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검은사제들>에서 '영신'역을 맡아 신들린 연기를 펼친 배우 박소담.

박소담은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악령이 들린 소녀 '영신'역을 맡았다. 라틴어와 중국어 등의 외국어 대사는 물론이고, 혼란에 빠진 모습을 표현해야 하는 등 난도가 높은 연기를 보여야 했다. 자칫 현장에서 우울해질 수도 있었지만 특유의 밝은 성격과 동료들의 배려로 잘 이겨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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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년 차에 시련을 맞았다. 연기가 그렇게 재밌어서 대학생활 내내 15편의 단편·독립영화를 찍었고, 4편의 연극 무대에 오르는 등 '먹성 좋은 신인'이었던 박소담이 상업 영화 데뷔를 앞에 두고 높은 벽을 경험했다.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데뷔작인 단편 <더도 말고 덜도 말고>(2013) 이후 그가 출연해온 상업 영화 <베테랑>과 <사도> 등을 들며, 자연스럽게 폭을 넓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게다가 올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이하 <경성학교>)와 <검은 사제들>로 비중을 확 늘리지 않았나. 30일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옥에서 만난 박소담이 고백했다.

"(상업영화 출연을 앞뒀던) 그때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지쳐있었던 순간이었어요."

수 없는 오디션의 반복

 <영화 검은사제들>에서 '영신'역을 맡아 신들린 연기를 펼친 배우 박소담.

누구보다 배움에 대한 자세가 열려있다. 이제 갓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이라서? 그보다는 초심을 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을듯 싶다. 부쩍 바빠진 요즘 일정에 지칠 때마다 박소담은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때 배웠던 여러 수업을 돌이켜본다고 한다. 왜 연기를 하고 싶어했고, 어떤 순간에 즐거웠는지 다시 한 번 기억하기 위해서. ⓒ 이희훈


우선 그를 주목받는 신인으로 올려놓은 두 작품을 보자. 영화 <경성학교>의 오디션을 봤던 지난해 5월 한 달 동안만 19개 작품의 오디션을 치러야 했다. 박소담은 "처음으로 연기가 힘들다고 느꼈던 때"라고 말했다. 극 중 신비로운 느낌의 소녀 연덕 역을 맡았지만, 오디션 당시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사지를 뒤트는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러다 연덕 역으로 비중이 높아졌다. 박소담을 발탁한 이유에 대해 이해영 감독은 "다들 격한 장면이기에 감정을 크게만 연기했는데 소담이만 달랐다, 자기만의 감정과 호흡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검은 사제들>은 2000대 1의 경쟁률을 이겨내야 했다. 악령 들린 소녀로 알 수 없는 언어들과 사자후를 내뱉는 등 극한으로 자기를 몰아가는 연기가 필요했다. "평생 그렇게 에너지를 내본 적이 없는데..."라고 그가 읖조렸다.

"그동안 지치지 않고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연기를 계속 해나갈 수 있을지 처음으로 의심이 들었던 때였어요. 자존감이 아주 낮아져 있었죠. 두 작품의 오디션을 볼 때도 내가 붙을 수나 있을까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믿음을 주셨어요. 근데 막상 붙고 나니 부담이 커지더라고요."

짧은 오디션 직후 온 몸이 땀으로 젖은 모습이 깊이 각인됐던 걸까. 박소담이 촬영에 합류한 이후 현장 스태프들이 그에게 다가가 "오디션 때 연기 좋았다"며 한 마디씩 건넸다고 한다.

믿음이었다. 아무 것도 증명한 게 없는 신인을 기용하는 건 감독 입장에선 모험이다. 동시에 그 수가 먹혔을 때 짜릿함이란! 박소담은 "바로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고 당시 기억들을 전했다.

"<경성학교> 촬영 초반엔 어떻게든 잘해보려는 생각에 갇혀서 제 캐릭터에만 빠져 있었어요. 현장을 즐기지 못했죠. 시간이 지나서 스태프 분들이 오히려 다가와주셨고, 현장을 편하게 받아들여야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검은 사제들>을 통해서도 함께 영화를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어요. 김윤석, 강동원 선배를 만난 것도 제겐 큰 행운이었고요."

삭발

 <영화 검은사제들>에서 '영신'역을 맡아 신들린 연기를 펼친 배우 박소담.

드럼 연주, 기타 연주, 스노우 보드 타기. 박소담이 스무살을 넘기며 배우고 싶었던 것들이다. 학창시절 보컬로 밴드 활동을 잠시 했던 그는 "여자가 드럼치는 모습이 정말 멋있는 거 같다"며 한껏 들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이희훈


앞서 말한 '즐거움'은 박소담이 품고 있는 인생 화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출신인 그는 동기인 김고은 등이 학교수업과 연예활동을 병행할 때 학교생활에만 몰두했다. "선후배들과 무대 연기를 하고 단편을 찍다보니 어느새 휴학도 안 하고 졸업을 혼자 일찍 하게 됐다"며 "이젠 그 연기가 즐거우면서도 쉽지만은 않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예가 <검은 사제들>이었다. 배우로서 필요하다면, 역할이 그러하다면, 삭발은 충분히 할 수 있었으나, '자연인 박소담'으로서는 분명 어려운 결정이었다. "촬영을 다 끝낸 뒤 영신(극 중 이름)이에서 박소담으로 돌아와 머리를 길러가며, 과연 뭔가를 보여줄 상태가 될 수 있을지 생각이 많았다"며 그는 "같은 여자로서의 생각을 구하기 위해 엄마에게 물어보게 됐다"고 전했다.

