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티모시 그린의 이상한 삶>의 한 장면.

영화 <티모시 그린의 이상한 삶>의 한 장면. ⓒ Scott Sanders Productions


내가 두 손을 드는 바람에 나는 내 뜻을 못 이룹니다. 네가 두 손을 들면 너는 네 뜻을 못 이루지요. 그리고 내가 두 손을 들지 않으면, 나 스스로 그만두지 않으면, 내가 기꺼이 씩씩하게 나아가려 하면, 나는 늘 내 뜻을 아름답게 이룹니다. 네가 두 손을 안 들 수 있으면, 네가 스스로 그만두려 하지 않으면, 네가 기꺼이 튼튼하고 의젓하게 거듭나려 하면, 너는 언제나 네 뜻을 사랑스레 이루고요.

사랑을 받으며 태어나는 아이는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아이는 사랑을 베풀면서 꿈을 키웁니다. 사랑을 못 받으며 태어나는 아이는 사랑을 못 받으며 살밖에 없는데, 사랑을 못 받으며 살던 아이는 앞으로 어른이 되는 동안 사랑을 베풀거나 꿈을 키울 수 있을까요?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웃한테 사랑을 베풀지 못하거나 스스로 꿈을 못 키우지 않을까요?

오늘날 이 지구별을 가만히 돌아보면, 이웃한테 사랑을 못 베풀거나 안 베푸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 둘레에서도, 또 정치나 사회나 경제에서도, 따스한 사랑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구나 싶은 사람이 으레 나타납니다. 이들은 '잘못된 생각을 품은 나쁜 사람'일까요, 아니면 '여태 사랑을 받은 적이 없던 탓에 이웃사랑의 마음을 못 키운 사람'일까요?

흙에서 태어난 아이 티모시(C.J. 애덤스 분)가 있습니다. 그는 몸으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두 남녀가 마음으로 낳은 숨결입니다. 그린 부부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병원 진단을 받지만 꿈을 접지 않습니다. 쪽지에다가 두 사람 꿈을 하나씩 적어요. 맨 먼저 '사랑'을 그립니다. 사랑을 받으면서 태어날 아이가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이밖에 숱한 꿈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축구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는다는 꿈까지 그립니다. 그리고 그 꿈을 연필상자에 담아서 앞마당에 묻지요.

영화 <티모시 그린의 이상한 삶>(The Odd Life of Timothy Green)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수께끼 같은 '티모시 그린'을 보여주고, 알쏭달쏭한 아이 '티모시 그린'하고 함께한 나날을 보여주며, 삶은 오직 사랑으로만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오직 사랑으로 꿈을 심기에 아이가 태어날 수 있고, 두 어버이가 언제나 사랑으로 꿈을 북돋우려 하기에 아이가 자랄 수 있어요.

스무 살이 지나서, 또 혼인잔치를 한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영화는 날마다 꿈을 꾸며 사랑을 빚을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어른임을 말합니다. 나무가 햇볕을 바라듯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햇볕을 쬐어요. 나무가 가지를 뻗어 그늘을 베풀듯이 내 곁에 있는 이웃한테 싱그럽고 시원한 그늘을 나누어 주어요. 나무가 온 가지에 꽃을 곱게 피워 향긋한 내음을 나누어 주듯이,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모두한테 베풀듯이 함께 사랑이랑 꿈을 서로 나누어 보아요.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는 우리 가슴에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어서 꿈이라는 열매를 맺어요. 이웃하고 어개동무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하루라면, 이 노래는 머잖아 웃음꽃으로 피어나서 바람에 살짝 실려 온 누리를 따스하게 어루만져 줍니다.

<쉘 위 댄스>(Shall We Dance?, 1996)

 영화 <쉘 위 댄스>의 한 장면.

