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봇, 소리>에서 신진호 역의 배우 이희준이 1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로봇, 소리>와 <오빠생각>를 들고 나온 이희준. 비슷한 시기 서로 색깔이 다른 두 작품을 통해 이희준의 면모를 탐색해보자. 둘 다 단순한 악역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캐릭터다. 그 입체감을 이희준이 고스란히 담아냈다. ⓒ 이정민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이 악역이라면 최근 참여한 두 영화 <오빠생각>과 <로봇, 소리>에서 이희준은 분명한 악역이었다. 전자에서 그는 전쟁통에 팔 하나를 잃은 상이군인으로 고아들을 학대하는 갈고리 사내(<오빠생각>)였고, 후자에선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국정원 직원(<로봇, 소리>)이었다. 시대극과 SF드라마, 뿌리가 서로 다른 이야기 안에서 누구보다 이희준의 캐릭터들은 치열했다.

이 모든 게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전작 <해무> 때도 그랬다. 순박한 어부였지만 돈과 여자 앞에 광기를 드러내버린 가엾은 청년이었으니. 이처럼 열악한 삶의 조건을 이겨내고 생존하기 위해 그의 캐릭터들은 남을 착취하거나 스스로 비열해지곤 했다.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희준은 "이런 이야기에 심장이 뛰었고, 그래서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 남자, 스스로 악역 전문임을 선언하는 걸까.

악역-선역 보다 중요한 것


이희준의 심장을 뛰게 한다는 건 그 작품이 적어도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는 뜻이다.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내가 공감 못 하고 이해가 안 가면 고사하는 편"이라며 그는 "<오빠생각>은 캐릭터 때문이었고, <로봇, 소리>는 소재 때문에 참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서로 다른 이유로 경험하게 된 두 작품은 그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손 잃은 거지가 고아들을 데리고 그런 일을 했다는 걸 관객들에게 믿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빠생각>에 참여했습니다. 전쟁의 참상은 내가 경험하기 힘든 것이기에 친한 형의 할아버지를 찾아 뵀어요. 육군 상이용사로 의족을 하고 계신데 귀찮을 정도로 갔죠. 다행히 이한 감독님께서 현장 세트장을 허물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게 없는지 물었어요. 창작자로 존중 받는 거 같아 너무 신나더라고요. 그간 내가 취재했던 걸 바탕으로 이런저런 장면을 다 찍었습니다. 그 중 몇 개가 영화에 쓰였고요.

<로봇, 소리>의 이호재 감독님은 정말 콘티대로 찍으세요. 처음부터 당신의 머릿속에 구상한대로 하시는 거죠. 이한 감독님이 배우와 상의하며 찍는 분이라면, 이호재 감독님은 배우의 몸짓까지도 자세하게 주문하십니다. 그래서 주어진 대본에서 어떻게 캐릭터를 살려낼지 고민해야 했어요. 사실 (함께 출연한) 이성민 선배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시간상 편집됐어요. 일주일 정도 고민한 거였는데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전적으로 감독님의 권한이니까요(웃음). 전 감독님을 신뢰합니다!"

연이어 선보인 영화만으로 그를 악역 전문으로 낙인찍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를 유명해지게 만든 건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순정파 천재용과 같은 캐릭터였음을 알아두자. "희한하게 드라마에선 선역을, 영화에선 악역을 많이 했던 거 같다"며 그가 갸웃거렸지만,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대중의 호감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표현하는 캐릭터의 진실성임을 말이다.

"<넝쿨당>으로 먹고 싶은 밥을 사먹게 됐지요(웃음). 어쩌면 배우는 수도승 같은 직업일 수 있어요. 허구의 인물이지만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거든요. 연기하면서 느끼는 희열과 행복감을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생각이나 기준이 없으면 눈이 흐려지기 쉬워요. 돈이나 비중에 연연하지 않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솔직히 요즘 인터뷰를 하면 내 결혼에 대한 기사만 나는 걸 보면서 사생활로 주목받는 게 불편했어요. 하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배우를 그만두고 싶지 않습니다. 연기가 그만큼 좋아요."

