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귀향>의 포스터.

영화 <귀향>의 포스터. ⓒ 와우픽쳐스


지난 주말, 두 아이와 함께 영화 <귀향>을 관람했다. 사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데에는 적잖은 고민이 필요했다. 일찌감치 영화를 본 몇몇 지인들로부터 아이들이 보면 많이 힘들어할 거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은 터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기반 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어른들조차 분노와 슬픔을 가누기 힘들다고 했다.

하긴 열 살 배기 딸아이는 미리 어떤 영화인지 나름 꼼꼼하게 일러 주었는데도 보는 내내 무섭다면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기 일쑤였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란 예상은 했지만 한창 역사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인 터라 나름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무엇보다 집에 아이 혼자 두고 올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영화 <귀향>은 15세 이상 관람가다.

아이들이 놀랐다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또래인 큰 아이도 내내 놀란 듯 토끼눈을 떴다. 아무리 엄혹한 일제강점기였다고 해도 "설마 십대의 아이들을 저렇게 두들겨 패고 죽이기까지 했겠느냐"며 반문할 정도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그는 당시 참혹했던 현실과 영화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내 고민은 정작 다른 데에 있었다. 영화가 자칫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을 부추기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애초 일본에 대한 '증오 DNA'를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닐 텐데, 큰 아이는 물론 열 살 배기 아이조차 세계에서 가장 싫은 나라로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일본을 꼽는다. 심지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할 나라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다.

기실 다 큰 고등학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열이면 열 모두 일본이 가장 싫다고 한다. 일본 선수가 뛰는 프로축구팀이라면 무조건 싫다거나 일본 국기만 보면 재수가 없다고 말한다. 작년까지 일본 프로야구를 주름잡던 이대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도전한다는 뉴스를 듣곤 서운하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더 이상 일본 선수들의 콧대를 꺾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란다.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영화 <귀향>의 한 장면. ⓒ 제이오엔터테인먼트


그들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일본인도 많다는 걸 좀처럼 믿으려들지 않는다.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 극우정권에 맞서 연일 시위를 벌이는 일본인들도 있고, 위안부의 존재 자체가 전쟁 범죄 행위라며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일본의 지식인들 또한 적지 않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일본 내 극우세력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진실을 외치는 그들에게 우리 아이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그들 역시 '일본인'이라는 이유에서다.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의 후예들이 득시글거리는 일본 정권과 그들에 저항하는 일본 내 양심 세력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친일 민족반역자들처럼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도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같은 한국인이 많았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말이다.

일본 극우정권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테지만, 그들은 일본인이기 이전에 오로지 양심에 따라 진실만을 밝히려는 세계 시민이다.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다짜고짜 미워해서는 곤란한 이유다. 아무튼 그들을 두고 내 편 네 편 따지는 건 '세계 시민답지' 않은 저급한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 믿는다.

다행히도 내 고민은 기우였다. 영화관을 나오며 일본에 대해 많이 화났냐는 아빠의 유치한 질문에 큰 아이는 "당시 침략전쟁에 동원된 일본 군인들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오로지 가해자 일본군과 피해자 위안부의 대립으로 비치게 될까 걱정하던 내가 되레 머쓱해졌다. 아이가 우선 기억하는 장면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위안소를 찾은 말단 일본군(다나카 분)이 주인공(정민 분)에게 10분간만이라도 쉬라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병에 걸린 위안부 여성들을 끌고 가 집단 사살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되레 상관에게 처형당하는 장면을 먼저 떠올렸다. "악마 같은 일본군이라 해도 그런 착한' 사람 한두 명은 있지 않았겠냐"면서 그 때문에 영화가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맹목적인 분노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영화 <귀향>의 한 장면. ⓒ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사실 없어도 그만인 장면이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만약 이 꼭지가 삽입되지 않았더라면 영화가 단순해졌을 것도 같다. 악한 일제의 지배에 고통 받는 선한 식민지 백성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읽히게 될 테니 말이다. 일본 자체를 악마화하면 투철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언정 자칫 진실이 가려질 수도 있다. 말하자면 진실에 가깝도록 배려된 허구라고나 할까.

