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보라의 결혼 장면

선우(고경표 분)-보라(류혜영 분)의 결혼 장면 ⓒ tvN


<응답하라 1988>(아래 <응팔>) 19화·20화에 걸쳐서 선우(고경표 분)-보라(류혜영 분) 커플의 배경으로 깔렸던 음악은 '넥스트'의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다. 이 곡은 넥스트의 멤버였던 김영석과 신해철이 동성동본 커플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만들었고, 1995년 9월에 발매된 <월드(The Return of N.EX.T part 2: World)>앨범에 실려있다.

곡의 배경은 동성동본 커플들이 1995년도 5월에 헌법재판소 위헌심판을 제청했던 시대상과도 맞닿아 있다. 신해철은 1995년 연말 넥스트 콘서트에서, 동성동본 커플을 콘서트장에 초대해서 이러한 말을 남긴다.

"오늘 이 자리에는 귀한 손님이 몇 분 와 계세요. 동성동본 커플로서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는 몇 분들을 초대해서, 지금 오셨거든요. 신문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내년에 동성동본 금혼법 규제를 받는 분들을 한시법으로, 잠깐만 이게 중요해요. '한시법'으로 '구제'를 해준대요.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건 도둑질을 했는데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죄지은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데. 그리고 저는 어릴 때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법은 분명히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배웠어요. 한시법으로 구제하건 말건 그건 그쪽 사정이고 우리는 죄를 지었으니까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떳떳하니까 인정하라는 거예요."

동성동본 금혼법(민법 제809조 1항)은 악법이었다. 과거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시대의 관습을 현대 법률에 무리하게 적용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파괴했다. 그런데도 이 법은 '혼인에 관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했고 그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행복 추구와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했다' 등의 이유로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린 1997년 7월에서야 법적 효력을 잃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선우-보라의 극복할 수 '있는' 위기

 2000년 10월 4일, 국무회의에서 '동성동본금혼법' 폐지를 포함한 민법개정법률안이 의결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2000년 10월 4일, 국무회의에서 '동성동본금혼법' 폐지를 포함한 민법개정법률안이 의결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 MBC


동성동본 금혼법에 대한 1995년도의 헌법 소원, 1996년도의 한시적 혼인 허용, 1997년도의 위헌 결정을 봤을 때, 선우-보라의 커플의 위기와 그 해결은 19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 철저하게 기반을 둔다.

"다른 사람 다 돼도 선우는 절대 안 된다"는 보라 엄마 일화(이일화 분)의 말과 보라의 입으로 "'성선우', 고마워, 사랑해"라는 말이 나오며 선우가 '성'씨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시청자들은 이 커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끝으로 갈수록 덕선(혜리 분)의 남편 찾기가 중심이 되고, 선우-보라의 이야기는 적절한 '양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예상했던 시청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응팔>은 선우-보라의 결혼 과정을 비중 있게 다룬다. <응팔>이 19화까지 선우의 성을 전혀 공개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것은 회차가 진행되면서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설정이기보다는, 처음부터 이 커플에 주어진 설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보라<류혜영 분>이 결혼 승낙을 얻어내는 장면

보라(류혜영 분)이 결혼 승낙을 얻어내는 장면 ⓒ tvN


그렇다면 왜 이 커플의 갈등과 위기는 '동성동본'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일까? 응답하라 시리즈답게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드라마 분위기에 맞게(혹은 메인 커플이 아니므로 분량상) 결혼하는 데 아주 큰 고난을 겪게 할 순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동성동본 커플은 1980년대였으면 결혼 자체가 너무나 힘들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이야깃거리가 되기엔 시시하다. 오로지 '동성동본'은 1990년대에서만 '적절한 수준의' 갈등 구조로서 기능한다.

나아가 '동성동본' 문제의 해결 과정은 1990년대가 이룩한 사회적 진보를 잘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보라가 부모님 앞에서 "내년에 동성동본 결혼 한시적으로 허용한대, 지금 국회에서 법안 준비중이야...(중략)...그 후에 바로 헌재에서 동성동본 금혼에 대한 법률을 효력 중지시킨다는 이야기가 있어 확실하대, 그 법 없어진다고"라고 말하며 단번에 결혼 승낙을 받아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택-덕선 결혼도 1990년대 이전에는 불가능

 열애설이 터진후 덕선(혜리 분)과 택(박보검 분)의 모습

열애설이 터진후 덕선(혜리 분)과 택(박보검 분)의 모습 ⓒ tvN


택-덕선의 역시 1990년대가 아니었으면 결혼 자체가 불가능했을 커플이다. '인척 결혼 금지' 조항인 민법 제809조 2항에선 '6촌 이내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6촌 이내의 혈족, 배우자의 4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인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1990년도 민법 개정까지는 '혈족의 배우자의 혈족'도 인척으로 분류되어서 겹사돈 결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땐 동성동본보다 겹사돈을 더 반대했죠"라는 어른 덕선(이미연 분)의 말은 겹사돈이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던 그 시절을 말해준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나, 사회적으로 '겹사돈'이 인정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다. 1998년도 방영된 MBC 드라마 <보고 또 보고>가 겹사돈 설정으로 큰 화제가 됐던 것만 보더라도 그 당시 겹사돈은 결혼의 큰 장애가 됐음을 짐작게 한다.

심지어 '어남류'를 지지하던 시청자들은 당시 겹사돈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정환(류준열 분)과 이어진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말은 '어남택'이었다. 이로써 <응팔>은 1980년대 자연스럽게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내던 그들이, 1990년대에는 욕망의 주체로 성장하여 일종의 '금기를 깨고' 커플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보다는 '개인'이 중요해지고, 급격한 속도로 시민들이 개인의 자유를 쟁취해나갔던 1990년대의 모습을 두 커플을 통해 볼 수 있다.

동성동본-겹사돈 설정, 1990년대를 위한 헌사

 동네 주민들이 다 떠나고 난 뒤의 쌍문동

동네 주민들이 다 떠나고 난 뒤의 쌍문동 ⓒ tvN


<응팔> 20화 끝 부분엔 쌍문동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결국, 그곳이 재개발 지역이 되고 폐허가 되어 버린 모습도 나온다. 이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1990년대에 대한 회상, 혹은 아쉬움의 표현이다. '공동체'와 '개인'이 공존을 이루며,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성장이 가능했던 그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개인이 없는 1980년대, 공동체가 없는 2000년대 사이에서 오로지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들만이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응팔>은 보여준다.

작은 마을 공동체 안에서 동성동본과 겹사돈으로 커플을 만드는, 약간은 비현실적인 구성을 통해 <응팔> 제작진은 1990년대를 이야기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러한 스토리 구조는 '동성동본'과 '겹사돈' 문제를 극복하면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연애를 할 수 있었던 1990년대, 그리고 그 시절 커플들에 대한 헌사에 가깝다. 보라-선우, 택-덕선은 오직 1990년대에만 가능했던, 015B 노래에서 나오던 '신인류의 사랑'을 한 것이다.

1990년대의 사랑을 돌아보며, 훗날 <응답하라 2016>이 만들어진다면, 이 시대의 사랑은 어떻게 기록될지 생각해 본다. "오포 세대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결혼에 성공한 커플"이 드라마에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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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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