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뮤지컬 <명성황후>

▲ 김소현의 명성황후 지난 7월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뮤지컬 <명성황후> 20주년이 막을 올렸다. 사진은 당일 공연의 커튼콜. 배우 김소현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관록을 쌓아가고 있는 그녀는, 유독 '여왕'이나 '공주'와 관련된 필모그래피가 많은 편이다. 개인사적 비애의 주인공으로 민자영을 잘 연기했으나, 망국의 어머니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 곽우신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뮤지컬 <명성황후>가 7월 28일부터 시작한 서울 공연을 지난 10일 마무리했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그 막을 내린 후, 오는 10월 9일 인천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지방 순회공연에 들어선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여러모로 의의가 큰 작품이다. 국내 대극장 창작 뮤지컬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나 다름없다. 여러 작품이 창작됐지만,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를 허접스럽게 복제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한 번 무대 위에 올라간 후 영영 역사에서 사라진 작품이 어디 한둘인가.

뮤지컬 <명성황후>는 '우리의 이야기'로 뮤지컬을 창작하면서, '우리의 것'을 충실히 살렸다. 그러면서도 스케일이 큰 '대극장'용 작품이다. 1995년 초연 이후, 20년 동안이나 생존에 성공했다. 고전적이면서도 웅장한 음악, 전통을 잘 살리면서도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의상, 무과급제 장면에서 돋보이는 안무 등 해외 작품보다 '꿀리지 않는' 비주얼을 자랑한다. 특히나 <명성황후>가 자랑하는 회전 무대는, 지금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선진적이다.

 뮤지컬 <명성황후>

▲ 홍계훈을 연기한 박송권 지난 7월 28일, 뮤지컬 <명성황후>의 커튼콜에서 홍계훈을 연기한 배우 박송권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박송권은 훌륭한 배우다. 다만 그의 역량을 다 발휘하기에는 배역 자체가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 곽우신


그러나 안타깝게도, 뮤지컬 <명성황후>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이다.

뮤지컬은 '완성형' 콘텐츠가 아니라 '진화형' 콘텐츠다. 프리뷰에서 본공연으로 넘어가면서, 초연이 재연과 삼연 등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더 나은 형태로 바뀐다. 뮤지컬 <모차르트!>가 성공적으로 변신했고, 뮤지컬 <엘리자벳>도 다음 공연에서 '올 뉴(All New)'를 예고했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지금의 모습과 초연을 단순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했고, <위대한 캣츠비>는 리부트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명성황후>는 지난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떤 진화를 거쳤는지 의아하다. 원작인 이문열의 <여우사냥>의 존재 때문에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바꾸기 어려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본래부터 '외피'가 장점이었던 명성황후는 끊임없이 '외피'만 키우는 데 치중했다. 민자영을 향한 홍계훈의 마음이 '충'에서 '애'로 바뀌었다고 고작 이게 변화이고 발전이란 말인가(그나마도 노래 속 한 줄짜리 짤막한 가사로 '퉁' 친다).

'국뽕'에 취해 외피만 키운 20년 

 뮤지컬 <명성황후>

▲ 민영기의 고종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고종을 맡은 민영기.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프란츠 요제프를 맡았을 때에 비하면 매력이 많이 반감됐다. 극 중에 활약하는 부분도 딱히 없고, 캐릭터도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인물이다 보니 보여줄 게 딱히 없었다. ⓒ 곽우신


'국뽕'이라는 말이 있다. '국가'에 '필로폰(히로뽕)'을 합성한 인터넷 용어이다. 과도하게 애국심이나 민족애를 강조하는 경우에 이를 비하하는 용도로 자주 사용됐다. 국수주의를 비난하는 데 쓰이던 부정적 어휘였으나, 점차 사용이 광범위해졌다. 스포츠 국가 대표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할 때, 대한민국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을 느낄 때 '국뽕에 취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국뽕'을 자극하는 코드는 사실 국내 문화계 전반에 퍼져 있다. <환단고기>처럼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이우혁의 판타지소설 <퇴마록>이나 김진명의 역사대하소설 <고구려>도 논란이 인 적이 있다. 영화 <명량>이나 <암살>, <연평해전> 역시 넓게 보면 비슷한 코드로 분류할 수 있다. 창작뮤지컬계에서도 민족주의나 애국심을 자극하는 작품은 여럿 있다. 근래에 막을 내린 <아리랑>이 그렇고 서울예술단의 <윤동주, 달을 쏘다>나 에이콤인터내셔날의 다른 대표작 <영웅>도 마찬가지다.

