들 뿐만이 아니라 부산시민들에게,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커다란 선물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아름다운 증거가, 이 소중한 선물이, 누군가의 초라한 입김에 의해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지지 메시지를 보낸 프랑스 출신 레오스 카락스 감독.

올해 1월 26일 부산국제영화제 지지 메시지를 보낸 프랑스 출신 레오스 카락스 감독. 개 한 마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사진에는 서명과 함께 "Don't Fuck with Busan IFF"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순화해서 해석하자면 "부산영화제를 망치지 말라" 정도의 뜻이다. ⓒ 부산국제영화제


김진도 감독은 누구?

1973년생인 김진도 감독은 <와니와 준하>(2001) 연출부 출신으로 꾸준히 영화계에서 활동해왔다.

8년 전부터 준비해 온 첫 장편 <흔들리는 물결>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진출했다.


[BIFF를 지지하는 젊은 목소리]

[① 백재호] 부산시민 여러분, 부디 부산국제영화제 지켜주세요
[② 이승원] 누가 BIFF라는 오아시스를 소유하려 하는가
[③ 이근우] "저는 이 영화 부산국제영화제에 낼 거예요"
[④ 조창호] 서병수 시장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한 장의 사진
[⑤ 박석영] 저는 믿습니다, BIFF 키워온 부산 시민들을

[⑥ 이돈구] 부산국제영화제는 내게 기적이다
[⑦ 박홍민] 영화제 제1명제: 초청되는 영화에는 성역이 없다
[⑧ 지하진] 영화 속 유령들까지 부산영화제를 지킬 것이다
[⑨ 이광국] 부산시장님, 많이 외로우시죠?
[⑩ 김대환] 많이 아픈 부산국제영화제야, 내가 너무 미안해

* 우리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지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지키기 백만서명운동 사이트' (http://isupportbiff.com)에서 관련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isupportbiff

부산국제영화제 김진도 고원희 심희섭 부산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