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에는 해당 영화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근대 정치 철학의 입안자였던 토머스 홉스가 1651년 출간한 <리바이어던>의 표지는 독특합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책 표지 (1651)

홉스의 <리바이어던> 책 표지 (1651) ⓒ wikipedia

산 너머에서 왕관을 쓴 거대한 인간이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종교적 권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고 도시를 굽어보는 그림으로 도안돼 있습니다. 홉스가 직접 그린 이 그림은 거인 아래에 성과 교회, 왕관과 교황 모자, 대포와 교황의 파면권, 총칼, 전쟁과 종교 재판 모습이 병렬로 배치돼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거인의 몸통과 양팔이 수많은 작은 사람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것은 개인들의 합의와 계약을 의미합니다. 반면 얼굴은 카이젤 수염을 기른 근엄한 모습인데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은 통치권자를 가리킵니다. 즉, 홉스는 국가의 구성 원리를 사회계약설이라는 토대 위에 새롭게 세우기 위해 세속적인 권력과 교회 권력을 양손에 쥔 거인을 통해 무소불위의 국가, '리바이어던'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홉스는 하필이면 책 제목을 리바이어던으로 정했을까요? 리바이어던은 구약 성서 '욥기'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바다 괴물(고래)로, 최강의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홉스는 국가에게 리바이어던처럼 막강한 힘을 부여하는 이유를 인간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벗어나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평화라는 공동선을 달성하기 위한 것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이후 홉스의 뜻을 배반합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수호하기보다는 통제되지 않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리지 않고 억압적 체제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홉스가 신뢰했던 개인과 개인이 상호 계약을 맺고 그들의 의지를 모아 새로운 주권자인 리바이어던, 즉 국가에게 권력을 양도한 것이 아니라 지배와 억압의 수단으로 전락한 절대 권력의 화신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통제되지 않는 국가 권력은 괴물이 됩니다. 지난 19일 개봉한 러시아 영화 <리바이어던>은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한 가정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려는 폭력에 맞서 싸우는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가 어떻게 괴물이 되는지를 날것 그대로 폭로합니다. 그리고 진실의 힘보다 센 권력의 무자비한 야만과 폭력 속에서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내 집을 지키기 위해 괴물이 된 국가에 맞서다

 괴물이 된 국가 권력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한 남자를 통해 ‘국가란 무엇인가’를 제기하는 영화 <리바이어던> 포스터.

괴물이 된 국가 권력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한 남자를 통해 ‘국가란 무엇인가’를 제기하는 영화 <리바이어던> 포스터. ⓒ 오드


러시아 북부 해안가 외딴집에서 자동차 정비공 콜랴는 재혼한 아내 릴랴, 아들 로마와 함께 삽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지은 집이건만, 어느 날 난데 없이 쫓겨날 위기에 봉착합니다. 시가 통신센터를 짓기 위해 철거를 통보한 것입니다. 명분은 통신 센터지만, 사실은 부패한 시장 바딤의 호화 별장을 짓기 위한 속셈입니다. 콜랴는 모스크바에 사는 변호사 친구 드미트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둘은 법적 대응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콜랴의 뜻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거나하게 취한 바딤은 심야에 콜랴의 주거지에 무단 침입해 "너희들은 버러지야. 내가 이거 다 가져 갈 거야"라며 대놓고 협박합니다. 콜랴는 드미트리와 함께 법원, 경찰 등을 쫓아다니며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됩니다. 급기야 경찰서에서는 바딤의 직권 남용과 비리에 대한 고소장을 접수하러 갔다가 되레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콜랴의 저항이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딤을 정점으로 판사, 검사, 경찰서장, 교회가 철옹성같이 결탁했기 때문입니다. 바딤은 폭력배를 휘하에 두고 주먹과 총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신이 임명한 판·검사, 경찰 등을 수족처럼 부립니다. 러시아 정교의 신부는 도움을 요청하는 콜랴에게 "종교를 믿고 권력에 복종하며,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저항하지 말라"고 설교합니다.

 콜랴는 조상 대대로 살아 온 집과 땅이 강제로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법적 대응 등 저항을 하지만 처참하게 부서진다.

콜랴는 조상 대대로 살아 온 집과 땅이 강제로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법적 대응 등 저항을 하지만 처참하게 부서진다. ⓒ 오드


영화는 콜랴의 땅을 강탈하려는 바딤을 괴물 리바이어던으로 묘사합니다. 문제는 이 같은 권력의 폭압과 콜랴의 시련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러시아나 한 개인의 비극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말처럼 "어느 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국가 권력에 희생당하는 모든 사람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이유입니다.

