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들이 죽었다> 백재호 감독

영화 <그들이 죽었다>의 언론/배급시사회 당시 백재호 감독의 모습. ⓒ (주)인디스토리


한 남자가 있다. 배우였던 남자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담긴 첫 장편 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다. (공식적으로) 처음 만든 영화임에도 불구,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섹션 초청되었다. 뉴커런츠는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신인 감독 중 주목할 만한 10명을 뽑아 이들의 영화를 소개하는 부문이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지난 2015년 12월 10일 극장 개봉에도 성공을 거둔다. 독립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VIP 시사회를 하기도 했지만, 애초 그 남자의 영화에 할당된 상영관은 지극히 적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을 찾았고, 자신의 영화를 보러온 관객들과 일일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관객을 만나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던 그의 발걸음은 영화가 공식적으로 종영한 지난 1일에서야 끝을 맺었다. 관객 수 총 2364명. 아쉬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야 마음 놓고 자신의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그 남자, 감독 백재호.

그의 첫 영화인 <그들이 죽었다> 그리고 상영 이후 영화를 둘러싼 뒷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아래는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어느 카페에서 백 감독을 직접 만나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아시아가 주목해야 할 10명의 신인감독 중 한 명

 지난 2015년 12월 7일, 영화 <그들이 죽었다> VIP시사회 현장. 백재호 감독과 주연 배우 김상석, 이화의 모습.

지난 2015년 12월 7일, 영화 <그들이 죽었다> VIP시사회 현장. 백재호 감독과 주연 배우 김상석, 이화의 모습. ⓒ (주)인디스토리


- <그들이 죽었다> 하면, 이 영화가 세상의 빛을 보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부산국제영화제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특히나, 처음 만든 영화임에도 불구 수많은 영화인의 꿈인 부산국제영화제, 그것도 '뉴커런츠' 섹션에 초청되었잖아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들이 죽었다>가 부산국제영화제에, 그것도 '뉴커런츠'에 초청받은 게 신기하고 믿기지 않았어요. 영화제에서 영화 상영 전, 남동철 프로그래머와 식사를 할 때, 남 프로그래머에게 다짜고짜 물어봤어요. '왜 내 작품을 뽑았나요?' 그랬더니, 남 프로그래머가 저한테 이러더군요. '예상 가능한 범주를 빗나가는 전개가 좋았다'고요. 이 말은 <그들이 죽었다> 마지막 GV(관객과의 대화)에도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들이 죽었다>가 영화제 초청받을 것이라고 아예 생각조차 안 했어요. 부산국제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했을 때도, 그때 (부산국제영화제)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는데, 빈 사무실의 책상 위에 영화가 담긴 DVD를 올려놓으면서도, '설마 이 영화가 부산에 가겠어?' 이 생각뿐이었어요. 만약 진짜 부산에 초청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면, 극 중 상석이 혼자 부산국제영화제 가서 들린 모텔에서 티켓다방 여성을 앞에 두고 '내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영해'라는 식의 허세 부리는 장면이 들어가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뉴커런츠'에 초청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한 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혹시 누군가가 장난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 그래도 상상으로만 그친 영화와는 달리 진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습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전 <그들이 죽었다>가 관객 만 명(독립 영화에서 관객 만 명은 흥행의 상징적인 숫자로 통용된다)을 넘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독립 영화가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은 높더군요.
"우선, 제가 만나본 관객들이 보여준 <그들이 죽었다>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어요. 좋게 보시는 분은 좋게 보시고, 반면 포스터만 보고 발랄한 청춘영화를 기대한 분들은 적잖이 당황하시고…. 일단 저는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김상석, 김태희)과 함께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그래도 다른 영화 대신 <그들이 죽었다>를 보러 와주신 관객들 한 분 한 분이 고마웠어요. 그래서 전 제 영화에 대한 쓴소리, 제가 미처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았어요. 영화는 특정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예술이니까요."

- <그들이 죽었다>에 배정된 상영관(전국 18개 상영관, 2015년 12월 10일 기준) 수도 참 아쉬웠어요. 왜, 하필이면 2015년 12월 10일에 개봉날짜를 잡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소문에 의하면, 극 중 지구가 멸망한다는 12월 21일에 맞추기 위해, 일부로 개봉날짜를 그렇게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12월 21일에 맞추기 위해, 일부로 12월 10일에 개봉한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원래는 11월 말에 개봉날짜를 잡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주는 매년 서울독립영화제가 열리죠. 그래서 그 날짜를 피하다 보니, 12월 10일로 개봉일을 정한 거예요."

 지난 2015년 12월 12일, CGV 아트하우스에서 열린 시네마톡에서 <그들이 죽었다>의 백재호 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지난 2015년 12월 12일, CGV 아트하우스에서 열린 시네마톡에서 <그들이 죽었다>의 백재호 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 (주)인디스토리


- 개봉 첫 주에는 CGV 아트하우스 전용관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었으나, 진짜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거나 평소 독립영화를 챙겨보는 관객이 아니라면, 쉽게 볼 수 없는 시간대에 배치된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건 <그들이 죽었다>만 겪었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멀티플렉스의 독립예술영화관 지원사업이 오히려 일반 관객들의 독립예술영화 진입에 또 다른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대기업이 투자한 상업 영화에 밀려 상영관을 잡기 어려운 다양성 영화들에 안정적으로 상영할 기회를 확보해준다는 취지는 좋아요. <그들이 죽었다>도 혜택을 보았고요. 하지만 다양성 영화로 분류된 영화는 특별한 경우 아니면, 일반 스크린에 걸리지 않아요.

