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만추> 공연 사진

▲ 연극 <만추> 공연 이명행의 훈과 김지현의 애나. ⓒ HJ컬쳐


흘러간 시간이 모래가 되어 쌓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변했다. 더는 누군가를 기다리기 싫다고 말하던 애나는 다시 한 번 기다림을 시작한다. 시간이 쌓여간다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아는 훈도 용기 내어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때는 가을이었고, 여름보다는 겨울에 조금 더 가까운 만추였다.

무대는 쓸쓸하고, 조명은 따뜻하다. 가을을 똑 닮았다. 철골구조의 2층 세트는 소재 탓인지 차가웠고, 시공간은 낯선 도시의 이방인 애나, 훈이 처한 상황과 심정만큼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가장 흥미로운 건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인데, 무대 한쪽에 있는 (모래)상자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모래가 떨어져 쌓인다. 쌓인 모래의 양은 애나와 훈이 보낼 수 있는 시간에 반비례한다. 물론 러닝타임도 함께.

늦었다고 생각할 때, 사랑이 왔다

 연극 <만추> 공연 사진

▲ 연극 <만추> 공연 사진 박송권의 훈과 김소진의 애나 ⓒ HJ컬쳐


김소진과 이명행, 두 배우의 연기에 대한 평을 굳이 나까지 더 보태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굳이' 말하는 건,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임을 일러둔다. 애나 역의 김소진 배우는 차분하고 건조한 어투이다. 중국어 대사 소화는 물론 대사를 하지 않는 순간들에 보여주는 공허한 눈빛과 걸음걸이까지 좀체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이명행 배우는 어느새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락희맨쇼>에서 차라리 말을 말아야 하는 딱한 남자 장물 천사로 활약한 그때부터 최근작 <아버지와 아들>의 아르까디까지…. 현빈과 같은 역을 연기한다는 데 부담이야 없었겠느냐마는 그만의 장난스러움이 묻어있는 훈은 어색한 침묵의 순간마저 빙그레 웃음 짓게 한다.

혹자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었다"라고 했다. 웃자고 한 말에 울 뻔했다. 다행히도 <만추>에서는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사랑이 찾아왔다. 바야흐로 <만추>를 보기엔 더없이 좋은 계절, 만추다.

추신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면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과 '눈빛만 보아도'를 듣는 것도 좋겠다. 취향은 타겠지만, 다른 분위기의 두 곡은 <만추>를 떠올리기에 썩 괜찮은 배경음악이 돼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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