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스 벡델이 연재하던 만화 속 등장인물의 대화에서 고안된 '벡델 테스트'는 영화 속 성 평등을 가늠하는 데 사용되는 기준 중 하나다. 이 테스트에서 A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2명 이상 등장해야 하며, 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눠야 하고,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가 남자 이외의 것이어야 한다. (벡델 테스트의 기준을 만족시킨 영화와 그렇지 못한 영화의 목록은 http://bechdeltest.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대부분의 영화가 이 기준을 간단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충격적이게도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국내외 저명한 인사들이 꾸준히 지적해왔듯, 영화계가 점점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위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탓에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을 맡거나 여성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졌다. 영화 속 여성들은 대개 피해자, 희생자, 팜므파탈 등 몇 가지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비슷한 직업을 가진 영화 안의 그녀들은 남성의 보호를 받거나, 남성의 사랑을 쟁취함으로써 해피엔딩을 맞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2013년 배우 리즈 위더스푼은 직접 제작사를 차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자 배우들이 "형편 없는(really crappy) 역할을 가지고 다투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보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와 그녀들이 활약하는 이야기들을 발굴하기 위해 여성이 나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문소리나 김혜수 등의 베테랑 배우들이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계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 큰 공감을 얻은 바 있다.

한편 이 벡델 테스트에도 허점은 존재한다. 기준이 다소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바람에 여성 원톱 주연 영화들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무적이다. 분명 남성 주인공, 남성 중심의 이야기들이 영화 및 문화 콘텐츠의 팬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이야기판에서 여성의 존재를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조성된다든가, 여성을 도구화하는 움직임이 멈춰지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다. 심지어 과도하게 강조되는 상업성 때문에 남성들의 이야기조차 매우 식상한 것들로 변질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이 개선될수록 소비자들은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고, 미디어가 조성하는 편견에서 비롯되는 차별 역시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래서 2015년 상반기에 개봉한 영화 속 여성 주인공들이 더욱 반갑다. 영화 <와일드> <스틸앨리스> <차이나타운>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스파이> <피치퍼펙트> 등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최근작들을 소개한다.

<와일드> 셰릴 스트레이드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20세기폭스코리아


'못이 되느니 망치가 되리'라는 O.J. 심슨의 말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말로 절정을 맞는다.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 분)는 자신의 몸집보다 큰 배낭을 멘 채 '악마의 코스'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도보 여행을 떠난다. 홀로 4200km의 대장정을 떠난 그녀는 배낭 안에 눌러 담은 버리고 싶은, 버릴 수 없는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곱씹는다. 기억 속에서 셰릴을 괴롭혔던 남자들은 여행 도중에도 불현듯 등장해 그를 위협한다. 그러나 셰릴은 모두에게 편견 없이 평등한 길 위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말했던 '아름다움' '최고의 모습'을 찾아가며 내상을 스스로 치유해 나간다. 리즈 위더스푼은 인상적 연기를 통해 2015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스틸 앨리스> 앨리스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줄리안 무어 분)는 언어학계의 저명한 학자다. 의사소통의 핵심을 이야기하던 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육체의 한계를 만난다. 앨리스에게 주어진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불안감은 커진다. 평생 이뤄낸 자신의 업적과 성과들이 사라져 가는 대신 아이들에게 알츠하이머병이 발병할 수도 있는 유전자를 남겼다는 사실에 앨리스는 괴로워한다. 한때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 죽음뿐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우스워진 것은 우리가 아니고 병이다"라는 연설을 통해 '상실의 기술'을 강인하면서도 담담하게 보여줬다. 남편과 자식들의 묘사가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앨리스를 연기한 줄리안 무어는 <와일드>의 리즈 위더스푼 등과 여우주연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끝내 상을 거머쥐었다.

<차이나타운> 일영과 엄마

 <차이나타운> 한 장면. 엄마와 일영

<차이나타운>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한국 영화계에 오랜만에 등장한 여성 투톱 영화 <차이나타운>은 개봉 전부터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배우 김혜수와 김고은이 한 작품 안에서 보여줄 '케미'가 기대감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태어나자마자 코인로커 안에 버려진 일영(김고은 분)과 차이나타운의 냉혹한 대모 엄마(김혜수 분)는 이 영화에서 전에 없이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며 '여성 느와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기존 느와르물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주인공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시킨 <차이나타운>의 변주는 복선의 미흡한 소화 등 많은 빈틈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작금의 한국 영화계에 심히 부족한 '여성 영화'의 자리를 확장해 나가는 주효한 시도로 남을 것이다.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퓨리오사와 브리더들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한 장면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조지 밀러 감독이 30년 만에 <매드맥스> 시리즈를 부활시켰다. 영화 속 세계관은 이전과 유사하지만, 2015년판 <매드맥스>에서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돌출된다.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분)는 시타델의 신으로 군림한 임모탄 조(휴 키스 번 분)에 의해 젖과 아이를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브리더들을 데리고 '어머니의 땅'을 향해 질주한다. 멜 깁슨의 젊은 시절만큼 슬림하지는 않지만, 2015년의 맥스(톰 하디 분)는 그간 공고히 지켜왔던 주인공의 자리를 여성들에게 양보하며 그들의 조력자로서 한몫을 다했다.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사막을 내달리는 <매드맥스>의 여성들은 과연 인간다운 생존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스파이> 수잔

 영화 <스파이>의 한 장면

영화 <스파이>의 한 장면ⓒ 20세기폭스코리아


CIA의 내근 요원 수잔(멜리사 맥카시 분)은 전형적 스파이의 외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 파인(주드 로 분)을 위해 스파이가 될 것을 자처한다. 핵무기 밀거래를 막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적진에 숨어든 수잔은 날렵한 몸놀림과 빠른 두뇌 회전으로 혁혁한 성과를 거둔다. 자기비하를 일삼던 수잔이 점점 자신감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과 더불어 적인 레이나(로즈 번 분), 직장 동료 낸시(미란다 하트 분)와의 사이에서 보여 주는 여성들만의 끈끈한 우정도 <스파이>의 재미 요소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지만 원어로 들어도 웃음 터지는 19금 개그에도 주목해 볼 만하다. 초월 번역을 넘어서 오역으로 남은 자막에 대한 논란이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피치퍼펙트 : 언프리티 걸스> 아카펠라 동아리 벨라스

 영화 <피치 퍼펙트:언프리티 걸즈>의 한 장면

영화 <피치 퍼펙트:언프리티 걸즈>의 한 장면ⓒ UPI코리아


전작에서 정비된 여성 아카펠라 그룹 '벨라스'가 또다시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게 됐다. 미국 대통령에 생일 파티에서 끔찍한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룹 존폐 위기까지 몰린 '벨라스'는 단 한 번도 미국에 우승 트로피를 허락하지 않았던 세계대회에 출전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느덧 졸업에 가까워진 기존 멤버들은 마치 만화 <슬램덩크>의 3학년 멤버들이 전국 제패에 열을 올리듯 특훈에 나선다. 세계 각국을 막론하고 취업에 대한 젊은이들의 고민이 다르지 않다는 점도 공감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다만 위에 언급한 다른 영화에 비교하면 인종에 대한 편견들이 캐릭터를 통해 노골적으로 전시된다거나, 차별적 대사들이 넘쳐나 불편한 지점이 상당하다는 점은 <피치퍼펙트>의 한계로 지적할 만하다. 벨라스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빛을 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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