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냄새를 보는 소녀>의 한 장면 ⓒ SBS
2012년 방영한 이희명 작가의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는 300년 전 조선에서 현재로 온 왕세자의 세자빈 살인 사건과 진정한 사랑 찾기가 주된 이야기였다. 과거의 왕세자와 현재의 박하가 나누는 사랑은 시대를 건너뛴 해프닝으로 시작하여 결국은 '기억'을 매개로 한 절절하면서도 숭고한 사랑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런 기막힌 사랑 이야기에도 중반부를 점철한 진짜 세자빈의 악행은 옥에 티였다.
2013년 방송된 드라마 <야왕>은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그 인기의 원인은 '막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밑도 끝도 없는 주다해의 악행이었다. 박인권의 <대물-야왕전>을 모토로 한 드라마 <야왕>에서 시청자는 주다해의 악행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어설픈 기업물에 개연성이 희박한 악행과 복수의 연속이 실소를 자아냈다.
그래서 2015년 이희명 작가가 <냄새를 보는 소녀>라는 웹툰을 원작으로 로맨틱 코미디와 스릴러를 융합한 장르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옥탑방 왕세자>의 미완성도와 '막장'으로 치달았던 <야왕>을 기억하던 시청자들은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우려가 무색하게도 이제 7회를 맞이한 <냄새를 보는 소녀>는 '로코'와 '스릴러'라는 양 극단의 장르를 기가 막히게 담고 있다.
<냄새를 보는 소녀>는 극 초반, 두 장르 사이에서 갈지자를 걷는가 싶더니 7회에 이르러 어디가 로코이고 어디가 스릴러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시청자를 빠져들게 한다.
로코와 스릴러의 절묘한 결합
▲ <냄새를 보는 소녀>의 한 장면 ⓒ SBS
5회 초, 레스토랑 셰프 살인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냄새를 좇다 범인에게 쫓기는 오초림(신세경 분) 앞에 느닷없이 최무각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오초림의 힌트 하나로 대번에 대마초를 키우는 꽃집과 셰프를 죽이는 범인을 찾아냈다. 이 사건까지만 해도 '입수사'가 아닌가 싶게 어설퍼 보였다. 하지만, 그런 흐름이 6회 백숙집 비밀의 방에서 되풀이되면서 어설픔이 아니라 <냄새를 보는 소녀>만의 독특한 클리셰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마치 일본 만화 <명탐정 코난>에서 사건의 정황이 펼쳐지고, 그 모든 것이 코난의 정리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처럼 매회 해프닝처럼 제시되는 사건은 만화처럼 가볍게 최무각(박유천 분)의 정리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다. 사건을 통해 만담도 하고, 사건도 해결하기로 약속한 최무각-오초림 커플의 활약이 그 중심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초림의 '냄새를 보는 능력'에 기반한 사건 해결이기에 '과학 수사'로서는 애초에 어폐가 있는 설정을 가볍게 풀어가며, 오히려 그 과정에서 두 연인의 썸인듯, 썸 아닌 로코적 관계에 방점을 찍는 것이 <냄새를 보는 소녀>만의 장치이다.
오초림이 위험해질 수 있음을 느끼자 그녀를 사건에서 배제하려는 최무각의 무심한듯한 한 마디는 어떤 연인의 보살핌보다 은근하다. 그런 최무각의 걱정에 "최 순경님이 나를 지켜주면 되잖아요"라는 오초림의 대답은 직설적인 사랑 고백보다도 짜릿하다. 최무각은 그렇게 지켜달라는 그녀에게 7회에 이르러 "내가 옆에서 위험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화답한다. 남자 친구는 아니라고 뻔뻔하게 고개를 젓지만, 함께 밥을 먹고, 현장 검증한답시고 뽀뽀까지 해버리는 이 커플의 썸은 수사를 타고 기가 막히게 진행된다,
1회적 사건을 넘어선 복선하지만 이 무감각-초감각 커플의 사건 수사가 그저 연애의 진행을 위한 보조 수단만은 아니다. 포상으로 간 닭죽집에서 라면 냄새를 매개로 밝혀낸 '비밀의 방' 사건은 이후 셰프 권재희(남궁민 분)의 비밀의 서재가 보이면서 그저 일회성 사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초림의 친구가 누명을 쓰게 되어 두 사람이 수사하게 된 '인천 차이나타운 알리바이 사건'은 천백경(송종호 분)을 죽인 권재희의 치밀한 알리바이 조작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뜬금없이 등장한 자잘한 사건이 '바코드 연쇄 살인'의 의미심장한 복선으로 등장하며 이후 권재희의 사이코패스적 악행을 밝히는데 결정적 단서로 자리매김할 것을 예고한다.
