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SBS

관련사진보기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는 체제 전복을 꿈꾸는 여섯 인물, 즉 육룡이 등장한다. 이 육룡은 <용비어천가>의 그 육룡은 아니다. 고려 멸망 직전을 살았던 드라마 속 육룡은 근 500년 된 고려왕조가 정말로 자기 세대에 그렇게 허무하게 몰락할 줄은 몰랐겠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간다.  

육룡의 선두주자인 정도전(김명민 분)은 종합적 기획력을 바탕으로 혁명의 조건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정계에서 '강퇴' 당한 그는 기존 왕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설계한다. 그는 이성계의 군대를 자기 수족처럼 부릴 목적으로 이성계를 주군으로 모시고자 한다. 정도전이 스스로를 이성계의 책사로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이성계를 자신의 수족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태조실록>에도 나온다. 

정도전이 탐탁지 않게 보는 이방원(유아인 분)은 정도전의 기획이 차질을 보이려 할 때마다 은밀히 개입해서 기획의 실현을 돕는다. 이방원은 세상의 변혁을 위해 정도전을 돕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도전이 자기 아버지 이성계를 군주로 추대하려 하기 때문에 열심히 돕는 측면이 더 강하다. 물론 이방원이 이렇게 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 속 이야기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추대를 받고 있는 드라마 속 이성계(천호진 분)는 원래는 국가 전복이나 왕조 교체 같은 것을 꿈꿀 위인이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과 시대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변혁의 바람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육룡 중에 유일한 여성인 분이(신세경 분)는 어렸을 때 인연을 맺은 정도전의 혁명을 성의껏 돕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혁명이란 큰 그림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저 힘없는 사람들의 생계를 보장하겠다는 일념에서 그렇게 할 뿐이다.

외관상으론 거리의 이야기꾼이지만 실제로는 비밀 검객인 땅새(변요한 분, 위의 사진 맨 오른쪽)는 소년 시절 알게 된 정도전의 계획을 몰래 알아낸 뒤, 정도전의 작업에 방해가 될 사람들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선다. 정도전과의 사전 교감도 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는 그런 방법으로 고려 왕조의 몰락을 돕는다.

얼떨결에 무예를 배워 단기간에 속성으로 정상급 무사가 된 무휼(윤균상 분, 위의 사진 맨 왼쪽)은 거창한 혁명 같은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오로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일념으로 이방원을 돕고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런 식으로 고려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는 데 가담한다. 무휼은 분이·땅새와 더불어 이 드라마에서 생명을 얻은 가상의 인물이다.

정도전의 호에서 이름을 딴 삼봉길. 서울 종로구청 옆이다.
 정도전의 호에서 이름을 딴 삼봉길. 서울 종로구청 옆이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 혁명가 정도전

드라마 속 육룡의 선두인 정도전은 최근 2천 년간 등장한 우리 민족의 혁명가 혹은 혁명가급 영웅 중에서 상당히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 편에 속한다. 그는 지난 2천 년간 한민족 혁명가 혹은 혁명가급 영웅들이 제대로 풀지 못한 문제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영웅들이 제대로 풀지 못한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2천여 년 전, 진시황의 진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뒤를 이은 한나라의 7대 황제 한무제가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과 기원전 1세기 초반을 전후한 시점에 중국 한족이 중국 내륙에 대한 지배권을 기초로 동아시아 패권을 잡음에 따라, 한민족이 거주하는 만주와 한반도는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은 한민족 내부의 혁명을 방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한민족의 운명에서 중국이란 변수가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민족 내에서 누군가가 혁명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중국이란 변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민족 혁명가는 국내의 정권뿐만 아니라 국외의 중국 왕실까지도 동시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중국 같은 큰 나라의 혁명가들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국 정권에만 신경을 쓰면 됐던 것과 대조적이다.

물론 큰 나라의 혁명가라고 해서 국제정세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나라의 혁명가들은 외국을 신경 써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점을 갖고 혁명에 나설 수 있다. 이와 달리, 지난 2천 년간의 한민족 혁명가들은 국내외의 변수를 거의 대등하게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뜻을 성취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힘들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2천년 동안에 등장한 혁명가 혹은 혁명가급 인물 중에서 세 사람이 주목을 끈다. 정도전을 포함하여 왕건과 전봉준이 바로 그들이다.

