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화면 밖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타와 작품을 위해 카메라 뒤에 서는 숨은 공신들을 조명합니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마세요. [편집자말]
 MBC 일산 드림센터 스튜디오에 있는 일일드라마 <폭풍의 여자> 세트.

MBC 일산 드림센터 스튜디오에 있는 일일드라마 <폭풍의 여자> 세트. ⓒ 이현진


"한의사라 <순풍산부인과> 원장실과 이창훈 집 거실의 책들을 유심히 본다. 그런데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이 거의 한의학 서적이다. 순풍산부인과는 한의원인가?" (<국민일보> 'TV유감' 중, 2000-09-18)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1998~2000)에 대한 시청자의 지적이다. 카메라가 중요하게 잡지 않아도, 연출자보다 날카로운 '매의 눈'은 구석까지 가 닿는다. 이 때문에 화면에 보이는 물건들은 신발 한 짝 허투루 놓을 수 없다. '변변치 못한 물건'을 뜻하기도 하는 '소품'으로 불리지만, 이렇게 주어진 자리에서 장면의 한 부분을 채우는 '소도구'는 작품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은 물론 이야기까지 지탱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현재 방영 중인 MBC 일일드라마 <폭풍의 여자> 세트가 있는 일산 드림센터 스튜디오에 가면 KP그룹 박현우(현우성 분) 법무팀장 방의 서재에 다양한 법률 서적이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면에 책 제목까지 자세히 나오지 않더라도 세트장을 세밀하게 꾸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소도구지원팀의 일이다.

최근 드림센터 스튜디오에서 만난 이건무 MBC 소도구지원팀장은 "흑백 TV 시절에는 먹지 못할 풀떼기를 무쳐놓고 나물 반찬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컬러TV가 나오고 HD를 넘어 UHD 시대인 지금은 소도구 하나 어설프게 배치할 수 없다"고 변화를 설명했다.

 MBC 일산 드림센터에는 주로 일일드라마 등의 현대극에 필요한 소도구가 마련돼 있다.

MBC 일산 드림센터에는 주로 일일드라마 등의 현대극에 필요한 소도구가 마련돼 있다. ⓒ 이현진


"세상 좋아지니 시대극 부잣집 꾸미기도 어렵네"

1987년 MBC에 입사한 이건무 팀장은 <조선왕조 500년 한중록>을 시작으로 주로 사극과 시대극의 소도구를 담당하며 시대의 흐름을 몸소 체감한 산증인이다. <해를 품은 달> <아랑사또전> <구가의 서> <제왕의 딸 수백향>, 마지막으로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기획단계에 참여했던 그는 "정통사극에서 팩션·퓨전 사극으로 추세가 바뀌면서 콘셉트를 잡는 일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운을 뗐다.

이 팀장은 변화에 대해 "정확한 고증보다는 작품의 이미지나 영상미에 맞추는 경향이 짙어졌다"며 "예를 들어 한옥의 외관은 단순한 일자형이나 ㄱ자형인데, 내부 장면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팔각형 방이 등장하는 식이다"라고 설명했다. 2012년 방송 당시 최고 시청률 42.2%를 기록한 인기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대표적인 예다.

 MBC <해를 품은 달>의 한 장면.

MBC <해를 품은 달>의 한 장면. ⓒ MBC


"<해를 품은 달>은 화면 자체가 예뻐야 했어요. 겨울에 촬영하지만 꽃이 피어 있어야 하고, 막 흩날려야 했죠. 또, 유교문화를 근간으로 한 조선 시대의 가구들은 절제된 디자인이라 화면에 칙칙하게 나오는 편인데, 화사해야 하니까 화려한 나전칠기 가구를 활용했어요. 당시 촬영에 쓰인 문갑 하나가 1500만 원이었으니까, 김수현 씨(이훤 역) 방만 꾸미는 데 몇억 원어치예요. 물론 사지 못하고 빌렸죠. 명인들의 귀중한 작품이라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어요."

미술비로 책정된 예산 안에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도 소도구지원팀의 능력이다. 이 팀장은 "화면에 집중적으로 잡히지 않는 것을 '분위기 소도구'라고 하는데, 시대극에서는 주로 포스터나 현수막을 활용했다"면서 "'쥐를 잡자' '반공' 포스터나 그 당시 영화 포스터로 큰돈 들이지 않고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노하우를 전했다. 현수막의 글씨는 직접 쓰기도 했는데, 이를 위해 서예도 배웠다고. 물론 시대극을 꾸미는 일도 세월이 흐르며 변화하고 있다. 

