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참가 감독들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 성하훈
부산국제영화제는 특히 감독들에게 절실하다. 대기업 중심의 현 영화 산업 구도에서 자신들의 진심과 진가를 가장 먼저 알릴 수 있는 무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제는 창작자들의 요람이다. 24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서울아트시네마에 모인 감독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2014년 <다이빙벨> 상영 이후 이어지고 있는 부산시의 영화제 독립성과 자율성 훼손 문제에 대해 148명의 감독들은 절실한 마음으로 호소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명성 그 6일의 기록>으로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김동원 감독이 포문을 열었다.
김 감독은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적으로도 지명도 있는 영화제가 <다이빙벨> 상영으로 휘청거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영화 하나로 전국이 시끄럽고 전 세계가 안타깝게 보는 이 상황을 만든 서병수 시장의 처사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병수 시장의 처사 용납할 수 없다"영화 <들꽃>과 <스틸 플라워>로 19회, 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한 박석영 감독은 세월호 사고와 <다이빙벨>에 빗대 현재 상황을 비판했다.
"옆집에 살던 친구가 여행을 가다가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얼굴을 그렸고, 선생님에게 그걸 보여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의 마음이 기특해서 벽에다 걸고 다함께 그림을 보고자 했는데 갑자기 이사장이 그 아이를 퇴학시키고 선생을 자르라고 했습니다. 전 납득할 수 없습니다. 2016년에도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습니다." (박석영 감독)이어 박 감독은 "<스틸 플라워>를 찍기 위해 부산에 내려갔는데 부산 시민들은 돈 한 푼 요구하지 않고 먹을 걸 줘가며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도와주셨다"며 "(영화제를 압박하는 서병수 시장과 달리) 부산시민은 그런 분들이 아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박 감독은 "영화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부산에서 느꼈다"며 "부산 시민들께 영화제를 품에 안아주시길 호소한다"고 덧붙였다.
<한공주>로 부산영화제를 찾았던 이수진 감독은 "서병수 시장이 지난 기자회견 때 누구의 영화제인지 묻는 물음을 던졌는데 오히려 지역감정을 자극하려는 의도 같다"며 "21회를 준비하려는 때에 영화제를 파행으로 이끄는 의도가 무엇인지,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어 나왔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만약 영화제가 <다이빙벨>을 그때 상영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욱 끔찍한 사태가 있지 않았을까"라며 당시 영화 상영은 당연한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회견장은 한때 부산영화제에 참여한 감독들의 추억 릴레이가 되기도 했다. <후회하지 않아>의 이송희일 감독은 "부산에 한 번 갈 때마다 술값만 30만원 넘게 쓴 거 같다"며 이른바 '부산경제 기여론'을 펼쳤고, <소셜포비아>의 홍석재 감독은 "중학생 때 1회 영화제에 버스 타고 놀러갔다가 두근거렸던 그 설렘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고백했다.
김조광수 감독은 "아무것도 몰랐던 시기에 이용관 위원장이(당시엔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제에 대해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주기도 했다"며 "초창기 때부터 영화제의 성장에 기여하신 분이 서병수 시장의 재위촉 불가 한 마디로 밀려나는 현실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편 데뷔작 <지금 이대로>로 부산의 초청을 받았던 부지영 감독도 "영화제를 20년 간 만들어온 수많은 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자산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게 참담하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피력했다.
기자회견 시각, 부산지검에서는
▲ 24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참가 감독들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송희일 감독이 발언 중이다. ⓒ 성하훈
같은 시각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부산지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고 있었다. 감사원의 권고로 부산시가 이 위원장을 고발했고, 올해 초부터 검찰은 부산영화제 관계자들을 차례로 불러 조사를 진행 중이었다. 이런 조사에 대해 영화계에서는 "10여억 원 이상을 부실 집행한 다른 단체에겐 시정 권고 조치만 내렸고, 1억이 안 되는 영화제는 고발 조치했다"며 표적수사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김조광수 감독은 "20년을 부산영화제와 함께 보낸 이용관 위원장을 소환시킨 서병수 시장이야 말로 검찰해 출석해야 하다"며 "그 분은 성완종 리스트에도 오른 사람이잖나, 서 시장은 지금이라도 고발을 취하하고 국민들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권력 갖고 계신 분들이 예술의 속성을 잘 모르는 것 같다"기자 회견 이후 대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부산시가 현재 올해 새롭게 위촉된 자문위원 68명에 대한 자격 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고, 이에 대한 심리가 지난 21일 부산지법에서 진행됐다. 영화계는 심리 결과에 따라 부산국제영화제의 전면 보이콧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김조광수 감독은 "아직 임시총회가 열리지 않아서 영화제 보이콧 문제를 어떻게 하겠다 정하진 않았지만, 자율성이 보장되고 영화제가 정상화 된다면 참여할 준비는 돼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 말은, 거꾸로 보자면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영화제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영화제 파행 움직임에 박정범 감독은 "모든 영화제엔 자본이 필요하기에 지자체와 상호관계가 발생하는데,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해야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영화제가 원래 해왔던 그대로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소통과 거짓말>의 이승원 감독은 회견 말미에 조용히 마이크를 들고 예술의 속성을 강조했다. 서병수 시장과 부산영화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정리할만한 한 마디였다.
"권력을 갖고 계신 분들이 예술의 속성을 잘 모르시는 거 같습니다. 예술은 짓밟힐수록 더 강해지고 독해집니다. 아마 더 훌륭하고 엄청난 작품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절망적일수록 더 희망을 보고 감독님들이 전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승원 감독)다음은 부산국제영화제 참가 감독 148인의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부산영화제를 지키고 싶습니다! 저희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여했던 감독들입니다. 저희 서로는 이제 몇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는 것 말고는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각자 세대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종교나 정치적인 입장도 서로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저희에게는 서로의 다름보다 더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저희에게 부산국제영화제는 든든한 울타리였습니다. 영화제를 통해 기쁘게 관객을 만날 수 있었고, 과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전 세계 다양한 관점의 영화들을 만나고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 분들의 새로운 시선을 배우며, 각자 마음의 크기를 키웠습니다. 그 경험은 영화인으로서의 성장 뿐 아니라 '다름'을 껴안을 수 있는 인간으로 성숙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의 대표적 영화제로 성장해나간 것은 영화제 자체의 규모의 성장만이 아니라 그곳에 참여한 영화인들과 시민들의 내적 성장을 동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성장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만의 성장이 아니라 세계 영화계의 건강성을 유지하는데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그 바탕에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적인 토대 위에서 20년에 걸친 전문성과 균형 감각을 가지고 지켜온 부산국제영화제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문화는 '다름'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과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는 원칙 안에서만 꽃 피울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 시선과 원칙이 국가의 품격이며, 동시대는 물론 다른 세대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부산에서는 어떤 품격도 예의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 이것은 문화예술지원의 숭고한 전제이며 전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적 이해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울타리는 오히려 더 넓어져야 합니다. 결단코 더 깊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가 우리 세대만의 소유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계 없는 하늘을 본 아이는 우주를 상상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손을 담근 아이는 자연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우리가 전할 자유로운 문화의 가치로 인생을 만날 것입니다.우리는 온 힘을 모아 부산시에 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보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어떠한 부당한 간섭과 압력에도 굴복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열정과 함께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마음을 모아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