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테이션 게임

이미테이션 게임 ⓒ 이미테이션 게임


영화를 보고 난 후, 함께 본 아들에게 물었다. 애플의 로고인 사과 모양이 앨런 튜링을 상징하는 건 줄 알았냐고. 하지만 아들들은 금시초문이었단다. 1976년에서 1998년까지 애플의 로고는 무지개색의 한 입 베어 문 사과 모양이었다. 성적 소수자로 낙인이 찍혀 강제로 화학적 거세 치료를 받던 중 앨런 튜링은 스스로 청산가리를 묻힌 사과를 먹고 목숨을 끊었다. 무지개색은 성적 소수자의 상징이며 게이였던 앨런 튜링을 의미한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2차 대전 중 암호 해독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전쟁 후 국가에 의해 버림받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천재 앨런 튜링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가 자막으로 설명하다시피 영국 정부는 2009년에야 앨런 튜링을 동성애자로 낙인찍은 사실을 사과했고, 2013년 영국 여왕은 그를 사면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앨런 튜링은 역사의 바깥으로 사라진 천재일 뿐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인공 지능의 창시자와 같은 앨런 튜링을 추모하기 위해 그를 상징하는 한 입 베어 문 사과를 자신이 만든 컴퓨터에 로고로 사용했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엄청난 일을 해낸다"

영화의 시작은 전쟁 후 홀로 연구에 몰두하는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베치 분)의 집에 든 도둑을 잡기 위해 들이닥친 경찰들에게서 시작된다. 전후 냉전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교수 출신의 정체모를 앨런 튜링은 스파이 색출에 열성적인 한 경찰의 눈에 걸린다. 수상하게 생각한 경찰은 결국 앨런 튜링은 잡아온다. 하지만 뜻밖에도 죄목은 남자를 성매수한 혐의. 엉뚱한 죄목을 뒤집어씌운 경찰과 심문 테이블에 앉은 앨런 튜링은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답을 하라고 한다.

영화는 2차 대전 중으로, 동시에 앨런 튜링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독일군의 도발에 고전하고 있는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 세력은 독일군의 암호 퍼즐인 애니그마를 분석할 인원을 찾는다. 그 임무를 위해 만들어진 '블레츨리 파크'에 앨런 튜링은 스스로 찾아든다. 하지만 날마다 달라지는 독일군 암호 퍼즐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료들과 달리, 앨런 튜링은 암호 체계를 분석하는 '튜링 머신'을 만들고자 하여 갈등을 빚는다.

영화는 성적 소수자로서의 앨런 튜링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쉽게 소통할 수 없는 그의 면모를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다름'을 설명하고자 한다. 공부는 잘했으나 친구들과 소통할 수 없어 놀림감이 됐던 앨런 튜링을 그린다. 앨런 튜링은 자신이 만든 튜링 머신에 고교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크리스토퍼의 이름을 붙인다. 자신에게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낸다"라며 용기를 주었던 친구다. 그리고 그 말을 자신의 여성 동료인 조안 클라크(키이라 나이틀리 분)에게 똑같이 전한다.

영화는 학창 시절부터 따돌림을 당했고, 여전히 사회생활에서도 동료들과 마찰을 빚은 앨런 튜링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설득하고 암호해독에 성공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쟁'인 성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그려나간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시험응시 자격조차 얻지 못하는 조안에게 앨런은 기회를 준다. 그리고 그녀의 탁월한 능력을 살려내기 위해 그녀의 부모님을 설득하고, 심지어 그녀와 결혼까지 감행한다.

또 다른 소통 꿈꿨던 천재...국가의 배신으로 희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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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이며 도무지 사회적 소통 능력이라곤 없는 그가 끈질긴 연구에 대한 집념으로 동료들을 설득해 내었듯이, 조안 역시 여성이라는 성적 특수성을 넘어 뛰어난 수학자로서 해독팀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독일의 애니그마를 해독하는 기계 크리스토퍼를 만들어 낸다.

성공했지만 그 결과를 널리 알리지 못한 채 앨런 튜링의 팀은, 전쟁 후 국가가 그들의 모든 성과물을 태워 없애 버렸듯이 역사의 행간 속으로 소멸되어져 간다. 쓸모가 없어져 버린 개를 삶아 먹듯이 그 팀의 대표적 인물 앨런 튜링은 간첩 혐의를 받았고, 남창 혐의를 씌워 화학적 거세까지 당한다.

앨런 튜링이 합류한 암호 해독 팀에서 스파이 색출 사건이 벌어진다. 알고 보니 범인은 뜻밖의 인물이었고, 영국 정보부는 그것을 알면서도 방치한 것이었다. 오히려 앨런 튜링이 잡혀간 계기가 스파이 혐의였다. 구미에 따라 사람을 이용하거나 사실을 조작하는 게 국가라는 것을 드러낸 것. 결국 '스파이'라는 국가적 범죄조차도 사실은 자의적 '도그마'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필요에 따르면 게이는 물론, 사회 부 적응자, 여성조차도 이용하던 정부가, 그들이 필요로 되지 않을 때 얼마든지 소모품 취급하며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그려낸다. 조안이 위해를 당할까 그녀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종용했던 앨런 튜링의 간곡한 부탁은 결국 앨런 튜링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을 통해, 국가 권력의 두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3월 3일을 기준으로 <킹스맨>에 이어 박스 오피스 2위을 차지하며 120만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여전히 '좌빨'이라는 프레임이 먹히며, '성적 소수자'의 폄하가 비일비재한 한국 사회에서, 앨런 튜링의 업적을 넘은, 사회적 소수자의 비극적 삶을 다룬 실화가 꾸준한 인기를 누린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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