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 포스터

▲ 킹메이커 포스터 ⓒ 시너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치러지고 있는 미국 주요정당 예비선거(primary)를 바라보며 문득 세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하나는 스티븐 자일리언의 <올 더 킹즈 맨>이고, 다른 하나는 조지 클루니의 <킹메이커>, 마지막 한 편은 프랑크 카프라 감독의 1939년작 <스미스 워싱톤에 가다>였다.

앞의 두 편은 현대 정치판을 다룬 드라마임에도 제목에 '킹'이 들어가는데, 헌법에 기초한 민주사회일지라도 정치의 본질은 여전히 권력에 있음을 상징한다. <킹메이커>의 원제인 <The Ides Of March>는 로마 카이사르 암살일자를 뜻하는 경고 문구로, 영화의 줄기가 브루투스에 의해 죽음을 맞은 카이사르의 이야기와 유사하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이 영화들 가운데 이번에 살필 작품은 조지 클루니가 직접 감독하고 연기한 <킹메이커>가 되겠다. 대선에 앞서 치러지는 주별 예비선거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요즘 상황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작품이다.

영화는 오하이오주 예비선거를 앞둔 민주당 마이크 모리스 선거캠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주인공인 스티븐 마이어스(라이언 고슬링 분)는 캠프 사무장 폴 자라(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분)를 도와 모리스 캠프를 이끄는 두뇌다. 그의 빠른 계산과 과감한 전략 덕분에 모리스 캠프는 유력 후보인 풀먼 측에 밀리지 않는 선전을 이어간다. 이대로만 가면 순조롭게 상승기류를 탈 것도 같지만, 풀먼 진영 캠프 사무장 톰 더피(폴 지아마티 분)가 이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자넨 오하이오에서 져. 여론조사에선 자네 측이 6% 앞서고 있지. 민주당 여론조사에선."
"8%에요."
"아니, 6이야. 상관없지만. 오하이오는 공개 경선이지? 무소속이나 공화당도 민주당 후보를 찍을 수 있어."
"낙태와 세금인상을 찬성하는 풀먼을 좋아하겠어요?"
"좋아하긴 개뿔, 잡아먹으려 들지. 공화당은 풀먼을 쉽게 봐. 모리스를 견제하지. 그래서 내일 아침부터 매스컴 공세에 들어가 TV매체와 우익 블로그들이 투표하자고 열을 올리겠지. 벌써 시작됐어. 오하이오의 보수파들이 풀먼을 찍으러 올 걸세. 그거 한 방이면 오하이오는 날아가, 여론은 무의미하지. 내일이면 윤곽이 드러나."

(중략)

"나도 비열한 수 써봤어요."
"난 또 몰랐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왠지 알아요? 모리스니까."
"지금은 민주적인 절차보다 당선시키는 게 중요해."
"그건 공화당이나 쓰는 수죠."
"제대로 봤네. 공화당이나 쓰는 수지. 그들한테 배울 때도 됐잖아. 더 비열하고 거칠고 잘 훈련됐지. 25년간 내가 봐왔던 민주당원들이 고배를 마신 건 공화당처럼 진흙탕에서 뒹굴질 않아서야."

정치판에서 겪게 되는 이상과 현실의 딜레마

킹메이커 대선후보 마이크 모리스 역을 맡은 감독 겸 배우 조지 클루니.

▲ 킹메이커 대선후보 마이크 모리스 역을 맡은 감독 겸 배우 조지 클루니. ⓒ 시너지


영화의 주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정치판에서 마주하는 이상과 현실의 딜레마' 정도가 될 것 같다. '킹'에 해당하는 대선후보 마이크 모리스(조지 클루니 분)가 참모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상품처럼 그려지는 것이나, 영화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주체적 인물들이 '킹 메이커'에 해당하는 캠프 참모들이란 점에서 그렇다. 감독은 자신의 후보가 승리하게끔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참모들에 주목함으로써 정치판의 맨 얼굴을 스크린 위에 사실적으로 펼쳐 보인다.

아내에게 "매번 선을 긋는데도 자꾸만 선을 넘게 된다"고 털어놓던 모리스를 바라보며, 그가 TV 채널에 출연해 자신의 신념을 거리낌 없이 밝힐 때마다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참모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들이 왜 정치를 하고 어째서 자신의 신념을 어길 수밖에 없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처음엔 뜻을 꺾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모리스가 결국엔 모든 부분에서 신념을 굽히고 스티븐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 보며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고민도 갖는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정치에서 승리해야 하고, 현실정치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상에 반하는 일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적 상황이, 영화 내내 지속된다. 영화는 이 같은 상황에 처한 유력 정치인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뒤 관객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끔 한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당신은 이런 선택을 한 정치인을 지지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물음이 이내 뒤따른다.

한 술 더 떠 영화는 흠이 없을 것처럼 보이던 모리스의 도덕적 약점을 들춰내고, 이와 같은 결함을 가진 정치인도 지지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모리스를 완전히 신뢰할 만한 인물로 생각했던 스티븐은 그의 결함을 알게 된 후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지만, 그를 떠나는 대신 더욱 강한 정치인으로 거듭나도록 돕는다. 세상을 바꾸려는 정치인일지라도 모든 면에서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게 스티븐이 내린 결론일까? 그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캠프를 떠나지 못했을 뿐일까? 확신할 수 없다.

어디까지가 정치인의 진짜 모습이고 또 어디까지가 만들어진 것인지를 확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영화에서 수차례 보여지는 것처럼 정치인의 연설은 참모진이 쓴 글을 자신의 말투로 고쳐 낭독하는 것에 불과하고, 그가 각 사안에 대해 밝힌 입장도 이해득실을 따져 철저하게 계산된 것일테니 말이다. 정치인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의 본래 생각과 다른 주장을 늘어놓는다 해도 우리는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가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변하지 않은 정치의 본질

킹메이커 마이크 모리스의 나약한 일면을 발견한 뒤 정치판에 눈을 뜬 스티븐 마이어스(라이언 고슬링 분)

▲ 킹메이커 마이크 모리스의 나약한 일면을 발견한 뒤 정치판에 눈을 뜬 스티븐 마이어스(라이언 고슬링 분) ⓒ 시너지


<킹메이커>는 전형적인 정치 드라마다. 이상과 낭만을 간직한 젊은이가 정치판의 추한 모습을 대면하고 변한다는 기본적인 얼개부터가 그렇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영화적 기법이나 구성상의 장치는 눈에 띄지 않는다. 수미상관의 결말과 의미심장하게 반복되는 대사, 능란한 편집 등을 통해 주제의식을 세련되게 드러내긴 하지만, 기존의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수준은 결코 아니다. 내적인 측면에서도 정치판의 이면을 배경으로 설정해 이색적인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을 뿐 정치에 대해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권력을 원하지만 권력을 갖기 위해 신념에 반하는 일을 저질러야 하는 상황을 보며, 관객은 정치인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이러한 질문은 현실정치에도 유효할 수 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형편없는 인물에게 부통령직을 약속하고 비방과 흑색선전도 마다치 않는 이들의 모습이 영화 속에만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왕정국가에서 민주사회로 체제는 발전했지만, 권력추구라는 정치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음을 이 영화는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뉴햄프셔를 비롯해 각 주 별로 본격적으로 전개될 미국 예비선거를 조금은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다면 <킹메이커>만한 영화도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킹메이커 시너지 조지 클루니 라이언 고슬링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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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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