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이터널선샤인이 10년 만에 재개봉했다. 원작의 팬들은 잊힌 기억을 되찾은 듯 다시 극장을 찾고 있다.

이터널선샤인이 10년 만에 재개봉했다. 원작의 팬들은 잊힌 기억을 되찾은 듯 다시 극장을 찾고 있다. ⓒ 노바미디어

향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향이 달라진다. 먼저 향수를 뿌리고 가장 먼저 맡을 수 있는 향기를 '톱 노트'라고 한다. 알코올이 날아가기 전까지 10~15분가량 강렬한 향기를 뿜어낸다. 이후 2~3시간까지 안정된 향기가 나게 되는데 '미들 노트'라고 부르며 향수를 살 때 가장 일반적인 기준이 되는 구간이다.

마지막으로 미들 노트 이후 향이 완전히 소멸하기까지의 기간을 '베이스 노트'라고 한다. 향이 오래 지속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베이스 노트의 향기를 기준으로 향수를 선택한다.

연인 관계에서 감정이라는 것은 '향수'와 같다. 톱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에 해당하는 감정들이 완연하게 다른 향을 풍기면서도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감정에서 기원한다. 향이 변한다고 실망할 일이 아니며, 변화할 때마다 거기에 맞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감정은 기억보다 진하고 오래가며 여운이 길다.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이 완전히 지워진다면'이라는 불가능한 상상을 매개로, 기억이 사라져도 끝내 사라지지 않고 맴도는 연인의 향기를 음미하는 영화다.

클레멘타인의 머리카락 색

 계속 떠들어야만 마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때는 떠들어야 한다. <이터널선샤인> 스틸컷

계속 떠들어야만 마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때는 떠들어야 한다. <이터널선샤인> 스틸컷 ⓒ 노바미디어


영화는 연인관계인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하면서 시작한다. 먼저 클레멘타인은 '라쿠나' 라는 정체불명의 회사의 도움을 받아 조엘과 관련된 기억을 지운다. 클레멘타인이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명확하다.

조엘은 쓸데없이 착할 뿐 말도 별로 없고 지루한 삶을 사는 남자다. 1분 1초라도 더 잘 살고 싶어서 조바심을 내는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숨 막히는 지루함 그 자체보다, 그의 지루함에 맞춰 사느라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자력으로는 조엘을 잊을 수 없다. 그만큼 사랑한다. 결국, 라쿠나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이 사실은 조엘에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충격이다. 두 사람이 쌓아올린 추억은 여전히 조엘의 머릿속에 있다. 그러나 그 추억에는 이제 '클레멘타인은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는 사실까지 덧대어진다. 두 사람의 공유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연인의 추억'을 한쪽이 완전히 망각해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잔인한 일이다. 만남과 이별을 떠나서 추억의 뿌리가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조엘은 추억을 홀로 간직할 수도 없다. 두 사람이 만든 추억과 감정은 실존하는 것 같지만, 그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 폐허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엘 역시 망각을 자처한다.

이제 기억을 잃은 두 사람의 인연을 상징하는 것은 클레멘타인의 머리카락 색이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은 현실과 기억,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복잡하게 오가는 영화의 시공간을 구분하는 표지다. 두 사람의 관계가 위태롭게나마 이어지던 시절, 그러니까 조엘의 기억 속 시공간에 등장하는 클레멘타인의 머리카락 색은 오렌지색(tangerine)이다(처음 만났을 때는 녹색이었다). 그 시절의 조엘은 애정을 담뿍 담아 클레멘타인을 탠저린(Tangerine)이라고 불렀다.

반면 기억을 지운 후 현실 세계의 클레멘타인의 머리 색깔은 블루 루인(Blue ruin, 완전한 파멸) 빛깔의 머리카락 색을 하고 있다. 그들의 기억이 완전한 파멸을 맞이했고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클레멘타인의 머리카락 색은 어딘지 어설프다. 염색하고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것처럼 중간중간 색이 벗겨져서, 녹색도 오렌지색도 블루루인 색도 아닌 어린 시절의 금발 머리가 드러나 있다. 마치 영원한 파멸의 폐허 사이에 노랗게 핀 이름 없는 꽃처럼.

기억은 지우되 감정은 지우지 못한다

 완전한 파멸(Blue ruin) 후에도 두 사람의 감정은 뜨겁게 남아있다.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완전한 파멸(Blue ruin) 후에도 두 사람의 감정은 뜨겁게 남아있다.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 노바미디어


