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이 <태극기 휘날리며>를 뛰어넘었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6일 기준 누적 관객수 1179만명을 기록하며 <태극기 휘날리며>를 따돌리고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 8위에 올랐다고 한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을 조합하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퍼즐' 또한 진행형이다. 그동안 전지현이 맡은 안옥윤의 실제 모델은 남자현 열사로 굳어졌고, 하와이 피스톨의 길거리 총격전으로 김상옥 의사를 주목하는 이도 많았다. 염석진(이정재 분)의 실제 인물로는 해방정국에서 백색테러를 이끌던 염동진, 친일 형사였던 황옥 등이 '용의선상'에 올랐었다.

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을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금광 채굴로 부를 끌어 모았다는 점에서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비행기 10대를 헌납한 대목에서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등이 거론됐지만 '싱크로율'이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해서는 낮았다. 굵직굵직한 친일 행적을 종합해 설정했기 때문인가 싶었다.

그런데 뒤늦게 영화를 보면서 '강인국 퍼즐'의 힌트를 발견했다. 먼저 퍼즐의 '가로줄', 영화에서 강인국은 "자전거 만드는 공장 지어서는 돈을 벌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어 '세로줄', 강인국과 조선주둔군 사령관에 대한 암살 작전, 하필 비행기 공업회사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벌어진다. 가로와 세로를 조합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강인국은 비행기 공장 사장인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신용욱과 안창남

 신용욱의 고국 방문 비행 소식 보도, 1927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신용욱의 고국 방문 비행 소식 보도, 1927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신용욱, 조선 최초로 항공사를 설립한 사람, 그 회사 이름이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다. 동시에 신용욱은 비행기 뿐 아니라 헬리콥터까지 몰 줄 아는 명실공히 조선을 대표하는 비행사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한민국 정부가 공인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신용욱과 '떴다 보아라 안창남'이 한 때 같은 비행학교에서 꿈을 키웠던 동창생이란 점이다.

두 사람은 나이도 같았다. 1901년, 안창남은 서울에서, 신용욱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안창남과 달리 신용욱은 명문가 집안 자제로 훨씬 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뉴스에서 그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신용식의 집에 지난 26일 오후 4시경 수상한 청년 한 명이 들어가 독일제 육혈포를 내어들고 자기는 상해에서 조선 동포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틈에 신용식은 몸을 피하고 그의 종제(사촌 아우) 신용인(신용욱의 개명 전 이름)만 남아 있는데, 그를 붙들고 자기는 비행사인데 급히 쓸 곳이 있다고 돈 만원을 내라고 위협하며 권총을 목에 대고 협박을 함으로..." (1926년 9월 3일자 동아일보)

이렇게 성장 환경이 전혀 다른 두 청년이 마주친 곳은 오쿠리 비행학교였다. 앞서 입학한 안창남이 비행학교에서는 1년 선배, 두 사람은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신용욱이 안창남씨에게서 비행기 공부를 하였다"거나 "안창남과 같이 비행술을 연구했다"는 당시 보도를 확인할 수 있다. 훗날 장덕창 전 공군참모총장의 회고 역시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뒷받침한다.

"내가 안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20년 3월. 그는 그때 소율(오쿠리)비행학교에 있었고 나는 천엽 비행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얼마 후 고 신용욱씨가 소율에 입학, 같은 길을 걷는 우리 세 사람은 곧잘 함께 모여 서로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서로 격려하기도 하였다." (1965년 4월 3일자 동아일보)

일본군 비행사 키워낸 신용욱, 독립군 조종사 양성에 나선 안창남

 일본의 <역사사진> 1923년 8월호에 실려 있는 사진. 오쿠리비행학교 시절 안창남의 모습이다. 같은 학교에서 친일파 신용욱은 안창남과 함께 비행술을 연구하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사진> 1923년 8월호에 실려 있는 사진. 오쿠리비행학교 시절 안창남의 모습이다. 같은 학교에서 친일파 신용욱은 안창남과 함께 비행술을 연구하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koreanhistory.org