영화 <쉘 위 댄스>의 한 장면. ⓒ 앨터미러 픽쳐스


"우리 춤출까요?" 이 한 마디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말을 마흔 살이 넘도록 한 번도 못 들었습니다. 댄스홀이나 그 비슷한 곳을 간 적이 없으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한국 사회는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어울리면서 신나게 춤추며 노래하는 놀이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어요. 집이나 마을이나 학교나 일터에서 서로 허물없이 재미나게 춤을 추며 노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해요. 나랑 춤추자고 말하는 동무도 없지만, 나도 동무한테 함께 춤추자고 선뜻 말하지 못했어요. '춤'을 달나라 이야기라도 되는 듯 여겼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우리 민족은 예부터 들일을 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두레와 품앗이로 언제나 함께 일하고 함께 춤추며 놀았다고 해요. 다만,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이러한 삶을 구경하거나 겪은 적이 없습니다. 요즈음에도 이러한 삶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그저 메마르기만 한 터라, 어깨춤을 추면서 일하자는 노랫소리가 흐르지 못합니다. 먹고살기 바쁜 나머지 일만 하고 돈 버는 굴레에 갇힙니다.

"우리 춤출까요?"는 왜 아름다운 말이 될 수 있을까요? 서로 마음을 열고 즐겁게 춤을 추는 동안 찬찬히 피어나는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비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듯이, 새가 하늘을 가르며 춤추는 몸짓으로 날듯이, 사람도 이 땅에서 고운 몸놀림으로 바람결을 어루만질 적에 춤이 이루어집니다. 연예인이나 전문 춤꾼이 선보이는 몸짓이 아닌, 그저 스스로 우러나오는 춤사위일 때에 즐거운데, 이 대목을 알려주는 어른이 몹시 드뭅니다.

영화 <쉘 위 댄스>엔 삶을 새롭게 가꾸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르는 회사원이 나옵니다. 어떻게 해야 삶을 스스로 새롭게 가꿀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는 여느 회사원이 나옵니다. 이녁은 즐거움이나 재미나 기쁨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일하는 보람이나 집을 장만하는 보람 한 가지만 있다고 할 만합니다. 아마 어릴 적부터 학교를 다니는 동안 더 나은 성적을 얻고 더 높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길만 걸었을 테지요. 삶을 차분히 돌아보며 사람다운 넋을 곱게 북돋우는 길은 배운 적도 본 적도 느낀 적도 드물었겠지요.

이 회사원 아저씨는 춤바람이 납니다. 춤에 미쳐서 다른 일을 젖히는 바보짓이 아닙니다. 춤추며 마음속에 그동안 맺힌 응어리가 천천히 풀립니다. 춤을 추는 바람을 스스로 일으키면서 새로운 몸이 되고, 새로운 마음이 되며, 새로운 꿈을 키웁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혼자서 춤을 출 뿐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하고 함께 춤을 추자는 생각을 미처 못 해요. 게다가 이녁 딸하고 함께 춤을 출 생각조차 조금도 못 하지요. 춤사위가 베푸는 기쁨을 누리면서도 정작 춤을 가르치는 학원에서만 춤을 출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지요. 이때에 딸은 아버지를 북돋웁니다. 딸아이는 춤을 추는 아버지가 멋있다고 여길 뿐 아니라, 어머니하고 함께 춤을 추기를 바랍니다. 아이 어머니도 곁님더러 '왜 나하고는 춤을 추자고 하지 않았느냐?'고 뒤늦게 묻습니다. 진작 '학원에서 배운 춤을 나한테도 가르쳐 주어서 함께 추어요!' 하고 먼저 말했어야지요.

함께 나누기에 기쁨입니다. 혼자만 누리기에 즐거움입니다. 춤은 즐거움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혼자 일하며 춤을 출 적에는 즐거움일 테고, 여럿이 함께 일하며 춤을 출 적에는 기쁨입니다. 삶과 살림을 짓는 춤사위는 기쁜 사랑으로 흐릅니다. 기쁜 사랑이 흐르는 곳에서 마을에서의 삶이 곱게 깨어납니다. 기쁜 몸짓이 넘치는 곳에서 살림살이를 아름답게 북돋웁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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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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