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연예인들의 그런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주로 우리는 간접적으로, 대중매체를 통해 그들을 만납니다. 그러기에 오해도 많고 가끔은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잊기 쉽습니다. 동시대 예인들이 직접 쓰는 자신의 이야기, '오마이 스토리'를 선보입니다. [편집자말]
무대작업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천형(天刑)입니다. 현실 너머를 엿본 자는 현실에 발붙일 수도,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영원히 저공비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에 날개가 녹을 것이고, 발을 땅에 대는 순간 유랑은 끝이 납니다.

28살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우연히 시작한 연극은 2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하며 제 삶의 필연이 되었습니다. 길거리 포스터 부착부터 연기, 연출, 극작까지 다양한 작업 속에서 연극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읽게 되었습니다. 객석에서 무대를 보지 않고, 무대에서 객석을 바라보는 저공비행의 풍경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배우 김경익 드림>

 배우 김경익이 연출한 연극 <아리랑 랩소디>. 그는 현재 극단 '진일보'를 이끌고 있다

배우 김경익이 연출한 연극 <아리랑 랩소디>. 그는 현재 극단 '진일보'를 이끌고 있다 ⓒ 극단 진일보


2012년 극단을 창단하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의욕만 넘치던 초보 연극제작자 나의 시행착오 때문이었다. 대학로 연극의 흥행공식(5명 이상 출연금지, 로맨스, 해피엔딩)을 철저히 외면한 채 첫 정기공연이 시작되었다. 제목은 촌스러운 <아리랑랩소디>였고, 소극장 연극에 출연진은 14명이었고, 바보광대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인정받을 것 같던 공연은 계속 빚으로 이어졌고, 난 다른 매체의 출연료를 몽땅 들이부어야 했다. 그러나 대관료, 인쇄비 외에도 20여 명에 이르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식대와 최소한의 출연료를 혼자서 마련하기에는 숨이 턱에 찼다. 그러던 중 감사하게 한 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았다.

제일 먼저 제작팀에게 부탁한 것은 출연료의 선 지급이었다. 조건 없이 묵묵히 같이 해준 배우들에게 차비라도 빨리 챙겨줘야 했다. 담당 PD도 공연을 보고 "출연자가 많아서 고생하겠다"며 위로하고 돌아갔다. 여기까진 희극이었다.

대박을 친 영화사와 소송 걸릴 뻔했던 사연

 배우 김경익, 2004년 연극 <햄릿> 출연 당시

배우 김경익, 2004년 연극 <햄릿> 출연 당시 ⓒ 김경익 제공


연습 두 번 하고 촬영도 못해보고 잘렸다. 캐릭터랑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연기 생활 20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했다. 그러려면 왜 오디션도 없이 날 캐스팅했는지 따지고도 싶었다.

그보다 더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것은 "괜히 연출하고 제작하면서 연기가 안 좋아져서 잘렸다"던 공연 참여 배우의 뒷담화였다. 오방떡을 팔아도 20년 넘게 열심히 하면 전셋집이라도 구할 텐데 난 왜 이 짓을 놓지 못할까?

2회 연습출연분과 촬영 전 계약 취소시 20%를 공제한 계약금을 상환해야 했다. 하지만 계약금은 연극제작에 다 때려 넣었고, 난 고스란히 채무자가 되었다. 전후 사정을 알고 있던 담당 PD는 회사와 나 사이에서 중재를 했고, 그 후 50만원이건 100만원이건 생기는 대로 기를 쓰고 갚았다. 그러나 연극 작업자가 1000만원 가까운 돈을 갚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영화는 속칭 '대박'을 쳤다. 한동안 독촉 전화가 뜸해졌고 나 역시 잠시 한 호흡을 돌렸다.

얼마 전 부산국제연극제에 참가해 조명작업을 하던 중 다시 연락이 왔다. 영화사 부사장이란 이가 까칠한 목소리로 회사측에서 기다려 줄만큼 기다렸으니 대출을 받든 뭘 하든 잔금을 갚으라고 했다. 구체적 날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민사소송을 하겠다고 친절히(?) 알려줬다.

