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무뢰한>의 오승욱 감독이 2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무뢰한>의 오승욱 감독이 2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전도연과 김남길의 만남이 성사되기까지 오승욱 감독의 긴 기다림이 있었다. 약 10년 동안 묵힌 영화 <무뢰한>이 세상에 나올 줄, 게다가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까지 진출할 줄 예상이나 했겠는가. 지난 22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오승욱 감독은 "끝내 영화로 만들어 내겠다는 인내심밖에 남지 않았었다"라고 말했다. 

본래 <무뢰한>은 2005년 무렵 박찬욱 감독의 제작사인 모호필름과 작업하기로 돼 있었다. 시나리오를 내놓고 1년이 지났지만 마땅한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절친했던 투자자마저 <무뢰한>을 확신하지 못해 '오승욱 프로젝트'라는 가제를 달고 기다려 보자고까지 했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각본을 쓰고, <킬리만자로>(2000)를 통해 화려하게 연출 데뷔를 한 그였지만 <무뢰한>을 쉽게 시작할 수가 없었다.

독특한 작업 방식...모든 건 미술감독과 함께 시작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무뢰한>을 두고, 작품 감성이 지금 공감을 얻기엔 너무 구식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살인범을 쫓는 형사(김남길 분)와 범인의 애인이자 룸살롱 마담으로 희망을 잃고 살아온 여자(전도연 분) 간에 미묘한 사랑이 관객에게 통하겠냐는 의문이었다.

오승욱 감독 역시 그 점을 인정했다. "그 시간 동안 룸살롱 문화는 좀 바뀌었다더라"며 재치 있게 운을 뗀 오 감독은 "소재나 감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을 표현하는 방식이 구닥다리일 때가 오히려 구식"이라며 "<무뢰한>을 통해 인물의 고통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한다면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공감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답했다.

결과적으로 <무뢰한>은 국내외 외신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세밀한 설정과 자세한 묘사의 힘이었다. 본래 오승욱 감독의 시나리오는 그만큼 자세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여타 영화의 각본보다 그의 각본엔 유독 지문의 비중이 높은데, 작품을 구상할 때 미술감독과 함께 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킬리만자로> 때부터 고수해온 그만의 작업 방식이다.

 영화<무뢰한>의 오승욱 감독이 2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작품에 대한 뒷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 이정민


"모든 시작은 박일현 미술감독과 같이 한다. <킬리만자로> 때도 함께 버스타고 다니면서 작품을 써갔다. 언젠가 박 감독이 차를 샀기에 그 차를 얻어 타고 다녔는데 초보를 끌고 산동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한 번은 남의 집 담벼락을 받는 사고도 났다. 그저 작품 생각만 한 내 탓이지(웃음).

<무뢰한>을 쓰면서도 인천 지역을 돌았다. 극 중 인물이 살만한 아파트를 찾았고, 상당 부분 그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는데 영화가 오랜 시간 제작되지 못하지 않았나. <킬리만자로> 때도 1년 동안 기다려준 친군데 <무뢰한> 때는 도저히 못 하겠다고 다른 영화 계약이 돼 있다고 미안하다더라.

할 수 없었지. 나도 다른 미술감독을 찾아보겠다고 하고 헤어졌는데, 그로부터 이틀 뒤에 '너 없인 도저히 영화 못 찍겠다. 그냥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으니 현장에만 있어달라'고 내가 사정했다. 그 친구도 역시 형과 헤어지는 건 아닌 거 같다며 오히려 자기 부사수를 데리고 왔다. 덕분에 난 두 명의 미술감독과 작업한 거지!"(웃음)

지문과 묘사로 가득한 각본이라지만 주제의식은 명확했다. <무뢰한>의 주제의식을 명료하게 설명해달라는 부탁에 오승욱 감독은 "치사하고 비열한 인간들 사이에서 종잇장처럼 얇은 인간의 예의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운명 같았던 영화..."포기의 유혹 물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15년 동안 두 작품은 너무해 보였다. 한 번 완성한 각본은 꼭 영화로 만들어 낸다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지만 그만큼 자연인으로서의 삶은 피폐해지기 십상이다. <무뢰한>도 최초로 각본을 완성한 이후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약 40번을 고쳤단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의 끈기 가지곤 어림도 없어 보인다.

"(웃음) 천성이 워낙 놀고먹는 걸 좋아해서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그냥 버텼지. 물론 위기는 있었다. 그래도 각본은 꾸준히 썼다. 2년에 한 작품씩은 꼭 써왔다. 그 중엔 허진호 감독의 영화도, 이현승 감독의 영화도 있다. 이것들도 아직까지 영화화가 안 됐다. 이러다가 내 영화를 영영 못 만드는 게 아닌지 생각이 들어서 진지하게 전업을 고민하기도 했다. 영화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가르쳐 왔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학생들에게 별 도움을 못 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 그러던 차에 한재덕 대표(<무뢰한>의 제작사 대표)와 이상윤 총괄(<무뢰한> 투자배급 담당)이 나타난 거다."

 영화<무뢰한>의 오승욱 감독이 2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작품에 대한 뒷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 이정민


포기의 유혹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가 그에겐 첫사랑 같았기 때문이다. 조소학과 출신인 오승욱 감독은 남들이 졸업 작품에 집중했던 때에도 일주일에 3일은 극장에서 살았다. "조각은 잠시 안 해도 괜찮았지만 영화를 안 보면 미칠 것 같았다"고 오승욱 감독은 당시를 회고했다.

특별히 감독에 뜻은 없었지만 영화가 좋아서 졸업 후 바로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로 들어갔다. 오승욱 감독은 "그 분 밑에 있으면 반드시 영화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며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그 분에게 배웠고, 다행히 박광수 감독님이 내 시나리오를 칭찬해주셨다. 그 힘으로 지금까지 영화를 해올 수 있는 거 같다"고 말했다.

스쳐온 작품 이야기를 하던 중 오승욱 감독이 한 가지를 강조했다. 어느 외국 시를 인용하며 "권총이 장전돼야 총알을 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반드시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선 장전된 채로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길고 긴 기다림 속에서도 그는 늘 작품으로 장전하고 있던 감독이었다.

오승욱 무뢰한 김남길 전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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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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