얼마 후 두 사람의 사회적 위치는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소파 방정환이 1920년 <개벽>을 통해 조선을 대표하는 비행사로 소개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안창남은 1922년 12월 10일, 역사적인 첫 번째 고국 방문 비행을 기점으로 민족을 대표하는 '1등 비행사'로 우뚝 선다. 자신보다 출신 배경이 뒤떨어지는 '친구'의 성공, 21세 청년 신용욱이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1924년, 안창남은 독립운동에 자신의 힘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인자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는다. "천재 비행가로 명성이 자자하던 안창남씨가 최근 돌연히 상해로 떠나 약 일주일간 동안이나 그곳 임시정부의 수뢰자들과 만나 획책하고 어디로 인지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당시 보도 몇 줄은 그의 험난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신문에서 안창남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한 이름이 신용욱이었다. 3등 비행사, 2등 비행사 면허를 잇따라 따냈다는 뉴스는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비행술이 탁월하여 일본 항공국에서도 재능을 인증해 준다"는 그의 소식은 세상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1927년 12월, 신용욱도 고국 방문 비행을 성공리에 마치면서 명실상부 '조선의 일등비행사'로 자리매김한다.

이와 같은 성공을 발판 삼아 신용욱은 1929년 5월 조선인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의 자리에 앉는다.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친일파 거두 박영효가 설립위원장, 조선총독부 철도국장 오무라가 교섭위원을 맡았다고 한다. 사실상 친일 비행사 양성 기관이었던 셈이다. "조선 청년들을 가르쳐 일본특공항공대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출전시켰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안창남은 독립군 조종사들의 요람을 만들고 있었다. '대학독립공명단' 소속으로 한국인 비행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두 사람의 인연은 안창남이 비행 교육 중 추락 사망하면서 끊어지게 된다. 1930년 4월 2일, 안창남의 나이 겨우 스물 아홉이었다. 그 후, 신용인(신용욱의 본명)이란 이름도 신문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안창남의 죽음 이후 이름 바꾼 신용욱

 방응모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비행사, 이 사람이 신용욱이다. <조선일보>가 언론사 중 최초로 전용 비행기를 도입했다며 자랑하는 역사를 뒷받침하는 사진으로 1935년 월간지 <조광>에 실려 있다

방응모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비행사, 이 사람이 신용욱이다. <조선일보>가 언론사 중 최초로 전용 비행기를 도입했다며 자랑하는 역사를 뒷받침하는 사진으로 1935년 월간지 <조광>에 실려 있다ⓒ 이정환


신용욱이 '친구'의 죽음 이후 자신의 이름을 바꿨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본명은 신용인으로 1930년대 이후 신용욱으로 개명했다"고 나와 있는데, 실제로 당시 신문을 보면 신용인이란 이름은 1933년 자취를 감추고 같은 해 신용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 자신의 이름을 바꿨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개명 이후 그의 친일 행적이 더욱 선명해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 <암살>의 시대적 배경은 1933년, 같은 해 미국 '실라' 헬리콥터 학교 조종과를 졸업한 신용욱은 조선총독부의 치적을 선전하는 비행에 나선다. 난징 대학살 후 일본이 세운 괴뢰 정부에 신용욱은 조선 총독부의 축하 메시지를 전한다. 귀환 후 당시 총독이 신용욱을 총독실로 불러 축배를 나눴다는 보도를 보면, 그에 대한 총독부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신용욱은 항공 수송 사업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1936년 9월 신(愼) 항공사업사를 설립하고 경성-이리 간 주 2회 정규 항로를 개설하고, 1939년에는 미국에서 DC-3기를 도입해 중국 하이난섬에 취항한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수송에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1940년까지 일본군으로부터 10대의 군용기를 불하받아 사업을 확대했다고 한다.

영화 <암살>에서 강인국은 비행기를 10대 헌납한다. 1941년 5월 신항공사업사를 조선항공사업사로 이름을 바꾸고 신용욱은 글라이더를 만들어 일본군에 헌납한다. 1942년 6월 조선항공사업사가 군수공장으로 지정되면서 부산에 항공기 부품·조립 공장을 만드는데 그 규모가 무려 20만 평 정도였다고 한다. 이 공장에서 일본군을 위한 해군기 1·2호기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강인국은 조선군 주둔 사령관과 함께 비행기 공업회사를 시찰하러 간다. 신용욱이 1944년, 조선항공사업사를 모체로 창립한 회사 이름 또한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다. 이렇듯 신용욱과 <암살>의 강인국은 싱크로율이 제법 높다. 물론 영화처럼 신용욱은 죽지 않는다. 이 땅의 친일파의 절대 다수가 그러했듯.

