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서울 코리아나 호텔에서 열린 20회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올해 영화제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

25일 오후 서울 코리아나 호텔에서 열린 20회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올해 영화제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 ⓒ 부산영화제


"돈은 없지만 가오(폼)는 지키겠다." (김지석 프로그래머)

올해로 스무 살 청년이 되는 부산국제영화제(이하 영화제)의 특징은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이용관 집행위원장 역시 25일 서울 중구 태평로1가의 한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예산은 없지만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말로 개막을 앞둔 각오를 밝혔다.

올해 상영작은 지난해보다 10편 줄어든 75개국 304편이다. 영화제를 통해 첫 공개되는 영화를 의미하는 '프리미어 작품' 역시 121편으로 전년대비 13편 감소했다. 영화제의 대표적인 경쟁 부문인 '뉴 커런츠'에 출품된 작품 수도 전년에 비해 3분의 1이 축소됐다. 

이는 영화제가 지난해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한 뒤 외압에 시달려온 여파가 만만치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래서인지 이날 기자회견에서 영화제 측은 20회를 맞는 감회보다는 '가오'와 자존심을 내세우며 영화제의 독립성을 지켜내면서 생존하겠다는 의지를 더 강조했다.

외풍의 후유증 : 허리띠 졸라매기

매해 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작품 수가 총 300편 안팎이었던 만큼 올해 상영작 수 304편은 전년 대비 감소폭으로 볼 때 소폭이라고 볼 수 있지만, 영화제가 20회를 맞이했다는 상징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는 2005년 10회를 성대하게 치러낸 것과 뚜렷히 대비된다. '좌파 공격'을 받았던 2009년에도 영화제의 예산이나 규모는 도리어 커진 바 있다.

영화제가 스무 살이 되는 의미 있는 순간에 주최 측이 '잔치'는커녕 허리띠를 졸라매겠다고 다짐하는 현실은 현 정치권력의 문화적 후진성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평가된다. 결국 영화제의 독립성을 훼손하려는 정치권력의 의지와 조직위원장으로서 영화제를 흔들어 댄 서병수 부산광역시장의 합작품이라는 것이 영화인들의 비판이다.

강수연 공동집행위원장은 "우려에 대해 알고 있다"면서도 "앞으로 20년을 어떻게 만들어 갈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래를 위해 영화제만의 행사를 다져갈 때"라는 말로 현 상황에 대해 아쉬움을 우회적으로 나타냈다. 지금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 앞으로의 영화제를 잘 준비해 나가겠다는 의미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지원 예산 삭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인정했다. 다만 그는 "아시아필름마켓의 경우 (영화제가) 특별히 신경 써 줄 것을 요청해 부산시가 후원을 받도록 협조해 주고 있고 영화계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부산시는 경제부시장이 나서 지역 기업들의 지원을 물색해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없다는 것이 영화제 실무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아시아필름마켓을 담당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배급사 NEW(뉴)에서 상금 지원 형식으로 도움을 주기로 했다"면서 "전체적으로 2억 정도 예산이 증가할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규모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부산시 쪽에서 결손이 생기면 채워주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결손이 생길 경우 운영 책임을 물을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시 예산으로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며 "외부 후원을 알아봐 준다고는 해도 영화제 운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일부에서는 부산시가 감당해야 할 부분을 지역 기업에 떠넘기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시에서 영화제를 후원할 기업체를 물색해 줄 수는 있겠지만, 상황에 따라 압박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남식 전임 시장 시절 부족한 영화제 예산을 대폭 증액한 것과도 비교되는 모습이다.

지난 10회의 경우 관객들을 위한 프로그램 등이 풍성했으나, 20회를 맞는 올해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많이 사라졌다. 한 실무 관계자는 "특색 있는 관객 배려 프로그램 등을 준비하고 싶었지만 올해는 (감사 등으로) 워낙 시달린 탓에 현실적으로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집행위원장 사퇴 압박과 예산 삭감, 감사 등 전방위적 정치 공세로 인한 영화제의 상처가 더욱 커 보인다.

이 와중에 기존 스폰서 기업의 후원도 끊길 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에는 주요 스폰서로 참여하고 있는 포털사이트 다음이 지원 철회 의사를 밝혀오면서 영화제 내부적으로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2010년부터 후원을 시작한 다음은 지난해(3억 원)를 제외하곤 매해 5억 원을 후원해 왔다. 이와 관련해 영화제 관계자는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 등이 나서는 등 노력 끝에 후원 주체만 다음이 아닌 카카오프렌즈로 변경됐다"면서 "후원 액수는 지난해와 같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에서 드러나는 자존심

 20회 부산영화제 개막작 인도영화 <주바안>(위), 폐막작 중국 영화 <산이 울다>

20회 부산영화제 개막작 인도영화 <주바안>(위), 폐막작 중국 영화 <산이 울다> ⓒ 부산영화제


이 같은 난관에도 영화제의 자존심은 마련된 프로그램에서 드러난다. "작품 선정은 '가오'를 중심으로 했다"는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말처럼 거장과 중진, 신진 감독들의 신작과 고전 등이 다양하게 구성됐다. 개막작은 인도 영화 <주바안>, 폐막작은 중국 영화 <산이 울다>가 각각 선정됐다.

