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에 출연한 조우진.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 상무 역을 맡은 조우진. 섬뜩한 기운을 풍기는 연기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은 이다. 실제로 만난 그는 유한 품성에 느긋한 말투였다. 아직 낯선 얼굴이지만 이래봬도 1999년 연극 <마지막 포옹>으로 데뷔한 배우다. ⓒ 유본컴퍼니


장면 하나. 무심하면서도 귀찮은 듯 말쑥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조폭의 뒤통수를 친다. 그리고 창고로 끌고가 손목 하나를 잘라버린다.

장면 둘. 그 사내는 검찰에 재벌가 비리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넘겨주려던 또 다른 남자를 납치해 감금하고 폭행한다.

이 두 장면의 사내는 모두 영화 <내부자들>에서 재력가 오현수 회장(김홍파 분)을 위해 일하는 조 상무의 모습이다.

과연 그는 악역일까 아닐까. 철저히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이 캐릭터는 조폭과 검사, 정치인, 언론인 등이 칼을 갈고 수를 겨누는 판에서 한발짝 비껴선 조연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다. 그 서늘함의 비밀이 16년 경력의 배우 조우진에게 있었다. 영화가 제대로 흥행세를 타던 지난 3일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대기업 직원이 귀찮은 야근을 하듯

 영화 <내부자들>

영화 <내부자들>의 캐릭터 포스터. 극중 조 상무는 감정 동요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각종 잔혹한 임무를 수행해낸다. 권력자 입장에선 부리기 쉬운 인물. 평범함 속 악함을 품고 조우진이 조 상무를 연기했다. ⓒ 쇼박스

연극 무대와 TV 드라마 조연 등을 주로 맡아왔기에 대중에게는 아직 낯설다. 연기력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으면서도 평범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래서 <내부자들>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제작사와 투자사 쪽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알려진 기성 배우를 쓰길 원했지만, 우민호 감독은 위와 같은 이유로 조우진을 선택했다.

그에게 가장 먼저 인물에 대한 해석을 물었다. 기능적으로 보면 극중에서 이야기의 입체감과 재미를 더하는 이가 조 상무다. 악역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 캐릭터를 조우진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무조건적인 악한이 아닌, 마치 대기업 직원이 귀찮은 야근을 하듯 일을 처리하는 평범한 인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질문을 받으니) 악역에 대한 정의를 처음 생각하게 된다. (배우) 이성민 선배가 한 인터뷰에서 '나쁜 사람이라 악한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에서 악을 찾는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난다. 사람은 자기 나름의 목적을 위해 악할 수도 선할 수도 있다. 그 점을 생각했다."

조 상무를 위해 조우진은 실제 인물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연기하면 어디선가 본 듯한 게 나올 거 같아서"라는 이유였다. 모 대기업 상무로 재직 중인 중학교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의 배려로 일주일 간 상무 직책의 회사원이 어떻게 일처리를 하는지 관찰할 수 있었다. 또한 생계를 위해 공장 일을 할 때 만난 품질보증부 부장을 떠올렸다.

무표정으로 다소 건들거리며 일하는 조 상무의 모습이 그렇게 탄생할 수 있었다. 인터뷰 중 조우진은 벌떡 일어나 그 모습을 직접 연기해 보이기도 했다. 순간 섬뜩했다.

어쩌면 세상을 어둡게 하는 진짜 주체는 영화 전면에 드러난 중심 캐릭터들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조 상무 같은 인물들 아닌까?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말이다(집단 학살 같은 역사적 악행은 인격 장애자나 광신도에 의한 게 아닌 오히려 국가에 순응하고 자신을 평범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벌어졌다는 개념). 오 회장의 지시를 어떤 윤리적 반성이나 머뭇거림 없이 수행한 조 상무의 손에는 화려한 결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역시 한 가장이고, 스스로를 보통사람이라 여겼을 게 분명하다.

"<내부자들> 뿐만 아니라 최근 나오는 여러 영화를 보면서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산업이 더 이상 발전하기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조 상무는 분명 영화에서만 존재해야할 인물이지.

인터뷰에선 처음 고백하는데, 영화 촬영이 끝난 후 내 정서가 한동안 불안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간접경험을 했잖나. 사람의 팔을 자르고, 누군가를 때리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했어야 했다. 지금은 소속사가 생겨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지만, 그때만 해도 혼자 차를 몰고 다녔다. 불안한 마음이 들면 어두운 곳에 차를 세워놓고 한동안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가라앉히고 다시 차를 몰곤 했다."

