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야구공                   상당히 낡은 야구공이다.

▲ 쿠바의 야구공 상당히 낡은 야구공이다. ⓒ 스포츠춘추 박동희


친구란 무엇일까? 단순히 옆에 있다고 친구일까? 그렇지 않을 거다. 내 마음이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이가 진정한 친구일 것이다. 좋은 예가 있다. 영화 <굿바이 마이 프랜드(Goodbye my friend)>다. 이 영화에서 에이즈로 죽은 주인공 덱스터의 장례식날 에릭은 자신의 낡은 '운동화'를 덱스터에게 준다. 죽음이 두려울 친구를 위해 '나도 함께 가겠다'는 배려였다. 낡은 운동화는 단순한 '물건'일지 몰랐지만, 그걸 보는 많은 이에겐 마음의 울림으로 작용했으리라.

야구도 마찬가지다. 매일 그라운드에선 처절한 사투가 펼쳐지나 때론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진한 우정의 끈이 연결되기도 한다.

여전히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쿠바는 한국의 대표적인 비수교 국가다. 그래선지 정치, 경제, 문화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으나 과거엔 서로가 적대국가였다. 그러나 최근 야구를 통해 교류의 물꼬가 트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야구를 매개로 한국-쿠바간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고자 노력하고 있는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를 만났다. '스포츠를 바라보는 내 눈은 문맹이며, 색맹이다, 인종과 국적이 보이지 않는다'란 슬로건을 내걸고 지면과 방송을 오가며 활발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박 기자는 자신의 슬로건처럼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야구 민간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11월 4일 한국과 쿠바의 친선경기가 열린 고척 스카이돔에서 기자는 박 기자로부터 '어떻게 야구가 적대국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들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선전... 쿠바 야구대표팀의 명과 암

'프리미어 12' 쿠바 대표팀을 이끄는 빅토르 메사 감독은 쿠바 야구영웅이다. 그러나 근엄한 태도로 일관하는 여느 영웅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는 경기 내내 파이팅 넘치는 행동으로 많은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의 유쾌하고 열정적인 제스처 덕분에 구장을 찾은 야구팬들은 뜻하지 않은 재미와 즐거움을 맛봤다.

쿠바 선수들도 다를 건 없었다. 자기 팀 선수들의 좋은 플레이가 나오면 열정적으로 환호했고,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이 그라운드까지 뛰어나가 경기 중인 선수들을 부둥켜 안고 기뻐하는 즐거운 촌극을 연출했다. 그렇다고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쿠바는 공격과 수비 어느 하나도 한국팀에 뒤지지 않았다. '세계 아마추어 야구 최강'이란 찬사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2번의 친선 경기에서 1승 1패를 기록한 것만 봐도 안다.

그러나 쿠바 더그아웃을 찾은 기자는 연방 고갤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장비를 들고 세계 최강이 됐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이다. 쿠바 선수들이 사용하는 배트, 글러브, 포수장비들은 대부분 낡고 조악했다. 배경엔 국가적 빈곤과 쿠바야구협회의 원활하지 못한 지원이 있었다.

쿠바야구장 배트                       헌 배트를 숨기려고 하는 모습. 상당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 쿠바야구장 배트 헌 배트를 숨기려고 하는 모습. 상당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 스포츠춘추 박동희


1959년 혁명 이후 쿠바는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했다. 그러나 계획경제가 실패로 끝나고, 1961년 쿠바와 단교한 미국이 경제봉쇄에 나서며 '카리브해의 진주'로 불리던 쿠바는 순식간에 중남미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당연히 쿠바야구에도 '엄동설한'이 찾아왔고, 경제봉쇄로 쿠바는 웬만한 야구용품은 수입조차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열악한 인프라와 형편없는 장비 그리고 낮은 급료 등 '삼중고'가 겹치며 쿠바 야구선수들은 힘겨운 현역생활을 해야만 했다. 여기다 쿠바가 자국 선수들의 국외 무대 진출을 막으면서 쿠바 야구선수들의 불만은 고조됐다. 불만은 곧 잇따른 망명으로 이어졌다.