"세상이 발전하고 삶의 질이 높아지니까 드라마를 꾸미는 일도 많이 바뀌었어요. 1990년대 잘 사는 집 풍경과 지금 타워팰리스를 비교하면 너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시대극을 만들면서 부잣집이라고 아무리 잘 꾸며놔도 지지리 궁상처럼 보이는 거죠. 예전에 <여명의 눈동자>에도 참여했는데, 제가 나름 잘 꾸민 집인데도 지금은 화면을 못 쳐다보겠어요.(웃음)"

"<여명의 눈동자> 출연한 쥐 천 마리, 어찌 잊으리"

요즘은 밍키나 산체 등 TV 출연 동물도 스타로 주목받고 드라마에서 조연급 정도의 출연료를 받는 동물도 있다지만, 과거에는 그들 역시 '소품'에 포함돼 방송국에서 길러졌다. 대표적으로 22년 동안 방영된 드라마 <전원일기>의 김회장 댁 개 삼월이가 있다. 1980년 남대문 시장에서 4천 원에 사 온 '1대 삼월이'를 시작으로 2002년까지 여러 마리의 개가 같은 역을 물려받아 연기했다. 이건무 팀장에게도 드라마 출연 동물들이 남긴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 몇 개가 있다.

 2002년 MBC <전원일기> 마지막회 촬영 당시 배우 단체사진. 드라마에 출연했던 동물들도 보인다.

2002년 MBC <전원일기> 마지막회 촬영 당시 배우 단체사진. 드라마에 출연했던 동물들도 보인다. ⓒ MBC


"지금이야 촬영에 이용되는 동물의 복지가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촬영하다가 죽거나 죽이기도 했어요. 한 번은 <아들과 딸>(1992)에서 개가 죽는 장면이 있었어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취지만 촬영 날이 휴일이라 불가능해서 수면제 한두 알을 먹였는데, 잠들지 않는 거예요. 오죽하면 '제발 좀 자라'고 개를 타일렀다니까요. 결국 선잠이 든 상태에서 촬영했는데 눈을 깜빡이는 게 화면에 잡혀버렸죠. 옥에 티가 됐지만, 개를 살려서 데려올 수 있었어요.

<여명의 눈동자> 때는 731부대 동물실 장면을 촬영하는데, 야생 쥐 천여 마리가 필요했어요. 살 수도 없는 야생 쥐를 그렇게 많이 어디서 구해요. 흰쥐와 기니피그 10마리를 사다가 회색으로 염색해도 다음 날 도로 돌아와 있고...그런데 한 선배님이 카본가루를 이용해 보라고 해서 일단 흰쥐 800마리를 촬영장으로 가져갔어요. 촬영 직전에 가루를 입혔더니 정말 딱 야생쥐 같더라고요. 문제는 다음이었어요. 800마리가 털기 시작하니 가루가 막 떠다니잖아요. 촬영 끝나고 보니 다들 광부가 돼 있었죠. 그때 제가 막내급 스태프였는데, 정말 미안했어요."

포스터 한 장부터 살아있는 생물까지 수많은 소도구를 준비하고, <신돈>(2005) 때는 고려 시대 가구를 구하러 중국까지 날아갔다는 이건무 팀장에게 가장 귀한 물건은 뭘까.

 MBC <아랑사또전>에서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이 바둑을 둘 때 등장했던 바둑판.

MBC <아랑사또전>에서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이 바둑을 둘 때 등장했던 바둑판. ⓒ MBC


"이 세상에 없어 만들어 낸 것이 가장 귀하다"고 답한 그는 "<아랑사또전>에서 염라대왕과 옥황상제가 바둑을 두는 장면에 등장한 바둑판"을 꼽으며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디자인을 맡았던 친구가 물속에 바둑판을 두자고 기발한 제안을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그걸 제작하는 데 50만 원이 들었는데, 저희한테는 훨씬 고가의 빌린 제품보다 값어치가 더 있죠. 작가나 연출자가 남겨놓은 공간을 소도구가 창의적으로 채워 넣은 거니까요. 예전에는 소품팀 업무를 하찮은 일로 치부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작품에서 소도구가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걸 느껴요. 후배들이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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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실 빛나거나 미치거나 해를 품은 달 폭풍의 여자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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