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투판에서 맞아 들어가는 패에 환호하고, 얼굴에 화장이 잔뜩 번진 채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던 김현숙은 온데간데없다. KBS 2TV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 종영 후인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마주앉은 채시라는 다시 우리에게 익숙한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의 여운만은 여전한 듯했다. "워낙 좋은 멤버들과 화합할 수 있었고, 많은 시청자가 좋아해 주셨던 만큼 끝나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더 크다"는 채시라는 "드라마를 촬영하며 현숙처럼 이런 저런 사정으로 중간에 학업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결말이 잘 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라마가 현숙이 자신의 자아를 찾고 새로운 시작을 맞는 것으로 끝나 좋았다"고 말했다.

"김현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와 희망 주고 싶었다"

- 굴곡진 삶을 살았던 <착하지 않은 여자들> 속 김현숙과 실제 채시라 사이엔 공통점이 별로 없다. 공감하기 어렵진 않았나.
"대본을 다 읽고 첫 번째로 들었던 생각은 '정말 스펙터클하고 재밌다'였다. 그런데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니 내가 김현숙을 연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왜, 시험 볼 때 '문제 속에 답이 있다'고 하잖나. 그렇게 (표현하기) 난감했던 부분은 읽고 또 읽어 가면서 현숙에게 공감하려 했다. 다행히 현장에선 모든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그대로 표현하게 되더라."

- 특히 지금의 김현숙이 고등학교 퇴학 처분이 무효라는 소식을 듣고, 과거의 김현숙과 마주하는 장면은 뭉클했다.
"'나 퇴학 아니래!'라고 외치는 그 장면에선 정말 벅차서 눈물이 났다. 드라마 말미에 그 대사를 맞이했다는 것 자체도 정말 기뻤다. 또 깜깜한 방에서 두 현숙이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도 좋았다. '공부하니까 재밌다' '나도 할 수 있었는데 왜 진작 하지 않았을까'라는 깨달음을 지금의 현숙이 그때라도 느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 하지만 일각에선 드라마 중후반이 김현숙과 박총무(이미도 분) 간의 요리 대결에 집중됐다는 점은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 와중에 김현숙이 절대 미각이라는 설정이 드러난 것도 그렇고. 여성의 자아 찾기가 꼭 요리로만 실현되는 건 아니지 않나. (웃음)
"만약 현숙이 엄마 강순옥(김혜자 분)의 뒤를 이어 '안국동 김 선생'이 됐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현숙은 '나말년(서이숙 분)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며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청소년들을 돕는 상담가가 되지 않았나. 박총무에게도 '나는 학생 팬이 많아 (요리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하니까. (웃음) 그런 점에서 더 마음에 드는 결론이었다."



- 모든 촬영을 마친 지금 돌이켜 봤을 때,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누구였을 거라 생각하나.
"모두 다였다. 그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면서 착한 여자들이 되어 가는 게 결론이었고.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원망이나 미움 같은 것들을 극복하고 고쳐 가면서 착하지 않았던 여자들이 착한 여자들로 거듭나는 것이 드라마의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 그 중에서도 가장 착하지 않았던 여자를 꼽아 보자면.
"드라마 중반까진 나말년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말년은 알면 알수록 상처가 많은 사람이더라. 자식인 장마리(이하나 분)와 이루오(송재림 분)가 얽히면서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그래서 '가장 착하지 않았던 여자'는 마지막에 가장 큰 사건을 일으킨 박총무인 것 같다. 물론 그조차 마지막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다시 강순옥에게 돌아왔지만 말이다."

"언제나 대중에게 배우의 새로운 매력 발견할 기회를 줘야 한다"

-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김현숙이라는 인물이 어떤 점에서 매력적이라 생각했나.
"캐릭터 자체가 굉장히 입체적이었다. 살아서 팔팔 뛰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물론 김현숙과 같은 사람을 실제로 자식이나 형제로 둔 분들은 무지하게 피곤하겠지만, 연기하는 입장에선 즐거움이 크겠다 생각했다. 그동안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주로 보여드렸지만 현숙이는 다분히 옆집 엄마, 누나, 아줌마 같은 느낌이지 않나. (대중에게) 더 친밀하게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하지만 점점 여배우들이 누군가의 엄마, 아내 등의 역할만 맡게 되는 현실에서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주로 연기해 온 채시라라는 배우는 분명 두드러져 보였다. '카리스마와 강인함'을 자신만의 특장점으로 계속 선보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웃음) 너무 보여주지 않았나. 계속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고, 뻔해 보일 것 같았다. '저 배우는 저런 역할만 가능하구나'라고 판단받지 않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시청자에게 지루함이 없을 거다 싶었다. 언제나 '저 배우가 저런 매력이 있구나'라고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친근한 느낌의 역할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발견돼서 반가운 마음이었다."


- 이순재를 비롯해 김혜자나 장미희 같은 쟁쟁한 선배 배우와 함께 한다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제작발표회나 기자간담회에서 꼭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을 놓치지 않더라.
"그 많은 배우들 중에 함께 만나 작업한다는 건 굉장한 인연이다. 활동하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실제로 나도 30년 넘게 연기를 했지만 김혜자 선생님은 (작품에서) 한 번도 못 만났다. 그러니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그 분과 눈을 맞추고 대사나 장면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흥분되더라. 촬영 기간 동안 많은 말씀은 아니었지만, 선생님께서 순간의 느낌 같은 것을 말씀해 주실 때 와 닿는 게 많았다."

- 여기까지 들어 보면, 결론적으로 채시라가 <착하지 않은 여자들>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맞다. 처음 시놉시스를 받고 떨리고 설레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까지 2~3년간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 시놉시스를 받았지만, 감흥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비슷하네' '별로네' '재미없네' 그런 정도였다. 그런데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달랐다. (시청자)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언제 또 이렇게 훌륭한 선배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싶어 흥분도 컸다. 더군다나 가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인데 미니시리즈로 편성됐다는 것도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내 것이 되려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 이제 이 인터뷰가 끝나면 <착하지 않은 여자> 김현숙과도 작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처음의 의도를 놓치지 않고 좋은 드라마로 인사드릴 수 있어 기뻤다. 요즘 같은 때에 시청률도 12%나 나왔다는 건 24% 정도의 가치가 있는 굉장한 일이라 생각한다. (웃음) 또 '앞으로도 많이 회자될 작품이다' '드라마를 보며 힐링을 받았다'는 평을 받은 일도 뿌듯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작품을 마쳤을 때 일반적으로 받았던 느낌과는 다른 차원의 느낌이 남아 있다. 열린 결말을 만들어 놓은 만큼 '다시 한 번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 드라마의 배우들과 스태프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 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다."

* 채시라 인터뷰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