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뮤지컬 <베르테르>

▲ 베르테르와 롯데 뮤지컬 <베르테르>에서 베르테르와 롯데의 찬란했던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둘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다가온다. 조승우의 연기나 노래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고 있는 이지혜 배우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 CJ Musical


"인생은 불확실한 항해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 말처럼, 인생은 자주 항해에 비유된다. 수평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던져진 쪽배처럼, 우리는 종종 목적지를 찾아 방황한다. 그러다 문득, 우리를 끌어당기는 인생의 목표를 찾게 된다. 그런데 그 찾은 목표에서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끌림과 함께 도달하면 내가 부서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면? 끝까지 밀쳐낼 것인가, 아니면 예정된 끝을 위해 다가설 것인가.

그 고민 끝에 결국 부서져 버린 이가 있다. 베르테르. 가질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한 이 남자. '베르테르 증후군'을 낳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주인공. 그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베르테르>가 오는 15일부터 대구를 시작으로 창원·부산·대전 지방 공연에 들어선다. 창작 15주년을 맞아 지난해 11월 10일 개막한 <베르테르>는 지난 10일 서울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자석산의 전설

 뮤지컬 <베르테르>

▲ 미도롯데 뮤지컬 <베르테르>에서 롯데 역을 맡은 배우 전미도가 1막에서 '자석산의 전설'을 노래하며 인형극을 보이고 있다. 자석산에 도달한 왕자가 그 자석산을 탈출할 수 있었을까. 벌써 세 번째 같은 부분만 반복되는 인형극에 발하임의 시민들은 투덜거리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다. 그저 베르테르의 최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 전작 <맨 오브 라만차>에서 조승우와 멋진 '케미'를 보였던 그는, <베르테르>에서도 훌륭한 합을 선보인다. ⓒ CJ Musical


"할머니가 자석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네. 배가 그 산 가까이로 다가가면 쇠붙이란 쇠붙이는 전부 그 산 쪽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지. 그래서 배에 탄 가엾은 사람들은 무너져 내리는 판자 더미에 깔려 비참하게 죽게 된다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본문 제1부 63쪽 중에서

소설에서 잠깐 언급되는 이 이야기는 뮤지컬 <베르테르> 전체를 관통하는 줄기가 된다. 독일의 어느 도시 발하임. 알베르트의 약혼녀 롯데는 사람들 앞에서 자석산 설화를 인형극으로 보여준다. 1막의 두 번째 넘버 '자석산의 전설'을 부르는 와중에, 롯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에 중요한 부분을 고정한 쇠붙이들이 삐걱거리며,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쇠붙이들은 우리 가슴의 심장처럼 쉽게 뜨거워지는 것들이어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정열이라도 되살아나 불처럼 타오르는 줄 알고 요란한 아우성을 질렀습니다."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이 슬픈 이야기를 노래하는 롯데를 보며, 발하임의 풍경을 그리던 베르테르는 한눈에 반하고 만다. 그는 롯데를 본 순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자석산임을. 동시에 그녀가 자신을 무너트릴 것을. 그는 롯데가 이미 알베르트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마음을 접고 발하임을 떠난다.



"그대는 어쩌면 그렇게, 해맑을 수 있는지. 당신의 그 미소만큼씩 내 마음은 납처럼 가라앉는데. 나 그대 이제 이별 고하려는데, 내 입술이 얼음처럼 붙어버리면. 나 그대를 차마 떠나려는데, 내 발길이 붙어서 뗄 수가 없으면." - 뮤지컬 <베르테르> 1막 No.13 '발길을 뗄 수 없으면' 중에서

그러나 자석산의 인력은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롯데를 향한 그리움에 자기도 모르게 다시 발하임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에게 들려온 건 알베르트와 롯데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오, 황홀경이여. 오, 타올라 사라질 세상의 생명들아. 내말에 귀 기울여라. 가령 말하자면, 내가 죽을지라도. 죽어 사라질지라도…. 오직 그대는 나와 단 둘이만이 함께 있어다오." - 뮤지컬 <베르테르> 2막 No.27 '자석산의 전설 Reprise' 중에서

베르테르는 해바라기들 사이로 들어선다. 클롭슈토크 시에서 따온 가사를 읊조리며. 한 손에는 그녀가 선물로 준 책을 포장했던 리본을 쥔다. 그는 그녀 곁에 머물 수 없기에, 멀리 여행을 떠나겠다는 말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해바라기들은 태양이 아니라 땅을 향해 고개 숙이고 있다. 해바라기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눈다. 멀리 노을빛을 바라보는 그의 등 뒤로 해바라기들이 쓰러진다. 그리고 그도 함께 부서진다.