"'머리는 자라니까 또 기르면 되지. 역할에 맞는 거고 우울해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잘라도 괜찮을 거야'라고 좋게 얘기해주셨어요. 제가 왜 머리를 밀어야 했는지 엄마는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셨지만, 그 말에 마음이 좋아졌어요. 제 성격상 마냥 우울해할 거 같지도 않았고요."

애초부터 배우를 꿈꿨던 건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땐 그의 민첩함을 본 한 교사가 육상을 권유했고, 재미로 몇 달 연습한 뒤 나간 송파구 대회에서 덜컥 2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록밴드에 합류해 보컬로 활동하기도 했다. 수학여행 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곧잘 하던 모습을 본 친구가 스카우트한 것이다. 또한 수학에도 남다른 흥미가 있었다. 서너 시간을 책상에 앉아 문제 풀이에 빠져있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박소담은 "정답이 딱 하나로 떨어지는 게 좋아서요"라고 명쾌하게 말했다.

어? 정답이 딱 떨어지는 게 좋아서? 그럼 배우는?

"그러게요. 이젠 정답이 정확히 떨어지지 않는 연기를 하고 있네요(웃음). 그땐 어떤 진로를 정했던 게 아니라 이것저것 좋아하던 걸 하는 수준이었어요. 그러다 고1 때 학교에서 뮤지컬 <그리스> 단체 관람을 보냈고, 그걸 보고 막연하게 연기하고 싶다 생각하게 됐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기분이 좋더라고요. 무대 위 배우들처럼 땀 흘리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다면 즐겁게 살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이건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즐겁지 않으면 못 할 일이죠."

즐겁지 않으면 못 할 일

 <영화 검은사제들>에서 '영신'역을 맡아 신들린 연기를 펼친 배우 박소담.

이과생 집안의 유일한 연기자. 박소담 스스로도 자신이 신기하다. 국어나 영어보단 수학과 과학에 흥미가 있었던 그다. 그러다 택한 배우의 길. "제가 얼마나 고집을 부렸는데요. 뭐라도 하고 있다는 걸 부모님에게 보여드리곤 했죠." 그 말처럼 박소담은 관객들에게 조금씩 자신을 증명하는 중이다. ⓒ 이희훈


 <영화 검은사제들>에서 '영신'역을 맡아 신들린 연기를 펼친 배우 박소담.

기본적으로 승부욕 또한 강하다. 육상 선수로 활동할 때 구력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기 싫어서 연습을 반복했던 때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주종목은 멀리뛰기. "남자 동기들과 섞여서 시합을 해도 1, 2등을 할 정도"라며 박소담이 씨익 웃어보였다. ⓒ 이희훈


엄한 성격인 아빠는 강하게 반대했다. 만약 박소담이 이때 포기를 했으면 한국 영화계는 소중한 인재 하나를 잃을 뻔했다. 아빠 몰래 연기 학원비를 대준 엄마의 든든한 지원으로 배우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참고로 박소담을 제외한 남동생과 여동생은 모두 이과생이다. "우리 집에서는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냐며 참 신기해한다"며 그가 웃어 보였다.

"물론 진로를 정해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부모님 입장에선 당연히 걱정하셨겠죠. 안정적인 일도 아니니까요. 열심히 하면 그 대가가 주어지겠지만, 이 일이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잘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엄마 아빠는 제가 연기하면서 즐거워하는 게 좋아보였다고 하시더라고요.

여자들끼리 밤새고, 집에 늦게 들어오고, 피곤할만한데 애가 항상 행복해 보이니까 그 부분은 마음에 들었다고 하셨어요. 엄청난 고집을 부리며 택한 건데 중간에 포기할 생각이 없었죠. 저 역시 끊임없이 부모님에게 제 연극이든 단편 영화든 보여드렸어요. 딸이 놀고 있는 게 아니라 뭐라도 하고 있다면서요."

다시 연극 무대로

상업 영화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한 그는 앞으로 개봉할 두 작품을 남기고 있다. 김희정 감독의 <설행 눈길을 걷다>와 임상수 감독의 단편 <뱀파이어는 우리 옆집에 산다>이다. 전자는 전주영화제 삼인삼색 프로젝트 선정작으로 이미 사할린 국제영화제, 인도 국제영화제 진출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후자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컬러 오브 아시아-마스터즈>라는 제목의 옴니버스 영화에 포함돼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참, 차기작으로 박소담은 다시 무대를 택했다. 뱀파이어 소녀와 외톨이 소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연극 <렛미인>에 출연하기로 한 것. 이미 동명의 원작 영화가 한국에서 재개봉했으며, 두터운 마니아 층을 자랑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역시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 배역을 따냈다. 연극 출연 소식에 박소담은 "연기를 시작한 것도 연극 무대였고, 마침 오디션 공고가 떠서 지원을 했다"며 "떨어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오디션이 재밌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힘들 때 혼자 있으려는 사람도 있지만, 전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를 만나거나 전혀 다른 분야의 친구를 만나 힘을 얻어요. 연극이나 뮤지컬로 충전하기도 하고요. 최대한 많이 보려고 해요. 배우들이 매순간 진심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고, 공연이 끝난 뒤 커튼콜에 나오는 관객들에게 감사해하는 그 느낌이 제게 좋게 다가와요."

이 말과 함께 그는 눈빛을 반짝였다. 초심을 각인하는 순간이다.

 <영화 검은사제들>에서 '영신'역을 맡아 신들린 연기를 펼친 배우 박소담.

영화계에선 이미 박소담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목하는 중이다. 자칫 들뜨기 쉽지만 박소담은 의연했다. "흔들릴 때마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하나씩 곱씹고, 많은 공연을 보면서 영감을 얻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보일 새로운 모습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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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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