감독은 영화의 모티브를 미국의 킬도저(Killdozer) 사건에서 가져왔습니다. 2004년 미국 콜로라도의 용접공 마빈 히마이어가 시멘트 회사로부터 공장 부지 한 가운데 위치한 그의 가게를 팔라는 압력을 받고, 재판에서도 궁지에 몰리자 직접 개조한 불도저를 타고 시멘트 공장의 건물을 부숴 버립니다. 그는 경찰이 200발이 넘는 실탄을 발사한 가운데 복수를 끝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권력의 횡포에 맞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킬도저 사건, 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 그리고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영화 <리바이어던>과 접목되면서 국가의 통제에 관한 동일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영화는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개인, 괴물과도 같은 정부에 맞서 싸우는 한 남자의 생존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통렬한 시선으로 담아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타락한 민낯' 드러낸 박근혜 정부

"나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내가 바라는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이다.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이다.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다. 나는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중 맺음말의 일부분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국가의 본질을 묻고 플라톤부터 헨리 데이비드 소로까지 국가론의 기원과 이념적 갈래를 면밀히 살폈습니다. 그리고 국가론의 키워드로 정의, 도덕, 진보 정치를 꼽았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부단히 성찰하고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는 정의로운 국가와는 거리가 먼 역사를 체득해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비롯된 폭력과 공포, 세뇌와 회유는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유력한 지배 수단으로 이용됐습니다. 일제 하 식민지 규율로부터 분단으로 인한 냉전 규율, 유신 독재가 낳은 반공 규율, 1980년대 신군부 독재의 파쇼 규율,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경쟁 규율 등 '규율 권력'은 국민의 생활과 의식 전반을 지배해 왔습니다.

특히 박정희·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이 애용한 규율 권력은 합법의 탈을 쓴 국가 폭력의 전형으로 꼽힙니다. 1974년 박정희가 선포한 긴급조치 1호는 법관의 영장 없이 국민을 체포해 군법 회의에서 재판받도록 했습니다. 전두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80년 총칼을 휘두르며 광주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판·검사와 교회 등은 침묵하거나 아니면 권력의 한 축으로 행세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국가 권력의 폭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인 시장 바딤. 정치와 사법 권력과 종교가 유착해 만들어내는 괴물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통제되지 않는 국가 권력의 폭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인 시장 바딤. 정치와 사법 권력과 종교가 유착해 만들어내는 괴물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오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성찰적 민주주의를 실현해 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산이었습니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서는 방귀깨나 뀌는 이들이 아니고서는 하나뿐인 목숨도 보존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규명 활동에 선을 그어 버렸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국가가 스스로 '타락의 민낯'을 드러낸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국민 사이에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며 세월호 피로도를 부채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랬던 국가는 미국 대사 피습 사건처럼 종북몰이가 시작되면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며 기세를 떨칩니다. 마치 영화에서 해안가에 방치된 거대한 고래 뼈가 국가로서의 제 기능을 상실한 러시아를 은유하는 것처럼, 박근혜 정부는 정의로운 국가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국가 폭력이 난무하는 러시아나 국가 폭력을 방조하는 한국은 오십보 백보인 셈입니다.

'정의로운 국가'는 국민의 저항을 통해 꽃 피운다

콜랴는 드미트리의 도움으로 부당한 권력에 맞섭니다. 하지만 릴랴와 드미트리의 배신, 그리고 릴랴의 주검은 그를 브레이크 없는 낭떠러지로 몰아갑니다. 바딤이 "넌 이제껏 그 어떤 권리도 가진 적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거야!"라고 겁박했던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는 릴랴를 살해한 누명까지 뒤집어씁니다. 결국 국가의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 앞에 콜랴의 집은 철거되고, 국가 폭력에 짓밟히면서도 꿈틀대던 콜랴 역시 부서져 버립니다.

괴물이 된 국가에게서 정의를 기대할 수는 없어서일까요. 영화는 반전을 생략합니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즈업한 고래 뼈를 통해 정의로운 국가는 생명을 다했다고 선언합니다. 다만, 콜랴의 아들 로마를 통해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띄웁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쓰면서 '저항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직시한 것일까요. 국가 폭력에 휘둘리며 침묵과 배신, 비관과 패배, 허무와 무력감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고 보드카만 축내는 어른들을 보다 못해 로마는 고래 뼈 앞으로 달려가 꺼억 꺼억 분한 울음을 터트리며 저항합니다.

 콜랴의 아들 로마가 해안가로 쓸러 온 거대한 고래 뼈 앞에서 울고 있다. 뼈만 남은 고래는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욥기’에서 리바이어던은 고래로 묘사된다.

콜랴의 아들 로마가 해안가로 쓸러 온 거대한 고래 뼈 앞에서 울고 있다. 뼈만 남은 고래는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욥기’에서 리바이어던은 고래로 묘사된다. ⓒ 오드


영화만이 아니라 현실도 매한가지입니다. '내가 바라는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이기를 원한다면, 꺼억 꺼억 울기라도 하면서 타락한 국가를 향해 끊임없이 저항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회는 성찰하며, 국가는 깨어 있게 됩니다. 세월호 유가족이 거리 농성과 안산~팽목항 도보 행진, 전국 순회 간담회를 이어 가는 것 또한 정의로운 국가를 꽃피우기 위해 '저항의 씨앗'을 심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세월호 유가족 대부분은 종종 거리에서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투표했다. 너무 세상을 모르고 속고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고 후회된다"고. 국가에 의해 구조화된 채 작동되고 있던 규율 권력에 맞서 유가족 스스로 반기를 든 셈입니다. 국가 권력이 어떤 폭력과 공포, 세뇌와 회유를 휘두르건 자발적으로 복종하던 세월에 종지부를 찍으며, 거역하고 나선 것입니다.

국가 폭력의 결정체인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어쩌면 유가족처럼 우리 안에 주입된 규율 권력에 맞서는 '자기 변혁'에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국가는 국민을 목적으로 대할 것이며, 인간으로 존중할 것이며,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단 한 사람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럴 때, 동토의 땅을 녹이며 '정의로운 국가'라는 이름의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박근혜 정부 세월호 참사 국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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