대한항공 '모체' 만들고 국회의원까지, 5.16 쿠데타 후 의문의 자살

 신용욱의 자살 소식을 전한 1961년 8월 29일자 <경향신문>

신용욱의 자살 소식을 전한 1961년 8월 29일자 <경향신문>ⓒ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광복은 신용욱에게도 '빛'으로 다가왔다. 해방 직후 일본군 비행기들을 고철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이익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여객기 3대를 구입한다. 이들 항공기에는 우남(이승만의 호), 만송(이기붕의 호), 창랑(장택상의 호)호라는 이름을 각각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항공사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민간항공사로 기록되는 대한국민항공사(KNA)다.

몇 년 후 '그늘'도 아주 잠깐 찾아왔다. 1949년 2월 10일, 신용욱은 세종로 회사 건물에 있는 다방 '날개'에서 반민특위 대원들에게 체포된다. 그 후 '종기의 고름을 짤 때는 적당히 짜야 한다'는 당시 특별검찰관장의 희한한 소신에 힘입어 두 달 여 만에 자유의 몸이 된다. 위기를 벗어난 신용욱은 정계 진출에 성공한다. 1950년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처음 달았고, 1954년에는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역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경제계와 정치계를 주름잡는 거물로 우뚝 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군사정권의 '칼날'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신용욱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민주당 정권과 결탁한 부패 인사로 지목됐고, 얼마 후 부정 축재 혐의로 서울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출소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신용욱은 행방불명된다. 1961년 8월 25일, 자신의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탔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흘 후, 신용욱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 여의도 공항 주변 샛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점에 주목한 경찰은 신용욱이 회사 경영난을 비관해 한강에 투신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신용욱의 KNA는 1958년 여객기 1대가 납북되면서 재정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이후 영업 부진으로 채무가 크게 늘어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신씨가 남긴 유류품은 현금 5100환과 손수건, 돋보기, 안경 등이 전부였다고 한다. 신분증이나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주인 잃은 KNA는 얼마 후 박정희 정권이 인수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국영항공사 '대한항공공사'로 탈바꿈시킨다. 하지만 경영상의 어려움은 해소되지 않았고, 1969년 민영화를 추진해 한진그룹 계열사로 편입시킨다. 바로, 오늘날 대한항공이다.

아직도 유효한 아들의 혈서, <암살>의 '마지막 퍼즐'은

 영화 <암살>에서 강인국과 조선주둔군 사령관에 대한 암살 작전은 그들이 비행기 공업회사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위치한 주유소를 거점으로 펼쳐진다

영화 <암살>에서 강인국과 조선주둔군 사령관에 대한 암살 작전은 그들이 비행기 공업회사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위치한 주유소를 거점으로 펼쳐진다ⓒ 케이퍼필름


비록 신용욱의 인생은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오랜 세월 동안 무척이나 관대했다. '친구' 안창남이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은 2001년, 그 다음해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기 전까지 신용욱을 대변한 것은 '우리나라 민간 항공의 선구자'라거나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 항공업계에 생애를 바쳐 초석을 마련한 개척자'란 식의 평가였다.

"과거 나는 신용욱의 핏줄이면서도 아버지의 행동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 사이는 대단히 나빴었습니다. 그러나 항공계에서의 아버지의 실력은 경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항공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버지를 석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선처해 주십시오."(1977-07-11 경향신문, 신용욱의 아들이 반민특위에 잡혀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당시 쓴 혈서)

이런 '사적 판단'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유효하다. 친일은 했지만 그래도 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평가, 그러니 헛갈린다. 법무부가 친일파 윤치호를 독립운동가 12명에 포함시킨 행위를 단순한 실수만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도 그래서다. 부귀영화가 약속된 1등 비행사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신의 몸을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 결단'에 대해 영화를 통해서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역사 교육이 갈지자를 걷고 있어서다. '집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다. 영화 <암살>을 만든 최동훈 감독은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나라 건 자국의 역사 교육은 집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하게 중요한데, 그걸 잘 안 챙기고 있어 불만이 있었다"며 "친일파는 역사의 찌꺼기"라고 했다. 그 찌꺼기들이 역사적으로 합당한 평가를 받도록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화 밖 세상에서 <암살>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퍼즐'이 될 것이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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