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라니스 모리셋 Jagged Little Pill 20주년 기념반 표지 ⓒ 워너뮤직코리아
1995년 전 세계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음반 한 장이 발매 20주년을 맞아 최근 새롭게 공개됐다(미국 기준 10월 30일, 국내 11월 발매). 여성 록커 앨라니스 모리셋의 메이저 데뷔작이자 정규 3집 <재그드 리틀 필(Jagged Little Pill)>은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무려 1600만 장 이상, 세계 3300만 장 이상이 팔린 메가 히트 앨범이었다.
새롭게 리마스터링 된 1디스크 버전, 미공개 데모곡을 담은 2디스크 버전, 2005년 뒤늦게 공개된 <재그드 리틀 필 어쿠스틱(Jagged Little Pill Acoustic)>, 그리고 1995년 영국 런던 공연 실황 등 총 4장의 디스크로 제작된 디럭스 버전 등 다채로운 구성은 여타 명반들의 재발매에 견주어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 음반이 등장했던 1995년은 록 음악계, 특히 그 무렵 주류를 이뤘던 얼터너티브 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던 해이다. 너바나의 <네버마인드(Nevermind)>, 펄 잼의 <텐(Ten)>, 앨리스 인 체인스의 <더트(Dirt)> 등 걸작 음반들이 쏟아지면서 기존 헤비메탈로 대변되던 록 음악은 1990년대 이후 미국 시애틀을 중심으로 언더그라운드 위주로 저변을 넓히던 얼터너티브 록/모던 록이 지배하는 시대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1994년 갑작스런 커트 코베인(너바나)의 사망 이후 짧은 시간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얼터너티브 록은 점차 또 다른 후발 주자들에게 인기의 왕관을 내놓게 되었다. 스톤 템플 파일럿츠, 부쉬 등 새로운 감각의 밴드들이 그 틈을 비집고 음악계의 신흥 강자로 등장했고, 포스트 펑크 사운드의 그린 데이, 오프스프링 등의 밴드 역시 만만찮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변화와 혼돈의 시기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던 작품이 바로 <Jagged Little Pill> 였다. 앨라니스 모리셋의 <재그드 리틀 필(Jagged Little Pill)>는 여러 면에서 기존 록 음반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기존 주류 음악계의 치밀한 기획력 성공... 새로운 여성 록커 탄생
▲ 앨라니스 모리셋 Jagged Little Pill 오리지널 버전 표지 ⓒ 워너뮤직코리아
예나 지금이나 여성 뮤지션은 록 음악계에선 그냥 변방의 주변인에 지나지 않았다. 고(故) 재니스 조플린, 윌슨 자매가 이끌던 하트, 제퍼슨 에어플레인/제퍼슨 스타쉽/스타쉽을 거친 그레이스 슬릭 같은 걸출한 여성 록커가 없진 않았지만, 여전히 록 음악은 남성들의 몫이었다.
이런 한계점을 앨라니스 모리셋은 이 앨범 한 장의 성공으로 가볍게 뛰어넘는데 성공했고, 후일 다양한 스타일의 국내외 여성 록 보컬리스트들의 등장에 발판이 됐다. 그런 점에서 모리셋의 등장은 단순히 충격 차원을 넘어선 대사건이었다. 모국 캐나다에서 2장의 댄스-팝 음반을 내놓았던 아이돌 성향의 가수가 홀홀 단신 미국으로 건너와 고생하며 일궈낸 성공담을 바탕에 둔, 1990년대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팝 음반으로 기록되기까지의 과정은 한편의 영화와도 같았으니까 말이다.
<재그드 리틀 필(Jagged Little Pill)>은 여러 면에서 그 무렵 인기 록(얼터너티브/모던 록) 음반들과는 음악적인 면에선 유사하지만 제작/기획 방식에선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여성 뮤지션의 놀라운 작업물이면서 아이돌-댄스 음악으로 데뷔했던 가수의 파격 변신 외에도 기존 주류 음악계의 치밀한 기획력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수록된 모든 곡을 모리셋과 함께 작곡한, 이제는 팝/록 음악계의 거물급 프로듀서가 된 글렌 발라드만 해도 1980년대 마이클 잭슨, 포인터 시스터스, 폴라 압둘, 윌슨 필립스, 패티 오스틴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팝/댄스/R&B등 록 음악과는 거리가 먼 작업물을 내놓았던 인물이다. 게다가 작곡가로서 이름을 알린 첫 성공작은 마이클 잭슨의 No.1 히트곡 "맨 인 더 미러(Man In The Mirror)"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그드 리틀 필(Jagged Little Pill)>은 그 무렵 얼터너티브 록/모던 록 음악의 장점을 잘 살리면서 명곡 '유 어더나 노우(You Oughta Know)', '아이러닉(Ironic)', '핸드 인 마이 포켓(Hand In My Pocket)' 등으로 대표되는 그녀 특유의 목소리 꼬는듯한 창법을 접목시켜 음악팬들의 귀를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더군다나 얼터너티브 록과는 거리가 먼, 일반 팝/록 음악 작업으로 경력을 쌓아왔고 국내 가요 녹음에도 수차례 참여했던 세션 기타리스트 마이클 랜듀, 마이클 톰슨과 모던/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인 플리(레드 핫 칠리 페퍼스), 데이브 나바로(제인스 어딕션)의 연주를 한 음반에 담아낸다는 건 사실 쉽게 생각할만한 기획은 아니었다.
이 음반을 처음 발매했던 레이블이 팝스타 마돈나가 설립한 매버릭이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댄스-팝 성향의 마돈나와는 음악적으론 관련이 없어 보이는 얼터너티브 록 음반이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리라곤 회사 창업주 마돈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심지어 매버릭의 창업 첫 발매/히트 음반 역시 얼터너티브 록 밴드 캔들박스의 데뷔 앨범이었다).
이듬해 열린 38회 그래미 어워드 4관왕 수상, 2003년 미국 롤링스톤 매거진이 뽑은 최고의 음반 500장(The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 중 327위 선정 등 비평가들의 연이은 극찬은 결코 <재그드 리틀 필(Jagged Little Pill)>에 대한 과분한 대접이 아니었다.
기대 이상의 대성공, 하지만 뮤지션에겐 큰 짐이렇듯 상업적/음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앨라니스 모리셋의 미래 역시 장밋빛이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워낙 큰 성공은 그녀에게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3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공개한 정규 4집 <서포우즈드 포머 인퓨테이션 정키(Supposed Former Infatuation Junkie)>(1998년)은 나름 괜찮은 작품이었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전작과의 비교를 통해 아쉬움을 피력했다.
결국 모리셋은 또 한차례 휴식 후 2002년이 되서야 5집 <언더 러그 스웹(Under Rug Swept)>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 뒤론 2004년 이후 사실상 4년 주기로 정규 음반을 내놓는 상황이라 지난 2012년 <헤이복 앤 브라이트 라이츠(Havoc and Bright Lights)>를 잇는 새 음반은 내년 정도는 돼야 선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여전히 해외 음반 시장에선 록 음악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장르지만 R&B/힙합, 그리고 여기에 영향 받은 다양한 팝 음악들의 득세에 밀려 예전 같은 힘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 음반의 20주년 재발매는 한동안 대중들이 잊고 있었던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향수를 되살려주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냥 기억 저편으로 흘려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음반이 바로 <재그드 리틀 필(Jagged Little Pill)>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