"영화 촬영이 끝난 후 한동안 정서가 불안했다"

이야기를 과거로 돌렸다. 겸손한 말투에 풍부한 단어를 써가며 답하는 그의 모습에서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백윤식, 이병헌, 조승우, 김홍파, 배성우 등 내로라하는 배우 틈에서 주눅 들지 않았던 것 역시 그간 무대와 여러 매체를 통해 쌓은 경험 덕이었을 것이다. "그게 무대에서 배운 것들"이라며 그 역시 인정했다.

"(연극할 때) 상대의 기를 죽이지 말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연습부터 하라고 배웠다. 바꿔 말하면 서로 같이 호흡하라는 말이잖나. 스타 배우, 대 배우와 함께 한다고 긴장해야 한다거나 혹은 긴장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둘 다 어폐가 있다. 현장엔 커다란 눈이 하나 더 있지 않나. 바로 카메라다. 그 안에서 함께 하는 분들에게 적어도 내가 누가 안 되길 원했다. 무대에서 배운 호흡을 바탕으로 한번 따라보자는 마음이었다."

 영화 <내부자들>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정치 깡패 안상구(이병헌 분)의 뒤로 돌덩이를 든 채 조용히 다가가는 조 상무(조우진 분)의 모습이 보인다. ⓒ 쇼박스

애써 어려운 시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소위 'IMF 학번(97학번)'으로 다니던 대학을 중퇴했던 사실을 알았기에 집요하게 물었다. "현실을 너무 냉정하게 본 탓에 연기만 고집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여러 일을 했을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껏 그가 쌓아온 20여 편의 드라마와 영화들은 직접 자신의 프로필을 제작사와 방송국에 돌리며 관계자들의 마음을 얻은 결과물들이었다.

"돈 받을 수 있는 공연을 하려 했고, 돈이 떨어지면 다른 일을 했다. 지금도 대학로에서 그리 생활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근데 내 경우엔 일과 연기를 병행하는 게 잘 안되더라. 멀티형 인간이 아닌 거지(웃음). 그래서 공연할 땐 공연에 집중했고, 돈을 벌 땐 그 일에 집중했다.

아! 프로필 돌릴 때 기발한 방법이 있다. 2007년인가? 내 얼굴이 인쇄된 스티커를 음료수에 붙여서 함께 드리기 시작했다. 다들 신기해하셨는데 나중에 보니 스타 팬클럽에서 이걸 하더라. 나름 내가 원조다(웃음). 또 한 번은 우연히 광고 에이전시 사무실 앞에서 만난 아는 형이 엄청 좋아보이는 차를 세워놓기에 그걸 빌려서 미팅을 나갔다. 날 거들떠도 안 보던 사무실의 대표님이 직접 나오시더라.

16년 동안 연기를 해오며 물론 주변에서 연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묻기도 한다. 사실 가족들이 가장 많이 묻는다(웃음). 근데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포기라는 개념이 뭔지도 모르겠고, 성공이 뭔지도 모르겠다. 많은 관객을 만나는 업종이니 나 역시 나름의 이상은 있지. 개인적으로는 꾸준히 더 좋은 작품, 더 다양한 역할을 하고 싶다."

다양한 역할이 곧 그에겐 소중한 간접경험이었다. 궁극적으로 조우진은 "이 세상이 과연 어떤 곳이고, 거기서 사는 난 어떤 모습인지 알아가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남긴 말이 뇌리를 때렸다. "이렇게 여러 언론과 인터뷰하게 된 것도 뜻밖의 기회"라며 그는 "한 번도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아닌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래서 좀 짠하다"고 말했다.

그 짠함을 누릴 자격이 분명 그에게 충분히 있다.

 영화 <내부자들>에 출연한 배우 조우진.

조우진의 본명은 조신제다. 우연히 알게된 한 철학자가 생년월일을 묻더니 지금의 이름을 써보라고 제안했다. "그 이후 <내부자들>에 출연하게 됐네요"라며 그가 웃어 보였다. 인터뷰 중 원고지 형 메모장에 기자의 질문을 적어가며 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가 머리가 안 좋아서"라고 설명했지만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신선한 자극이었다. ⓒ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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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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