쿠바야구계는 자국 스타선수들의 망명을 막으려 무진 애를 썼다. 국제대회마다 보디가드를 붙여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화장실 창문을 뚫고 망명을 시도하는 선수들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문제는 선수들의 망명이 계속돼도 쿠바야구는 변한 게 없었다는 것.

고척 스카이돔에서 만난 박동희 기자는 "9월 중순 열흘 가까이 쿠바야구 현지 취재를 했다"며 "천부적 재능과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선수가 많았음에도 전체적인 야구 인프라가 매우 낙후하고, 장비도 제대로 구비돼 있지 않은 걸 보고 무척 마음 아팠다"고 안타까워했다.

박 기자에 따르면 쿠바 아마추어 선수들은 연습 시 테이프로 '칭칭' 감은 야구공을 쓴다. 경기 때 쓰는 공도 우리로 치면 전지훈련 때나 쓰는 재활용 공이라고. 프로는 그나마 낫지만, 프로 역시 A급 공은 찾아볼 수 없고, B급 공을 쓴단다. 오죽하면 박 기자가 낡은 야구공에 관심을 보이자 쿠바 프로팀 관계자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창피해 했단다.

박 기자는 "공이 너무 낡아 쿠바야구 관계자들이 무척 창피해 했다, 원체 자존심이 센 사람들이라, 야구공을 내 눈에 보이지 않으려고 훈련이 끝나면 급히 야구공들을 수거했다"며 "공도 공이지만, 배트도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많아 '어떻게 이런 공과 배트를 들고 오랫동안 세계 최강 자릴 지켰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쿠바협회 관계자는 박 기자에게 오랜 경제봉쇄로 이마저도 구하기가 힘들다며 하소연했다. 그러자 박 기자는 쿠바야구협회 관계자에게 "조만간 '프리미어 12'라는 국제대회도 열리는데 선수들이 좋은 배트를 써야 하지 않겠느냐"며 "한국에 돌아가면 자비로라도 좋은 공과 배트를 구해놓아 친선경기 차 한국을 찾는 쿠바선수들에게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을 지킨 박동희 그리고 최동원 기념사업회

배트를 고르고 있는 쿠바선수들                                           쿠바 선수들이 배트를 고르고 있다. 쿠바 선수들이 즐거워 하는 표정이 보인다.

▲ 배트를 고르고 있는 쿠바선수들 쿠바 선수들이 배트를 고르고 있다. 쿠바 선수들이 즐거워 하는 표정이 보인다. ⓒ 스포츠춘추


쿠바 취재를 하면서 야구소년들의 열악한 장비가 눈에 밟힌 박 기자는 또 하나의 약속을 했다. 쿠바 유소년 야구 지원을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박 기자는 귀국 뒤 이 약속을 지키고자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기자는 최동원 기념사업회 강진수 사무총장과 대화 도중 열악한 쿠바야구 현실을 들려줬다. 유심히 박 기자의 이야기를 듣던 강 총장은 흔쾌히 "나도 돕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마침 최동원 기념사업회 이사장 박민식 의원도 직접 쿠바를 다녀온 바 있어 이번엔 박 의원까지 협조 의사를 밝혔다.

박 기자와 최동원 기념사업회는 즉시 쿠바야구를 돕고자 뭉쳤다. 이때 부산 지역에서 유명한 스포츠용품업체인 '하드스포츠'가 최동원 기념사업회로 연락을 취했다. 같은 부산 지역에서 야구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강 총장과 하드스포츠 한동범 대표는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2008년 쿠바 대표팀이 내한했을 시 쿠바 선수들에게 무료로 배트를 전달한 바 있는 한 대표는 "7년 전에도 쿠바 선수들에게 배트를 전달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쿠바 대표팀을 돕고 싶다"며 "홍보도 싫고, 광고도 싫다, 쿠바 선수들에게 배트만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는 말로 25자루의 배트를 최동원 기념사업회에 전달했다.