국가라는 공동체는 제도로만 작동하는 게 아니라 국민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고, 국가 위기 상황에서 애국심을 발휘한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이해만이 아니라 감정적 동조가 작용한다.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 역시, 그 구분이 불분명함에도 여전히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존재하고 작동한다. 이를 건드려 눈물샘을 자극하는 코드 자체를 무조건 도외시하거나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적절하게 쓰이기만 하면, '우리'다운 카타르시스를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좋은 예'와 '나쁜 예'는 분명 존재한다. 우리네 마음 기저에 쌓여 있는 '한'을 푸는 작품인지, 아니면 막연하게 호소하는 단순 감성팔이 작품인지 구분해야 한다.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은 "대체 조국이 무엇이길래" 하고 울부짖으며 고민한다. <영웅>은 국가를 되찾기 위한 당시 '평범한' 애국지사들의 노력을 상세히 그리면서도, '누가 죄인인가' 넘버를 통해 이들의 동기와 상황을 잘 설명한 작품이다. 안중근의 지나친 미화, 흩어져 버리는 조연(특히 여성) 캐릭터,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논란(그나마 올해 공연에서는 장면이 삭제되며 논란이 줄었다) 등이 있지만, 최소한 <영웅>은 코드를 잘 활용한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안타깝게도 같은 회사(같은 연출)의 다른 작품 뮤지컬 <명성황후>는 명백하게 '나쁜 예'에 속한다. <명성황후> 속 명성황후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총명함과 강한 정치적 야망을 지난 조선의 스물다섯 번째 왕비"이며 "한편으로는 고종과 세자를 지극하게 보살피는 속 깊고 정 많은 아내이자 어머니"로 묘사된다.

박병성 <더 뮤지컬(The Musical)> 편집장은 뮤지컬 <명성황후> 프로그램북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기존의 부정적 역사적 평가에서 벗어나 국내외적인 격변기에 조선을 책임져야 했던 고종과 민비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정치적 양심으로 국정에 개입하고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해 권력을 장악했다는 역사적인 평가에서, 자립하기 위해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지만 혼란스런 국제 정세의 틈바구니에 희생당했던 비운의 황후로 새롭게 바라본다."

 뮤지컬 <명성황후>

▲ 배우 김법래 지난 7월 28일,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뮤지컬 <명성황후>의 미우라를 맡은 김법래 배우가 무대에 올랐다. 카리스마 있는 배우이지만, 배역이 너무 평면적인 인물이라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 곽우신


누누이 강조하지만, 문화 콘텐츠 창작자가 역사를 변주하는 건 자유다. 명성황후를 긍정적으로 그리든, 부정적으로 묘사하든, 실제 역사와 다른 설정을 차용하든 말든 관계없다. 역시나 여러 번 말하지만, 여기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명성황후라는 캐릭터에게서 관객이 '국뽕'을 느끼기 바라는 마음에 여러 설정을 갖다 붙인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러했듯이, 별다른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다.

명성황후 혹은 그의 측근에 대한 비리 의혹이나, 그가 실제로 행했던 악행들을 모두 지워버린 건 그렇다 치자. 그럼 조선은 왜 망했나? 그렇게 현명하고 자애로운 권력자가 온 힘을 다했는데도 망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원군 때문에? 고종 때문에? 열강 제국주의의 힘이 너무 강해서? 극을 봐서는 알 수가 없다. '일본 나빠요' 수준의 평면적 묘사, '망국의 어머니'라는 국모 캐릭터, 명성황후에 대한 긍정적 해석은 이미 수많은 문화 콘텐츠에서 소비된, 전혀 새롭지 않은 양상이다.

황후의 읍소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이유

 뮤지컬 <명성황후>

▲ 인사하는 김소현 지난 7월 28일, 뮤지컬 <명성황후>의 커튼콜 현장. 주인공 역할을 맡은 김소현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거의 주인공을 도맡아 하는 그녀의 마지막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분명 울림이 있으나, 그 울림이 영 불편한 것은 그 서사와 메시지가 따로 놀기 때문이다. ⓒ 곽우신


<명성황후>의 백미는 역시 극을 닫는 마지막 넘버 '백성이여 일어나라'가 열창 되는 장면이다. "한민족의 피를 끓게 하여 애국심을 샘솟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낯뜨거운 평가가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가장 웅장하고 멋진 장면이 큰 울림 없이 흩어진다. 이야기하려는 메시지가 제대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가장 불편한 점은, '백성이여 일어나라'로 귀결되는 이 극의 서사 자체다.