우리도 언젠가 자석산을 마주할 테니

 뮤지컬 <베르테르>

▲ 엄기준의 베르테르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기준은 어떤 역할을 하든지 훌륭하게 소화한다. 이번 공연에서 엄베르의 유일한 단점은 회차가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굳이 창작 20주년을 맞아 알베르트로 돌아올 필요가 있을까. 여러 팬들은 그가 조금 더 베르테르로 남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 CJ Musical


뮤지컬 <베르테르> 속 자석산이 그저 사랑에 빠지는 특정 인물만을 의미할까? 아름다운 여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상이나 신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모든 것들. 아직 그 정체를 명확히 몰라도, 인생에서 쟁취하고 싶은 그 무언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자석산을 반드시 한 번 이상은 마주하게 된다.

발하임을 떠났지만 결국에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베르테르처럼, 그 자석산을 애써 거부하려고 해도 그 인력에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다. 자석산의 전설에서 자석산에 도달한 왕자가 그 자석산을 탈출했다는 뒷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베르테르의 비극은 베르테르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자석산에 기꺼이 달려갔고, 자신을 불러놓고도 무리하게 밀어내려는 자석산 탓에 무너졌을 뿐이다.

베르테르에게 롯데가 자석산이었던 것처럼, 사실 롯데에게도 베르테르가 자석산이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알베르트에게 털어놓고, 그와 함께 할 때면 알베르트 앞에서는 보여준 적이 없는 미소를 짓는 롯데. 그가 말없이 떠났을 때 누구보다 슬퍼했던 건 그녀였다.

 뮤지컬 <베르테르>

▲ 문종원의 알베르트 뮤지컬 <베르테르>에서 알베르트는 베르테르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성을 맹신하고 감성을 무시하는 그이지만, 정작 카인즈의 체포 등 여러 장면에서 그도 어쩔 수 없이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임이 드러난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가 그랬듯이, 법과 원칙을 얘기하지만 그 법과 원칙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아프게 할 줄은 몰랐을 터이다. 문종원 배우에게 알베르트라는 캐릭터는 썩 괜찮은 배역이었다. ⓒ CJ Musical


밝은 옷의 베르테르가 감성을 상징한다면, 어두운 옷의 알베르트는 이성을 상징한다. 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끝내 알베르트 곁에 머무는 롯데는 이성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포기하는 셈이다. 총알을 빼놓은 채 고이 권총을 보관하며, 알베르트는 감성을 이성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얘기한다. 롯데 역시 이성이라는 보관함에 감성이라는 권총을 가둬 놓으려 했다.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정하며 신께 기도할 뿐이었다.

우리가 확고한 꿈이나 목표, 혹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를 발견할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베르테르는 힌트를 준다. 그 인력을 애써 거부하지 않으면 된다. 머뭇거리면 안 된다. 베르테르는 머뭇거렸기 때문에 롯데의 결혼을 막지 못했고, 롯데 역시 머뭇거렸기 때문에 베르테르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

이성, 그리고 그 이성이라는 토대 위에 설계된 결혼이라는 제도와 종교라는 관습 등이 금기라는 선을 그어놓고 그 앞을 가로막는다. 결과적으로 이성을 통해 감정을 부정한 것이, 자석산에 끌렸던 배를 침몰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태도를 바꿔 자석산에 온 몸을 던진 베르테르는, 최후까지 롯데를 사랑했던 사실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뭇거리던 끝에 영원히 베르테르를 잃은 롯데가 평생 후회할 터이다.

설사 그 끝이 부서지는 것이라도, 사랑에 후회가 있을리 없다. 그 자석산이 당신에게 무엇이든, 그저 온 마음 다해 사랑할 것. 그뿐이면 괜찮지 않을까.

뮤지컬 <베르테르>의 포스터 왼쪽부터 뮤지컬 <베르테르>에서 주인공 베르테르 역을 맡은 엄기준, 조승우, 규현의 포스터. 엄기준과 조승우는 수많은 작품에서 '검증'된 배우라면, 규현은 아직까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배우이다. 아이돌 출신 중 뮤지컬에 도전했다가 안정적으로 인정받은 이는 드물다. 그리고 규현은 그 드문 사람 중 한 명이 되어가고 있다. 오는 15일부터 지방 공연에 들어선다.

▲ 뮤지컬 <베르테르>의 포스터 왼쪽부터 뮤지컬 <베르테르>에서 주인공 베르테르 역을 맡은 엄기준, 조승우, 규현의 포스터. 엄기준과 조승우는 수많은 작품에서 '검증'된 배우라면, 규현은 아직까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배우이다. 아이돌 출신 중 뮤지컬에 도전했다가 안정적으로 인정받은 이는 드물다. 그리고 규현은 그 드문 사람 중 한 명이 되어가고 있다. 오는 15일부터 지방 공연에 들어선다. ⓒ CJ Musical



덧붙이는 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펴냄 / 2010.08 / 1만 원)
조승우 엄기준 규현 전미도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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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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