덜 가진 인간에 대한 배려...철없는 딴따라의 셈법일까

 지난 19일 서울 성북구 한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연극배우 고 김운하씨

지난 19일 서울 성북구 한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연극배우 고 김운하씨 ⓒ 극단 신세계 페이스북


내가 진 빚은 마땅히 내가 갚아야 한다. 그게 옳다. 이 낯부끄러운 경험을 올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받아야할 돈 받고, 줘야할 돈 주는 과정이지만 덜 가진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을 순 없는 것일까? 자본에는 인간에 대한 온기가 스며들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연극 딴따라의 셈법일까?

이 생각까지 이르자 문득 '나 스스로는 덜 가지고 약한 사람의 비명에 귀 기울였는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 억울하게 수장(水葬)당한 생명들을 위한 투쟁, 성소수자들, 이주노동자들, 탈북자들...아니, 더 가까이 있는 내 이웃의 소리 없는 절규를 모르는 척 하고 살지 않았던가? 나도 살기 바쁘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하지 않았던가?

나의 고통은 배려 받길 원하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다면 그건 양심의 피가 식었다는 증거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다면 그만큼 남을 먼저 대접해야 한다. 그게 인간됨의 원칙이다. 그렇다. 인간은 그냥 살아가는 인간(Mensch-sein)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가는 것(Mensch-werden)이다.

6월 19일 오전 연극배우 김운하(본명 김창규, 40)씨가 성북구의 한 고시원에서 외로운 최후를 맞이했다. 연기밖에 모르던 그의 한 평 반 좁은 방에는 소주병 몇 병이 있었단다. 나 역시 고시원 생활 경험자다. 그 좁고 답답한 고시원의 불면을 잠 재워줄 그 초록색 병의 물약(?)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대학로 어느 막걸리집 구석에서 앉아있던 그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그 죽음의 공범이고 방조자다. 그의 죽음은 먹먹해짐을 넘어 통증으로 다가왔다.

"왜 힘든 연극 계속 하느냐고 묻지 않았으면"

 배우 김경익이 연출한 연극 <바보 햄릿>

배우 김경익이 연출한 연극 <바보 햄릿> ⓒ 진일보


왜 그렇게 힘든 연극을 계속 하느냐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극은 삼성도, 현대도, 애플도 만들지 못하는 재미와 감동이란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다. 잘 사는 방법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것이 이번 생의 소명(召命)임을 믿기 때문에 힘들어도 버티며 꿈꾸는 것이다. 먼저 간 후배에게 이제 편안히 쉬시라고 바보 광대의 유언 대사 하나 올리고 싶다.

명이 다하든 우연히 죽든지, 내가 죽을 때,
내 주머니에서 돈 같은 것이 발견되거든,
그 돈으로 배우들은 내 영혼을 위해 술을 마실지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내게는 이 죄 많은 몸뚱이 하나뿐이나,
그것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
이제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리라.
한줌의 재나 먼지로!
단 하나 소원이 있다면
나의 해골은 어느 극단의 소품으로 쓰여지기를
햄릿이 해골을 들고
"이 해골도 언젠간 혀를 가지고 있었고 한때는 노래를 불렀겠지"
말할 때마다,
나는 너희 가슴속에 부활할 것이다.

다행히 지인의 도움으로 7월 초에는 그 영화사에 잔금을 모두 갚을 것이다. 속칭 영화산업의 중심에 진입했다는 그들에게 나즈막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신의 통장에는 아직 12만원이 남아 있습니다!'

* 배우 김경익의 '무대에서 저공비행' 5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마이스타'들이 직접 쓰는 나의 이야기 - 오마이스토리

[김경익 '무대에서 저공비행' 3편] 박지성의 '발 연기', 나의 교만이 떠올랐다
[김경익 '무대에서 저공비행' 2편] 연기를 하고 싶어? 단 하나...곱게 미쳐라!
[김경익 '무대에서 저공비행' 1편] 맥주잔이 소주잔 부러워하면 '골로' 간다, 하지만!
[이정수 '소프라이즈' 2편] 내 아이 이름짓기, 호랑이 엄마에게 양보받기 '작전'
[이정수 '소프라이즈' 1편] 만삭의 아내, 그 배에 보드마카로 이렇게 썼다
[최윤영 '나의 꿈 나의 의리' 2편] 일산에서 '한미모'했던 나, 무서운 선배 만나 '엉엉'
[최윤영 '나의 꿈 나의 의리' 1편] 초등학교 동창, 김준수와 은혁 사진 보실래요?

○ 편집ㅣ이정환 기자


김경익 김운하 고시원 연극 아리랑 랩소디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