"백성들아 일어나라. 이천만 신민 대대로 이어 살아가야 할 땅. 한 발 나아가면 빛나는 자주와 독립. 한 발 물러서면 예속과 핍박. 용기와 지혜로 힘 모아, 망국의 수치 목숨 걸고 맞서야 하리.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

이 나라와 민족은 국란이 있을 때마다 민중의 힘으로 극복했다. 국가가, 권력이, 위정자가 매 고비 책임을 방기했던 반면, 민초는 꿋꿋이 일어서 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왕이 강화도로 도망갔을 때 몽골에 맞서 싸운 건 누구였는가. 임금이 북쪽으로 도망쳤을 때, 왜적에게 들고일어난 건 누구인가.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겼을 때, 죽창과 조총을 든 건 또 누구였나.

사사건건 책임을 떠넘기며 국민 탓, 야당 탓만 하는 누가 떠오르는 기시감은 차치하자. 국부가 다리를 끊고 도망쳐도, 분연히 일어난 건 민중이었다. 정부와 기업이 경제 위기를 자초하면 금반지를 내놓는 게 우리네 서민이다. 위에서 "백성이여 일어나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언제나 민초는 일어났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나라를 말아먹는 사람 따로 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 사람 따로 있던 역사였다.

그런데 대체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기나. <명성황후> 속 위정자들은 대체 뭘 잘했다고 백성에게 "목숨 걸고 맞서라"하는가. 그것도 '조선'의 '무궁'을 위해서 말이다. 그깟 '조선'은, 그럼 백성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필요할 때 이용과 동원의 대상이 되고, 필요 없어지면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 바뀌는 게 우리네 현실이라지만, 이 반복되는 비극을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뮤지컬 <명성황후>

▲ 대원군을 맡은 이희정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흥선대원군 역을 맡은 이희정 배우가, 지난 7월 28일 커튼콜에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권력에 대한 의지를 보이며 명성황후와 갈등하는 캐릭터이지만, '새로움'은 없다. ⓒ 곽우신


뮤지컬 <명성황후>라는 극 안에서 '백성'이라는 존재는 눈에 띄지 않는다. 명성황후와 고종, 대원군의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물론 뮤지컬 <명성황후>가 '민중사관'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다만, 마지막에 백성이라는 주체를 등장시키고, 이들에게 '일어나라'라고 하려면 극 안의 서사에서 백성의 이야기가 등장해야 한다. 질곡의 근현대사 속에서 위정자들과 대중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들에게 말을 걸 수 있지 않겠는가.

<명성황후>는 이야기 내내 높으신 나라님들의 목소리만 들려줬다. '임오군란'조차 그냥 뭘 잘 모르는 구식군대와 이들을 조롱한 신식군대 간의 해프닝 정도로 넘어간다. 대신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얘기하면서 권력 분투와 정치 싸움에 매진했고, 때때로 한가롭게 외국어를 공부하며 쉬었던 한 여자만 나온다. <명성황후> 속 민자영의 죽음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을지언정, 식민지 조선의 비애나 일제의 부당함에는 감흥이 없다. 그러니 여전히, 왜 백성에게 일어나달라고 하는지 물음표만 메아리친다.

애국, 충성, 희생, 헌신은 '당위'로 설명되지 않는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삶을 지키는 것이고,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재화와 가치의 올바른 분배에 있다. 국가가 제 역할을 다 했을 때, 비로소 국가는 국민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뮤지컬 <명성황후>는 아무리 봐도, 명성황후가 무슨 자격으로 백성에게 조선을 위해 일어나 달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역사의 교훈을 되삼아 강하고 힘센 나라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설명하지만, 그 희망이나 비전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의상·안무·무대로 눈가림하더라도, 고작 이 정도의 촌스러운 서사가 한국 창작뮤지컬의 '자존심'이라는 게 씁쓸하다. 대극장용 창작뮤지컬의 한계가 이 정도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 -

▲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 뮤지컬 <명성황후>가 지난 7월 28일부터 시작된 서울 공연을 마치고, 지방 공연에 들어선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한국 뮤지컬 역사에서 분명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그 '의의'가 작품의 '질'까지 보증하지는 않는다. 20주년이 30주년, 50주년이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 에이콤인터내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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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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