사건만이 아니다. 극 중 등장하는 각종 상황도 의미심장한 복선이다. 동료 형사와 헬스장 트레이너가 공모한 살인 사건에서 시작하여 최무각이 거리에서 산 인형으로 이어진 1+1의 설정, 자신에게 전해준 인형에서 최무각이 동생에게 전하는 목소리를 듣고 되물리는 과정에서 등장한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덤'이냐는 질문은 결국 같은 최은설이지만 두 사람이 되는 오초림과 최무각의 동생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나인 듯 보이지만 둘인, 애초에 최무각에게는 자신의 동생만 진짜였고 오초림은 덤처럼 등장하지만 결국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전도될 수밖에 없는 사건의 본질을 드라마는 빈번하게 암시한다.
리메이크를 넘어선 창작
▲ 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의 포스터(위)와 웹툰(아래) ⓒ SBS
<냄새를 보는 소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취 작가의 동명 웹툰 <냄새를 보는 소녀>를 원작으로 한다. 이 웹툰이 드라마화된다고 했을 때, 반기면서도 가장 많은 우려를 나타낸 이는 웹툰의 애독자였다. 심지어 이 웹툰이 '로코'화 된다고 했을 때, 반기를 들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된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웹툰을 고스란히 느끼기는 힘들다. 웹툰이 로코화 된다고 했을 때 애독자들이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원작의 음습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냄새를 보는 여주인공은 부모님이 죽은 기억은 물론, 그 과정에서 괴물처럼 변해버린 자신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 중 냄새를 보는 능력만을 가지고, 부모님을 잃은 기억을 잃은 오초림으로 돌아온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한결 가벼워졌다.
소녀만이 아니다. '바코드 살인 사건'의 범인 권재희는 웹툰의 '컬렉터' 편과 유사하다. 만화 속 컬렉터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받은 학대를 타인의 삶을 기록하고 그를 죽이는 범죄를 통해 보상받고자 한다. 드라마 속 권재희는 그 기록을 책으로 대신한다. 만화 속 컬렉터는 어두운 지하도 구석에 아지트를 마련했지만, 잘 나가는 셰프 권재희는 집에 비밀의 방을 만들었다. 만화 속 한없이 어두웠던 공간은 화려한 셰프의 레스토랑과 집이 되었다.
또한 웹툰에서 미처 그려지지 않은 듯했던 남자 주인공은 드라마에서 바코드 연쇄살인으로 동생을 잃고 감각까지 잃었다. 이를 통해 그가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아울러 웹툰에서 양념처럼 등장한 잃어버린 강아지 찾기 등의 사건이 권재희 셰프의 애완견 뭉치를 오초림이 찾아주는 스토리로 역시나 적절하게 쓰인다. 원작의 어느 곳에선가 만날 수 있는 설정이 드라마로 재탄생된다.
이희명 작가는 웹툰 <냄새를 보는 소녀>를 이렇게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최무각-오초림 커플은 매회 사건에 뛰어들면서 사랑도 키워가고, 바코드 연쇄 살인의 거대한 실체에 다가가는 중이다. 물론 7회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연쇄 살인범 권재희의 악행이 이희명 작가의 전작처럼 완성도에 폐가 될까 우려는 되지만, 부디 마지막까지 로코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는 어려운 시도를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