단적인 예로, CGV 아트하우스 전용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의 예고편은 오직 CGV 아트하우스 전용관 스크린에서만 볼 수 있어요. 만약 <검사외전>을 보기 위해 일반 상영관에 들어간 관객들은, 평소 다양성 영화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이상 <캐롤>이나 <자객 섭은낭> 같은 영화들이 지금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은 원래부터 그 상영관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만 찾아오고, 그래서 외부에서 봤을 때는 '그들만의 리그'처럼 비치죠. 점점 그렇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거죠.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에서 최선을 다할 것"

 영화 <그들이 죽었다> 한 장면

영화 <그들이 죽었다> 한 장면. 그들은 죽었지만, 백재호 감독은 아직 죽지 않았다. ⓒ (주)인디스토리


-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지난해 11월 '씨네코드 선재'가 문을 닫은 데 이어, 올해는 강원도 강릉에 있는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이 휴관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죠.
"독립예술영화전용관들의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에는, 독립예술영화 관객층의 일부가 기존의 극장 관람이 아닌, 다운로드·IPTV 등으로 영화관람 형태를 바꾸었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본격적으로 독립영화예술시장에 진출한 멀티플렉스와의 경쟁에서 밀린 것도 크겠지요.

하지만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추진하는 '예술영화유통배급지원사업'과도 관련이 있어요. 현재 부산시가 부산국제영화제를 고발한 사건도 이와 무관하지 않고요.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기 때문에,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를 상영한다면 안 된다는 시선이 존재하는 한,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죠." (지난해 11월 백재호 감독 포함 독립영화감독 120명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 지원사업을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 그래서 대안 배급, 공동체 상영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움직임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요.
"예전에 서울에 있는 A 극장에서 대안 상영 형식을 몇 번 시도한 적이 있어요. 물론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대안적인 상영을 모색하는 움직임은 필요하다고 봐요.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는 어떻게든 독립 영화들이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그 자체가 중요하니까요."

- 그나저나 관객과의 대화를 참 많이 하셨어요.
"훗날 '그때 관객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눴어야 했는데'라고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매일 <그들이 죽었다>가 상영하는 극장에 갔어요.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죠. 그런데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이화가 감독인 저보다 극장에서 <그들이 죽었다>를 더 많이 본 것 같아요. 바쁜 시간을 쪼개서 매일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거든요."

- 사비를 들어 감독님 중·고등학교 후배들에게 <그들이 죽었다>를 보여줬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최근 한국독립영화협회(아래 한독협) 운영위원이 되었는데, 제가 추진하고 싶은 사업 중 하나가 청소년들에게 독립영화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사실 저도 대학교 때, 우연히 길을 가다가 발견한 극장에서 처음으로 독립예술영화를 알게 되었죠. 영화를 전공하거나 그쪽 분야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접하기도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제 학교 후배들에게 '이런 영화도 있구나'하고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실행에 옮겼어요. 물론 그 친구들 대부분이 앞으로도 꾸준히 독립영화를 찾아서 볼 거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그중에서 정말 몇 명은 독립 영화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끌게 되지 않을까요. 일단은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과정도 쉽지 않으니까요."

- 그래서 평소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영화제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죽었다>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제는 소수 특정 대학 출신의 영화만 초청되는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직접 겪은 현실은 달랐어요. <그들이 죽었다>로 처음으로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을 때, 저나 출연 배우들이나 레드 카펫 자체가 처음이다 보니, 많은 해프닝이 있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레드카펫 입구에 도착하고, 그때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죠.

그 찰나, 그때 행사를 총괄하고 있던 김영우 프로그래머가 저희 팀을 보자마자 반갑게 "영화 정말 잘 봤어요" 인사를 해주시더군요. 그때 김 프로그래머가 건네주신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반갑고, 감사했는지 몰라요. '아, 진심으로 우리 영화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시는 분이 있구나!' 그래서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죠.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수많은 감독님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거예요. 누군가가 내가 만든 영화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것만큼, 큰 힘이 없지요."

- 감독님도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 지지 인증샷 릴레이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전 세계 영화인들의 꿈을 응원하는 무대로서 부산국제영화제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야 <그들이 죽었다>가 그랬듯이, 또 다른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의 영화가 영화제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으니까요. 끝으로 <그들이 죽었다> 종영에 대한 간단한 소감을 듣고, 인터뷰를 마칠까 합니다.
"<그들이 죽었다>는 일단 공식적인 극장 상영을 마무리 지었지만, 그래도 저는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들 것이고, 독립 영화인으로 꾸준히 활동할 거예요. <그들이 죽었다>도 일반적인 형태의 극장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의 상영을 통해 관객들과 만나는 날이 조만간 오겠죠. 포기하지 않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비록 그들은 죽었지만, 전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영화 <그들이 죽었다> 포스터

영화 <그들이 죽었다> 티저포스터.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지난 1일 막을 내린 <그들이 죽었다>의 최종 스코어는 2364명이었다. ⓒ (주)인디스토리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진경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neodol.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죽었다 백재호 독립영화 부산국제영화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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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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