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창작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커튼콜 장면.

▲ 고 김광석을 추억하며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창작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커튼콜이 진행됐다. 본래 두 곡만 하고 끝나던 <그 여름, 동물원>의 커튼콜이지만, 고 김광석의 기일(6일)이 포함된 주이자 작품의 마지막 공연기간인 이번주만 특별히 한 곡 더 관객과 인사하고 있다. <김광석 다시부르기> 무대에도 오른 바 있고, 역시 김광석을 그리는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도 출연한 바 있는 배우 최승열은 이 작품에서 김광석을 맡았다. ⓒ 곽우신


그가 죽은 지 20년 만에 드디어 '볼 만한' 김광석 뮤지컬이 등장했다. 지난달 18일, 1989년 5월에 동물원이 노래를 불렀던 그곳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창작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이 올라왔다. 이 작품은 오는 10일 막을 내린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제작된 김광석 뮤지컬들은 새로운 이야기에 김광석의 음악을 끼얹는 데 그쳤다. 주크박스 뮤지컬의 특성상 이미 만들어진 노래들을 하나의 이야기에 꿰맞추려다 보면 억지스러운 장면이 생기기 십상이다. 지난 2013년, 김광석 탄생 50주년을 맞아 고 김광석의 노래들을 엮어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이 쏟아졌지만 하나같이 완성도는 별로였다. 뮤지컬 <그날들>과 <디셈버 : 끝나지 않은 노래>는 김광석의 노래에 스토리를 억지로 욱여넣다 보니 만듦새가 엉망이었다. 그나마 소극장 작품이었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정도만이 '김광석다움'을 잘 살린 극으로 꼽히지만 성긴 구성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여름, 동물원>도 물론 허술하다. 생뚱맞은 장면도 있고, 캐릭터가 불분명한 인물도 있다. 김광석이라는 인물 전반이 아니라 '동물원의 김광석'으로 한정하다 보니 아쉬움도 크다. 시대에 대해 고민하고, '광야에서'를 부르던 열혈 김광석은 작품에 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김광석을 직접 등장시키며 그 허술함을 억지로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그 여름, 동물원>은 1988년 8월의 어느 연습실, 김광석이 참여한 포크밴드 동물원의 이야기부터 극이 시작한다. 밴드 동물원이 주인공이다 보니 그들이 곡을 쓰고 연습하고 노래하는 과정이 작품의 주가 된다. 그러니 그들이 특정 시점에서 특정 노래를 부르는 데 특별한 인과관계를 설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장 김광석다운 뮤지컬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창작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커튼콜 장면.

▲ '앵콜' 외쳐주세요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창작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커튼콜이 진행 중이다. 김창기를 맡은 배우 임진웅이 관객 반응을 유도하고 있다. 김창기는 실질적으로 이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그 여름, 동물원>은 김창기의 시점에서 고 김광석을 추억하며 시작한다. ⓒ 곽우신


극의 해설자는 동물원의 멤버였던 김창기(배우 임진웅)이다. 그는 현재의 시점에서 김광석이 남긴 물품들을 정리하며 그와 대화를 시작한다. 2016년의 김창기는 1988년으로 돌아가, 그들의 뜨거웠던 여름을 추억한다. 김광석의 이야기와 김광석의 노래를 버무리며 관객을 극으로 끌어들인다.

김창기의 시점에서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작품은 묘사된다. 그들이 노래를 연습하고, 녹음하고, 라디오에 출연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실제 이야기에서 크게 비틀지 않고 담담하게 풀어낸다. 위대한 음악가이자 거인이었던 김광석을 굳이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너무 뜨거워서 서로 델 것 같았던 평범한 청춘에 집중한다. 청년 김광석은, 그때의 누구나 그렇듯이 조금은 오만하고, 위태롭고, 날카로우면서도, 연약했다.

그래서 직장인밴드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동물원 구성원들과 프로뮤지션이 되고자 하는 김광석 사이의 갈등도 튀지 않는다. 음악관에 대한 치열한 사상투쟁이 아니라, 그 또래 친구들끼리 흔히 치고 박는 그럴 법한 싸움으로 다가온다.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창작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커튼콜 장면.

▲ 도레미?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창작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커튼콜에서 배우 유제윤, 김보선, 홍종화가 관객에게 인사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배우들은 직접 라이브 연주를 하며 김광석의 노래를 부른다. 노래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은 크지만, 각 인물별 캐릭터가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 곽우신


작품은 김광석과 동물원이 결별한 뒤 각자의 음악을 하던 시절도 그린다. 프로가 되었지만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김광석. 그 반대편에 반쯤 취미 삼아 '즐겁기 위해' 노래하는 동물원. 서로의 상처가 무뎌질 때쯤, 술자리에서 만난 그들은 언젠가 다시 한 번 뭉쳐서 1988년 여름처럼 노래하기를 소망해본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자리가 남아 있느냐고 중얼거리던 김광석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갑작스러운 자살로 그는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세월은 흐르고, 다시 현재의 김창기가 돌아온다. 고 김광석의 사망 2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뭉친 그들은, 그때의 그 좁고 더러운 연습실에 모여 여름을 노래한다. 그 자리에, 죽은 김광석도 함께하리라 생각하며.