강 총장은 "최고급 배트 25자루를 돈으로 환산하면 거의 800만 원 가량이 된다"며 "한 대표의 좋은 취지를 받아들여 배트를 받고서 쿠바 대표팀에 전달하기로 했다"고 말햇다.

11월 3일. 쿠바 선수단이 묵는 서울 소재 한 호텔에서 배트 전달식이 열렸다. 말이 '전달식'이지, 호텔 로비 탁자에 배트를 쭉 늘어놓고 선수들이 편하게 가져가도록 하는 평범한 전달이었다.

박 기자는 "선수들이 각자 쓰는 배트의 무게와 길이가 다르다 보니 직접 선수들이 고르는 게 좋겠다 싶었다"며 "강 총장과 한 대표 모두 기념 촬영같은 생색내기 전달식을 마다한 까닭에 전달식은 3분도 안돼 끝났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쿠바 야구협회 관계자 역시 "보통의 경우 이 배트를 써달라고 기념사진을 찍고, 행사를 통해 언론 홍보를 하는데 미스터 박(박동희)이나 우릴 도와주신 분들은 사진 촬영은 고사하고, 뒤에 서서 선수들이 배트를 집어가는 것만 바라봤다"며 "선수들이 친선경기 2차전부터 한국산 배트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 덕분인지 1차전에선 답답하게 터지지 않던 타선이 2차전에선 불을 뿜었다"고 흡족해 했다.

"보통 배트 주면서 사진 찍고 하는데..."

쿠바선수들이 사용한 배트                                    11월 5일 경기에서 한국산 배트를 들고나와 타격을 하고 있다.

▲ 쿠바선수들이 사용한 배트 11월 5일 경기에서 한국산 배트를 들고나와 타격을 하고 있다. ⓒ 강윤기


과거 쿠바 대표팀은 '매너가 썩 좋지 못한 팀'으로 불리곤 했다. 선수단 불만이 많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도 않을 뿐더러 경기 시에도 집중력을 잃은 장면을 종종 보여줬기 때문이다. 대표팀 평가전 땐 더 그랬다. 친선경기다 보니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강한 듯보였다.

하지만, 이번 한국 대표팀과의 평가전을 치를 땐 달랐다. 쿠바팀은 1차전 패배에 낙담하지 않고, 2차전 때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경기 중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물론 국제대회 평가전에 포인트가 매겨져 세계 랭킹에 반영되는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기자가 봤을 때 쿠바 선수들이 최선을 다한 덴 한국에서 진정성 있는 선물을 받고서 기분이 좋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싶다. 기분 좋은 기억이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박 기자는 "쿠바 선수들이 한국산 배트를 사용하고서 상당히 만족해 했다, 특히나 모든 배트에 쿠바 국기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준 덕분인지 선수들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더 힘차게 스윙한 것 같다"며 "개인적인 약속을 지켜 기쁜 마음도 있지만, 남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박 기자는 쿠바 유소년야구 돕기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그간 지속해온 보육원 야구 장비 지원에도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영화 <굿바이 마이 프랜드>에서 어린 소년들이 '에이즈'란 무서운 질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정을 나눴듯이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다. 이념으로 무장해 상대를 적대하고, 국적과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건 진정한 스포츠가 아니다. 그보단 순수한 땀을 통해 경쟁하고 패자를 일으켜 주고 진한 우정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의 가치다. 이번 프리미어 12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과 쿠바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한다.

쿠바는 프리미어 12 '푸에르토리코'전에서 승부치기 끝에 7대 6 으로 승리를 거뒀다. 이날 많은 쿠바 타자는 한국산 배트를 들고 나왔고,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짜릿한 승리를 만들어낸 한국산 배트였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DKU, 스포츠 야구 전문기자 , 강윤기의 야구 터치 운영중.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