<개성 왕씨 족보>에 실린 왕건의 초상화. 서울시 용산구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개성 왕씨 족보>에 실린 왕건의 초상화. 서울시 용산구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행운아 왕건, 그리고 불운한 전봉준

고려왕조를 창업한 뒤 신라와 후백제를 흡수함으로써 936년에 통일을 완수한 왕건의 경우에는 외세라는 변수를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행운아였다.

왕건의 시대에는 한반도만 분열된 게 아니라 중국까지 함께 분열되어 있었다. 한반도에서 이른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는 동안에 중국에서는 5대 10국의 분열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902년부터 979년까지 다섯 개의 중앙 왕조와 열 개의 지방 왕조가 상호 대결을 펼치며 명멸했다.

왕건의 고려가 한반도의 혼란을 수습한 때는 936년이고, 송나라(북송)의 조광윤·조광의 부자가 중국의 혼란을 수습한 때는 979년이다. 한반도 쪽이 훨씬 더 빨리 분열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왕건은 외세의 개입을 별로 받지 않으면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다. 중국이 동아시아 패권을 잡은 뒤로 왕건처럼 외세의 개입을 적게 받으면서 혁명급 변혁을 달성한 한민족 영웅은 없었다. 궁예나 견훤도 조금은 그런 측면이 있지만, 이들은 왕건처럼 최종적으로 뜻을 성취하지 못했다. 이렇게 외세의 개입을 적게 받으면서 뜻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왕건은 행운아였다. 

반면에, 19세기 후반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조선왕조를 강타했던 전봉준은 상대적으로 불운한 편에 속한다. 약사 내지 의사였던 전봉준은 1894년 고부민란을 계기로 전국적 반란군의 수장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고 호남 지역의 주요 거점인 전주성을 점령했다.

전봉준이 전주성을 장악하고 왕조를 위협하는 단계가 되자, 조선발(發) 정세변화를 꺼리는 청나라와 일본이 군사적 개입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전봉준은 외국군을 철수시키는 게 먼저라는 판단 하에 전주성을 내주고 정부와 화친을 맺었다. 하지만, 외국군은 그의 의도대로 철군하지 않았다. 동시에 혁명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동학군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양국 군대는 조선 영역에서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였다(청일전쟁). 이 전쟁의 승자인 일본은 여세를 몰아 동학군을 진압하고 비록 일시적으로나마 조선을 장악했다. 이렇게, 전봉준은 두 외세의 개입이라는 뜻밖의 변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혁명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면에서 전봉준은 왕건보다 불운한 편이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정도전, 외세의 개입을 역이용하다

정도전이 활약한 시대는 왕건 때보다는 외세의 영향력이 강하고 전봉준 때보다는 그 영향력이 약할 때였다. 그런 면에서, 정도전은 전봉준보다 유리한 상황에 있었다. 정도전 시대에도 명나라나 몽골이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줬지만, 전봉준 시대처럼 청나라·일본을 비롯해 서양열강이 집단적으로 영향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전봉준보다는 행운아였다.

그에 비해 정도전은 왕건보다는 불리했다. 왕건 시대에는 중국보다 한반도가 먼저 안정됐지만, 정도전 시대에는 한반도보다 중국이 먼저 안정됐다. 그래서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컸다. 그래서 정도전은 왕건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혁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도전은 외세와 손을 잡기도 하고 외세에 대항하기도 하는 유연성 전략을 취했다. 그가 이성계와 연합한 뒤에 이성계는 1388년에 '명나라를 공격하라'는 왕명을 거부하고 위화도 회군이라는 유명한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것은 명나라에 대한 친화적 태도의 표현이었다.

여기에는 이성계의 배후에 있었던 정도전의 의사가 상당부분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도전이 명나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은 건국 직후에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정도전은 외세에 대한 사적 감정을 죽이고 외세를 이용하기도 하고 외세에 맞서기도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전략을 구사하면서 그는 혁명급 변혁인 역성혁명을 이루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2천 년간 등장한 혁명가 중에서 정도전처럼 국제정세를 잘 활용한 인물은 드물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는 상당히 유능한 혁명가였다.

하지만, 전봉준 시대처럼 외세가 떼를 지어 몰려드는 상황이었다면, 정도전도 쉽게 성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19세기말에 등장했다면 정도전도 외세의 압력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정도전은 행운아였다. 외세의 개입이 적당해서 외세를 역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등장했다는 점은 혁명가 정도전이 받은 천운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능하면서도 운이 좋은 혁명가였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정도전, #왕건, #전봉준, #외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