또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을 비롯해 중국의 지아장커,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이 거장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갈라 프리젠테이션'에 포진했다. 다만 '갈라 프리젠테이션' 부문에 진출한 한국 영화가 1편에 불과하고 프리미어 작품 역시 1편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경쟁 부문인 '뉴 커런츠'에서는 유명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정성일 감독의 작품인 <천당의 밤과 안개>가 눈길을 끈다. 중국 다큐멘터리 감독 왕빙의 촬영장을 찾아 그 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영화로 다큐와 극영화가 혼합된 작품인데, 상영 시간만 4시간에 가까운 장편이다.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선 제주 4.3 항쟁 영화 <지슬>로 주목받았던 오멸 감독이 신작 <눈꺼풀>을 내놓는다. 섬에서 떡집을 하는 노인의 일상을 그린 작품인데, 지난 여름 거제도 등지에서 촬영했다. <둘 하나 섹스>의 이지상 감독이 오랜만에 내놓는 신작 <미쓰 리의 전쟁. 더 배틀 오브 광주>도 1980년 5월의 광주를 색다른 스타일로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이다.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에서는 <국제시장>과 <암살>, <베테랑> 등 기존 흥행작들과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 홍원찬 감독의 <오피스> 등이 상영 목록에 올라 있다.

'월드 시네마' 부문에서는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은 <사울의 아들>(헝가리)과 에디오피아를 배경으로 한 휴머니즘 영화 <양>이 주목받고 있다.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독일)는 나치 전범을 처벌하려는 검사의 집념을 다룬 첩보영화다.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한 우리의 현실에 교훈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단편과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와이드 앵글'에선 김태용 감독과 민용근 감독의 신작 단편과 함께 배우들의 연출 도전작들이 시선을 모은다. 배우 문소리는 여배우를 주제로 한 3부작의 완결편인 <최고의 감독>을 부산에서 공개하며, 윤은혜는 단편 영화 <레드아이>의 감독으로 부산을 찾는다.

지난해 <다이빙벨>로 상징되던 '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의 경우 올해 수위가 많이 낮아졌다. 홍효숙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램 선정에 눈치는 보거나 한 것은 아니다"면서 "문제의식 있는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했으나 마땅한 작품이 없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 부문에서 주목되는 작품은 강석필 감독의 <소년, 달리다>다. <소년, 달리다>는 2012년 <춤추는 숲>에 이은 성미산 마을 연작 두 번째 작품으로, 성미산 마을 공동체에서 자란 두 청년의 성장 과정을 담은 영화다. 또 '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 선보이는 <세라자드의 꿈>은 이집트 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로 아이디어와 구성이 뛰어나다는 것이 영화제 측의 설명이다.

야외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오픈 시네마' 부문에선 지난해 상영작인 <위플래쉬>의 흥행에 힘입어 대중성을 한층 강화해 인도의 흥행작 <전사 바후발리>와 <카쉬미르의 소녀>,  중국에서 흥행하고 있는 <몬스터 헌트> 등 흥행성 짙은 작품들로 구성됐다.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88년 제작한 <이웃집 토토로> 역시 야외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9회 연속 매진을 기록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드나잇 패션' 부문에선 공포와 호러 스릴러 영화들을 준비해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이 밤을 잊게 만들 전망이다. '특별기획 프로그램' 부문에선 아시아 영화를 대표할 수 있는 고전 10편과 부산영화제의 오랜 우호국인 프랑스의 영화들이 준비됐다.

 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되는 오멸 감독의 신작 <눈꺼플>과 강석필 감독의 신작 <소년, 달리다>

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되는 오멸 감독의 신작 <눈꺼플>과 강석필 감독의 신작 <소년, 달리다> ⓒ 부산영화제


해외 영화인들 "부산에 힘 보태겠다"

올해 영화제를 둘러싼 국내의 정치적 탄압이 알려지면서 해외의 관심은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이 영화제 관게자들의 설명이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비록 올해 (해외 영화인들을) 초청할 예산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해외에서 영화인들이 부산국제영화제의 20년을 축하해주기 위해 예년보다 더 많이 부산을 찾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해외 출장 등에서 만난 여러 해외 영화인들이 부산국제영화제가 처한 어려움을 잘 안다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며 "자비로라도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힘을 보태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심지어는 부산국제영화제 20회를 축하하는 리셉션을 따로 열겠다는 해외영화인과 단체도 있다"면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 국내외 영화인들의 방문의 의미는 각별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 1일 개막해 10일까지 열흘간 개최된다. 개폐막작 예매는 9월 22일에, 일반상영작 예매는 9월 24일에 시작된다.

 20회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20회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 부산국제영화제



부산영화제 이용관 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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