이 장면으로 인해 아이는 영화 속 일본 군인들과 일본 제국주의를 구분지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한 일본 군인을 조연처럼 영화에 담았다고 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외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무책임한 주장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곁가지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진실에 다가가겠다는 감독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족이었던 거다.

또,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위안소를 운영하는 이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려진 장면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설마 자신의 딸 같은 여성들을 지옥 같은 환경에 모아놓고 몹쓸 짓을 시켰겠느냐며, 사실인지 허구인지 묻기도 했다. 이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공분을 사며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에서 그토록 강조한, 언필칭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나 또한 일정 부분 허구가 아닌 사실일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도 아닐뿐더러 일본의 전쟁 범죄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관객들의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을 차단하기 위한 영화 속 안전장치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장면은 정작 영화 밖에 있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술치료를 받으며 손수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며 자막이 올라가는 바로 그 장면이다. 언뜻 초등학생 아이들이 그린 듯 삐뚤빼뚤 천진난만해 보이지만, 그림들마다에는 할머니들의 신산했던 삶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듣자니까 감독에게 영화 제작의 모티프를 제공한 그림들이라고 한다.

영화가 끝난 후 깨알 같은 글씨로 끝없이 자막이 올라갔지만, 일어서는 관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느 작품과는 달리 엔딩 자막조차 영화의 일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자막에는 감사 인사를 대신 전하려는 듯, 영화 제작에 십시일반으로 기부한 7만 5000여 시민들의 이름을 일일이 밝히고 있다. 아이는 이 영화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이 무슨 뜻인지 처음 알았단다.

그는 영화의 내용보다 제작 과정이 더 감동적이라며, 시나리오를 쓰기부터 제작해 개봉하기까지 무려 14년이나 걸린 이유를 궁금해 했다. 굳이 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허접한 작품은 아니지 않느냐며 돈이 없어 제작하지 못했다는 걸 의아해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영화라면 정부가 나서서 후원해야 맞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는 부끄러웠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다룬 영화 <귀향>의 조정래 감독과 영희 역을 맡은 배우 서미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다룬 영화 <귀향>의 조정래 감독과 영희 역을 맡은 배우 서미지. ⓒ 이희훈


차마 아이 앞에서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아빠이기에 앞서 이 땅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참담할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아야 했던 감독과 몸이 아픈 상태에서도 배우로 직접 출연해 1인 2역을 기꺼이 해낸 프로듀서 같은 분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고 대답했다면 나았을까. 또, 자비를 들여 출연한 재일교포 출신의 신인 배우들도 있고, 노 개런티로 중요한 배역을 맡아준 중견 배우들도 있었다고 하면 뿌듯해 했을까.

아니, 돈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민감하기까지 한 주제의 시나리오에 투자하는 이들이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어땠을까. 입만 열면 '작품만 좋으면 개런티에 상관없이 출연할 것'이라던 유명 배우들도 속내는 전혀 달랐다고 말했다면 또 어땠을까. 그보다 작년 말 정부가 일본과 체결한 굴욕적이고 매국적인 '12. 28 위안부 협상' 소식이 알려진 후 관람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하는 것이 아이의 궁금증에 대한 가장 명쾌한 답일 것도 같다.

영화관을 막 나서는데 가입한 밴드에서 단체 알람이 왔다. 영화 <귀향>을 추천하는 내용이었는데, 꼭 봐야 하는 이유를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영화 시나리오에서 개봉까지 무려 14년의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는 걸 기억하자. 전국의 영화관을 연일 강타하고 있는데도, 종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중파에서조차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는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 이 영화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편에 서서 참혹했던 역사를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시간은 결국 강자들의 편이라는 인식에 주눅 들지 말고, 다함께 손잡고 끝까지 버텨내야 한다. 옹골찬 분노가 비루한 냉소로 꺾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를 담금질하자. 이 영화가 큰 힘이 돼줄 것이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스스로 뭔가 깨달았다는 듯 이렇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의 자문자답에 한 번 더 부끄러워졌다.

"다음 주쯤 친구들과 또 보러 올 거예요. 십시일반으로 만든 영화, 십시일반으로 대박치게 해야죠."


귀향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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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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