사실 라쿠나 사의 '기억 제거 서비스'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영화는 기억 제거 서비스의 결함을 직간접적으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우선 조엘이 라쿠나 사를 처음 찾아가던 장면이다. 라쿠나 사의 상담직원인 매리(커스틴 던스트)는 상담 전화를 받으며 "죄송한데, 한 달에 세 번은 못 한다"고 말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경우에 비추어 봤을 때 기억을 지운 사람은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과 라쿠나 사의 존재조차 망각한다. 그런데 상담 전화를 건 이는 한 달에 세 번이나 기억을 지우려 했다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매리와 닥터 하워드 미에즈윅(톰 윌킨슨)의 경우는 더욱 직접적이다. 두 사람은 라쿠나 사에서 함께 일하며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이미 아내가 있는 닥터 하워드 미에즈웍과의 관계를 버거워하던 매리는 두 사람의 '연정'과 관련한 기억을 모두 지우고 직장 동료로 돌아간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기능은 완벽하지 않다. 기억을 잃은 매리는 닥터 하워드 메이즈웍에 대한 존경심을 과도하게 표출하더니 영화 끝에서는 결국 옛 감정을 다시 폭발시키고 만다. 그들이 언제라도 다시 반할 만큼 운명적인 인연이었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기억제거서비스는 기억은 지우되 감정은 지우지 못한다'고 봐야 옳다. 두 사람이 만들었던 감정은 이제 기억이라는 기준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든다. 기억을 잃은 클레멘타인이 역시 기억을 잃은 조엘에게 반한 이유는 "일단은 착해서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착한(Nice)' 면모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이 이율배반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감정의 변천사가 한순간에 섞여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아무리 기억을 지워도 감정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한 그들은 언제고 관계를 되살릴 수 있다.

기억을 잃은 두 사람은 감정의 잔향만으로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톱 노트의 향처럼 풋풋하고 설레는 연애를 다시 만끽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술을 건네며 저돌적으로 유혹하고,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새롱거림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집에 오자마자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무엇보다 찰스 강의 얼음 위에 누워서 별자리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기억을 잃기 전에 느꼈던 것처럼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별 것 아닌 일에도 새살거리며 즐거워한다.

반대로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공유한 감정 대신 그들이 지워버린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패트릭(일라이저 우드)도 두 사람의 행복한 순간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 패트릭은 찰스 강의 얼음 위에 누워 과거 조엘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 "지금 죽어도 좋아, 나 너무 행복해"라고…. 그러나 감정 없는 기억은 허망할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할 뿐이다.

괜찮다... 그들은 다시 사랑할 것이다

 착해서 사랑한 연인이 착해서 싫어졌을 때는 착한 행동의 기억이 아니라 감정이 변해온 길을 바라봐야 한다.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착해서 사랑한 연인이 착해서 싫어졌을 때는 착한 행동의 기억이 아니라 감정이 변해온 길을 바라봐야 한다.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 노바미디어

찰스 강에서 밤을 보낸 두 사람이 함께 조엘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은 관계가 바야흐로 '미들노트'로 접어드는 순간이다. 기억을 잃기 전, 그리고 서로에게 실망하기 전의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감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오해와 다툼, 증오의 기억을 완전히 버리고 마침내 마법처럼 새로운 기억을 가진 연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망각하고 새 출발 할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그런 해결책은 허망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대로 기억의 오염을 책임지지 않고 그저 '제거'해버렸다면 <이터널 선샤인>은 그저 허무함만 남겼을지도 모른다.

허무함을 밀어내는 것은 다시 '급작스럽고 완전한 망각'이라는 영화적 장치의 역할이다. 영화는 망각한 기억을 두 사람에게 재 주입 한다. 라쿠나 사는 기억을 지우러 찾아온 사람들에게 즐거웠던 기억은 물론 '가장 못 견디는 부분'을 전해 듣고 녹음한다. 이를 통해 기억의 지도를 구성하고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 인연의 가장 진한 부분으로 접어드는 그 순간, 두 사람은 녹음테이프를 듣게 된다.

거기에는 왜 기억을 지우기로 했는지, 가장 참아주기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인지가 가감 없이 담겨 있다. 급작스럽게 기억의 처음과 끝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은 당장 패닉에 빠진다. 끝에 느낀 배신감과 당혹감, 그 전에 느낀 안타까움과 미련, 그리고 더욱 일찌감치 느꼈던 설렘과 기대감이 폭풍같이 한 자리에 밀려드는 탓이다. 두 사람은 사랑의 모든 국면을 단 한 순간에 느낀다.

감정의 폭풍 속에서, 그들은 '괜찮다'고 말한다. 과거의 기억이 말하는 대로 이기적인 마음으로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끝내 다툼보다 절망적인 지루함이 찾아온다고 해도, 일단은 '괜찮다'고 말한다. '한 번 헤어진 연인은 같은 이유로 다시 헤어진다'는 말을 잠언처럼 신봉하고, 또한 직접 겪어본 이들에게는 두 사람의 선택이 현명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기억을 잃었으니까, 무지하니까 내릴 수 있는 무모한 결론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괜찮다. 그들은 또 한 번의 절망을 겪고 끝내 다시 헤어지더라도, 감정의 변화를 즐기고 사랑할 것이다. 그건 그들이 기억을 잃지 않았어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거친 산야와 계곡을 지날지언정 나아가는 도정 전체가 향기로 가득한 꽃길이기에. 기억의 '완전한 파멸' 후 찾아오는 흠 없는 마음속에서도 사랑의 꽃 한 송이 피워낼 영원의 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기에. 사그라지는 감정의 잔향 한 줌까지도 원 없이 즐길 것이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이터널선샤인 짐캐리 케이트윈슬렛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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