<그 여름, 동물원>은 <그날들>이나 <디셈버>처럼 큰 자본을 들이지 않았다. 화려한 장치로 꾸미거나 프랜차이즈 스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직접 기타와 베이스, 드럼과 건반을 잡은 배우들의 라이브 연주가 극장을 채운다. 진짜 김광석이 부르는 것 같은 울림으로 노래가 되풀이된다. 꾸밈이 없다. 김광석처럼.

김광석처럼,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창작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커튼콜 장면.

▲ 같이 노래합시다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무대에 배우 유제윤과 이서환이 노래하고 있다. 창작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에서 남자 멀티 역을 맡은 이서환은 그의 경륜을 바탕으로 극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천연덕스럽게 이문세를 연기할 때는 자연스레 관객의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 곽우신


동물원이 결성되던 1988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다. 생 일부가 겹칠지언정 김광석이 살아있을 때는 그를 알지 못했다. 1996년 그가 떠났을 때, 그 죽음을 슬퍼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하지만 김광석은 언제 어디에서든 결국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였다. 음악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짧은 생의 군데군데에서 그의 노래를 듣게 됐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등장해 충격을 주더니, 결국 군대에 갈 때는 '이등병의 편지'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물아홉이 된 이제는 노래방에서 '서른즈음에'를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다. 그가 떠난 지 20년, 그를 잘 알지 못함에도 그를 떠올리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거다.

의식하지 않아도 그를 만나게 되는 이유는, 누구나 한때 그와 같은 청춘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청춘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돈을 버는 일과 즐거운 일 중에 선택해야만 한다. 청춘은 욕심보다 모자란 나 자신을 보고 좌절하기도 하고, 설익고 날 선 감정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만들기도 한다. 작품 속 김광석과 동물원이 그랬듯이.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눈부신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소.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소. 누구에게 감사받은 생각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 하오." -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 No.18 '나무 Reprise' 중에서

청춘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마냥 꽤 힘겨운 시기이다. 그래도 작품 속 청춘들은 포기하지 않고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했다. 김광석과 동물원이 엮어나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1988년 서울이라는 시공간에 갇히지 않는다. 배경이 바뀌어도, 언제 어디의 청춘이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모습을 품었다. 청년 김광석으로 대변되는 '청춘의 고민'을 담았기에, 이 작품은 청춘이거나 한때 청춘이었던 모든 관객을 품는다.

그가 동물원과 결별한 것은 단순히 직업이냐 취미냐의 갈등만은 아니었을 테다. 그는 뭐라고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가 닿고 싶어 하는 저 벽 너머를 추구했던 건 아닐까. 동물원이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기 싫었던 그는, 결국 자유로운 영혼이 됐다. 김창기가 그를 추억하며 불렀던 노랫말 그대로.

"넌 이젠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네가 원했었던 무지개를 찾아가. 너에게 줄 수 있던 내 모든 것이 결국 너에게는 부족했던 거야. 부디 네가 원했었던 그 꿈들을 찾길 바래. 너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니까." -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 No.17 '내가 필요한 거야 Reprise' 중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도 비슷하다. 활자든, 음표든, 우리는 동물원에서 '우리'를 뛰어넘고자 하는 동물처럼, 김광석처럼 살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그에게 투영해, 그가 결국 하늘 끝에 닿을 가지를 펼치는 걸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늘(1월 6일)은 그가 떠난 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날이다. 김광석은 그의 나이 스물아홉(1994년)에 '일어나'를 발표하며 희망을 노래했고,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김연미 작가는 본인의 스물아홉 여름에 이 작품을 썼다.

스물아홉의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김광석을 들으며 고민해야겠다.

<그 여름, 동물원> 포스터 지난 2015년 12월 18일 개막하여, 오는 10일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포스터. 소나기가 내리고, 무더운 더위가 괴롭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찬란한 여름. 김광석과 동물원 멤버들의 청춘을 이 뮤지컬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볼 만한' 김광석 뮤지컬을 찾기 위해, 20년이라는 시간이나 필요했다.

▲ <그 여름, 동물원> 포스터 지난 2015년 12월 18일 개막하여, 오는 10일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포스터. 소나기가 내리고, 무더운 더위가 괴롭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찬란한 여름. 김광석과 동물원 멤버들의 청춘을 이 뮤지컬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볼 만한' 김광석 뮤지컬을 찾기 위해, 20년이라는 시간이나 필요했다. ⓒ (주)더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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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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