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20회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 부산국제영화제


"작품성 외에는 어떤 다른 요인도 고려하지 않겠다."

지난 6일 서울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기자간담회에서 강수연 공동 집행위원장이 밝힌 올해 부산영화제의 상영작 선정 방향은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된다. 강 위원장은 '<다이빙벨> 상영 중단 압박과 같은 상황이 재발할 때 어떤 판단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뭘 우려하는지 알고 있다"며 "정치적 잣대 대신 영화적 잣대"를 강조했다.

이는 지난해 논란이 일었던 <다이빙벨>이 부산영화제에서 당연히 상영해야 하는 영화였고, 앞으로도 '작품성에 따라 상영할 만한 작품을 상영하겠다'는 부산영화제의 기조는 변함없을 것임을 천명한 셈이다. 정치적 간섭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 역시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강 위원장은 이날 "부산영화제가 그동안 정치적 망명을 다니는 감독의 영화나, 해당 국가에서 외부유출을 금지한 영화 등을 꾸준히 상영해 왔다"며 지난 역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이란의 거장 모흐센 마흐발바프 감독은 조국을 떠나 망명생활을 하고 있고, 1회 때 중국 장위엔 감독은 중국에서는 상영되지 못하는 <동궁서궁> 필름을 들고 직접 부산을 찾기도 했다. 지금껏 이어진 부산영화제의 정체성이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없는 출구 전략은 기만일 뿐"

 2014년 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막선언을 하고 있는 서병수 부산시장

지난해(2014년) 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막선언을 하고 있는 서병수 부산시장 ⓒ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초 부산광역시로부터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사퇴 압박을 받았다며 정치적 탄압 논란을 일으켰던 부산영화제가 개막을 한 달 반 정도 남겨 놓은 상태에서 부산과의 갈등을 정리하는 분위기다. 강수연 공동집행위원장과 이명식 부집행위원장의 선임이 명분이 됐다. 서병수 부산광역시장은 지난달 30일 영화단체 대표자들을 부산으로 초대해 만찬을 베풀며 그간 빚어졌던 영화계와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수순을 취했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6일 기자간담회에서 "30일 만찬 때 시장님이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당일 만찬에 참석한 영화단체 관계자들은 "부산시장이 올해 행사를 잘 치르고 싶다는 뜻을 나타냈다"면서 "시장이 지난 일은 덮고 가자는데 뭐라고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전했다.

부산 지역의 한 영화 관계자는 "(부산시에서) 영화계의 반발이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며 "영화제 개막이 다가오면서 계속되는 논란에 부담을 느꼈는지, 출구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영화단체의 한 관계자는 "부산시가 총애하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나 <해운대>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 등도 영화계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이용관 집행위원장 퇴진에 부정적 입장을 나타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두 감독은 서병수 시장이 최근 참석하는 영화 관련 행사 때마다 함께하고 있는데, 30일 만찬에도 자리를 같이 했다. 

하지만 영화계 일각에서는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킨 부산시장의 '어물쩍'한 태도는 용납할 수 없다는 기류도 강하게 일고 있다. 부산영화제의 독립성을 훼손시키려 했던 태도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지금과 같은 부산시의 태도는 기만적인 술책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강수연 공동집행위원장이 공식적인 첫 기자간담회에서 '프로그램 간섭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의 발언을 남긴 것도 영화계의 이 같은 기류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해 <다이빙벨> 상영 중단 압박 논란이 생겼을 때도 강 위원장이 개인적으로 상당히 분개했다는 것이 영화계 인사들의 전언이다.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대책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제작배급사 관계자는 "서병수 부산시장이 정치인으로서 논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 도리인데, 저런 식으로 유감 표명 없이 대충 넘기려는 것은 한국 영화계를 우습게 보는 오만한 태도"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올해 부산영화제 기간 중 영화인들이 시위 등의 구체적 행동을 통해 영화계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1월부터 지속적으로 자행된 부산영화제 흔들기 등 표현의 자유 위협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산 지역 영화 관계자들 역시 "이번 논란 과정에서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몰아내려는 것이 핵심이었다면 부산시가 얻어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올해 영화제가 끝나고 어떤 술수를 쓸지 알 수 없다"고 우려했다.

"믿고 지켜봐달라"는 부산시

 지난 6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입장을 밝히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지난 6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입장을 밝히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 민원기


이에 대해 부산시 측은 일단 "지켜봐 달라"는 입장이다. 부산영화제를 담당하고 있는 박종일 영상콘텐츠친흥팀장은 "시장님이 올해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애쓰고 계신다"며 "영화인들이 믿고 지켜봐 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팀장은 '부산시장이 앞으로는 프로그램에 대한 간섭이나 외압을 행사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시장님 속마음을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며 확답을 피했다.

부산 지역의 중견 영화계 인사는 이를 두고 "부산영화제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그간 영화제를 오래 봐왔기에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시장의 뜻에 따라 입장이 돌변해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뽑아내겠다(사퇴시키겠다)고 적극 나섰던 인물들"이라며 "말하는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고 비판했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김세훈, 이하 영진위)가 부산영화제 예산을 과도하게 삭감해 커다란 논란이 일었는데도, 부산시가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보인 것도 신뢰감을 떨어뜨린 요인 중 하나다.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부산시는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했으나 지역 인사들 사이에서도 영화계가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김종국 영진위 부위원장에 대한 비난이 일고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부산시는 이 같은 안팎의 비판을 의식한 듯 최근 지역 기업들이 부산영화제 스폰서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족한 예산을 간접적으로나마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실제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안은 없다는 것이 부산영화제 측의 이야기다. 부산영화제의 한 실무 담당자는 "말은 있는데 실제 피부로 느낄만한 사안은 없고, 부산시의 지원금 역시 다달이 신청해서 쓰는 방식으로 돼 있어 영화제 운영에 어려움이 크다"라며 "지켜봐야겠지만 더 이상 괴롭히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불씨

이 외에도 부산 지역 영화인들 사이에서 "'방송 마피아'라고 불리는 지역 토호 세력들이 이번 논란 과정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부산시가 임명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이명식 부집행위원장 역시 부산 MBC와 KNN, 부산영어방송 본부장 등을 역임한 전형적인 '방송 마피아'의 일원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을 맡게 될 영화의 전당 대표 자리도 일부 지역 방송계 출신 인사들이 욕심을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에는 정권의 방송장악에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인사가 들어 있어 지역은 물론 국내 영화계 인사들도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다. 표현의 자유를 위협한 것으로 공공연히 인식되는 인물이 당연직으로 영화제 구성원이 될 경우, 잠잠했던 논란이 다시금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영화제 이용관 강수연 서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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