취재하는 배우

 영화 <로봇, 소리>에서 신진호 역의 배우 이희준이 1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극단 생활을 했던 이희준은 서서히 작품을 쌓아가며 실력을 인정받아왔다. 같은 극단 출신인 이성민 배우를 좋아한다. <로봇, 소리>로 만난 이성민에게 그는 하트가 담긴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17년만에 문자로 하트는 처음 써봤다"며 그가 쑥스러워했다. ⓒ 이정민


좋아한다고 주저 없이 말했지만 이희준은 스스로를 "재능 없는 노력파"로 여기고 있었다. 스물다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했기 때문이었다. 화학공학도였던 그가 우연히 무대에 오르게 되며 연기를 꿈꾸게 됐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극단 차이무 출신인 그는 송강호, 이성민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 틈에서 기죽지 않고 자신의 길을 발견한 끈기파기도 하다.

그 노력과 끈기의 증거 중 하나가 치열한 취재와 간접경험이었다.

"어떤 작품을 하든 취재는 꼭 합니다. 물론 그게 연기에도 반영되면 최고겠지만, 취재 과정 자체가 행복해요. <해무> 때는 한 선원을 만났고, <로봇, 소리>를 위해선 운 좋게 국정원 직원을 소개받았어요. <오빠생각>의 그 할아버지도 취재였지요. 그 분들의 얘길 들으며 내 삶도 반추하고 행복이란 걸 생각합니다. 제 입장에선 다들 선생님이지요.

국정원 소속이라면 특별하게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만나보니 한 명의 회사원이었어요. 영화에서 심각하게 해관(이성민 분)을 뒤쫓다가도 엄마의 전화를 받는 모습은 그런 평범함을 상징해요. 감독님께 특별히 부탁해 찍은 장면이에요. <오빠생각> 때 뵌 할아버지는 의족을 마치 양말 신듯 하시더라고요. 의족이 일상이 된 그 모습을 영화에 담고 싶어서 의견을 내기도 했어요.

작품을 하나 끝낼 때마다 세상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져요. 0.1mm씩 깊어진달까. 제가 언제 손 없는 상이군인을 해보겠어요. 작품을 끝내고 나면 취재할 때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곤 해요. 물론 선원 같은 경우는 바다 멀리 나가 있으니 못 보지요(웃음). 만나면 뭔가 인생과 그 인물에게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간 거 같아 혼자 뿌듯해하곤 합니다."

인생 2막

그래서 그는 첫 촬영 혹은 첫 무대 직전 매번 기도한다. "좋은 배우들과 좋은 대본으로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이희준은 "연극을 우연히 만나게 된 나의 스물한 살은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어떤 원대한 꿈은 특별히 없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저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서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고 싶다"며 이희준은 "살 맛 안 나는 요즘 내 작품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 혹은 통쾌함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회봉사라고 생각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결국 내 안의 소리를 듣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갈수록 눈을 흐리게 하는 곁가지들이 많아져요. 소위 말하는 유명세나 돈 때문에 휘둘리지 않으려고요. 또 악역이냐! 이런 말을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저 역시 실수 많이 하는 인간이에요. 그래서인지 완벽한 캐릭터보다는 실수투성이에 뭔가 넘어지고 하는 캐릭터에 공감을 많이 느껴요."

오는 4월 그는 지난해부터 만나온 연인과 결혼한다. 그와 함께 영화 <소중한 여인>에 합류하는 등 작품 활동도 박차를 가한다. "배우로서 상상하고 준비하는 시간이 참 좋다"던 그가 인생의 2막을 이제 막 열기 시작했다.

 영화 <로봇, 소리>에서 신진호 역의 배우 이희준이 1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결혼 소식이 알려지며 본의 아니게 그의 사생활 영역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그럼에도 그는 평소 대중목욕탕을 자주 다니며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소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연기에만 집중하겠다"는 게 그의 평소 생각이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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