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앨리스 메인 포스터

▲ 스틸 앨리스 메인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죽음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 칼릴 지브란

알츠하이머 환자는 산 채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다. 일단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기억력, 인지기능, 언어능력이 떨어지고 마침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치매 증상으로 이어진다. 기억이 사라지고 현재를 잃어버린 환자들에겐 내일도 없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잃어 몸은 살았으나 정신은 죽어버린다.

죽음이란 단순히 육체가 사망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속했던 모든 곳에서 나의 자리를 잃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 이 역시 죽음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의 주인공 앨리스는 러닝타임이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죽어간다. 말과 기억,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까지 잃어가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마치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래조각을 보는 것만 같다.

세상에 어느 알츠하이머 환자가 자신이 그 병에 걸릴 것이라 생각했을까. 대비할 수도, 대응할 수도 없는 침공 앞에서 환자와 가족들은 참담한 현실을 마주한다. 영화는 이제 막 50세가 된 앨리스의 생일날 저녁을 비추며 시작된다. 인정받는 언어학자이자 사랑받는 아내,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성공적이었는지가 초반 15분 동안 그려진다. 그리고 영화는 단번에 그녀를 나락까지 추락시킨다.

스틸 앨리스 앨리스(줄리안 무어 분)와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

▲ 스틸 앨리스 앨리스(줄리안 무어 분)와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 ⓒ 그린나래미디어(주)


"난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다고! 내 두뇌가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내가 평생 동안 해오던 것들이 떠나가고 있어!"

알츠하이머에 걸렸을리가 없다며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남편에게 앨리스는 거의 토하듯 소리친다. 공들여 빚어온 자신의 인생이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임을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후 그려지는 앨리스의 모습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매일 거닐던 캠퍼스 한 가운데서 길을 잃고 강의 도중 익숙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하며 급기야는 바지에 실례를 한다. 인정받는 언어학자로 수십 년을 살아온 그녀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던 그 순간, 집안 화장실도 찾지 못하게 된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토록 사랑하던 딸 리디아조차 알아보지 못하던 순간, 그녀는 대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영화는 질병을 소재로 삼은 다른 할리우드 영화들과 전개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감독은 앨리스의 과거와 현재를 극적으로 포장하는 대신 그녀와 가족들이 겪는 순간순간을 정면에서 차분하게 찍어내는 데 집중했다. 앨리스가 자신의 병이 자식들에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고 슬퍼할 때조차도 카메라는 그녀와 거리를 두고 그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스틸 앨리스 루게릭병을 앓으며 연출을 맡은 리처드 글랫저 감독과 이 영화로 오스카를 거머쥔 줄리안 무어

▲ 스틸 앨리스 루게릭병을 앓으며 연출을 맡은 리처드 글랫저 감독과 이 영화로 오스카를 거머쥔 줄리안 무어 ⓒ 그린나래미디어(주)


각기 현실적인 이유로 앨리스의 곁을 지키지 않는 남편과 아들, 딸의 모습을 보여준 후 시종일관 앨리스와 대척점에 서있던 막내딸 리디아가 마침내 그녀의 곁에서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진지하게 그려낸다. 즉, 이 영화는 리디아와 앨리스가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기까지의 이야기다. 결말부에서 다소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난 것처럼 사랑의 이름으로 말이다.

영화의 원작소설을 쓴 리사 제노바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할머니를 보고 작품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어느 인터뷰에서 보호자가 아닌 환자의 관점에서 소설을 쓰고자 했다고 밝혔다.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이던 리처드 글랫저 감독이 이 소설을 접하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선연하다. 자신의 역할과 자리를 조금씩 잃어가며 때로 두려워하고 때로 절망하던 그에게 마지막 기댈 곳이 바로 가족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리디아에게 앨리스의 사랑이, 앨리스에게 리디아의 사랑이 그러했듯이.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아직 가족에게 전하지 못한 애정의 말이 남아있다면 이제라도 말했으면 좋겠다. 아직 늦지 않았을 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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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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