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수목드라마 SBS <하이드 지킬 나>와 MBC <킬미 힐미>에는 다중인격 장애를 지닌 재벌남들이 등장하여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이드 지킬, 나>의 웹툰 원작자인 이충호 작가가 표절을 주장하고 나설 만큼, 두 드라마는 동일하게 다중인격, 정확하게는 해리성 인격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를 지닌, 그러면서도 재벌가의 자제인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충호 작가의 문제 제기에도, <킬미 힐미>가 앞서 시작한 선점 효과에 더해, 자그마치 7중 인격의 캐릭터를 앞세워 시청률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중이다. 그에 반해, <하이드 지킬 나>는 현빈·한지민 등 스타를 앞세워 화제몰이를 했음에도, 막상 첫 방을 선보인 후 상대적으로 밋밋한 캐릭터와 연기로 인해 동시간대 꼴찌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1위를 하거나, 꼴찌를 하거나 결국 공중파의 수목드라마는 세 개 중 두 개가 이상 인격을 가진 재벌남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다. <킬미 힐미>건, <하이드 지킬 나>건 채널을 돌리다 문득 '왜 우리가 이런 정신 이상 재벌남 이야기를 보고 있어야 하는가?'란 반문이 드는 것이다.

아픈 재벌남을 구원하는 '을'의 여자 주인공들

하지만 공중파만이 아니다. <미생>의 후속 작품으로 tvN에서 한창 방영 중인 <하트 투 하트> 역시 외관상으로는 정신과 의사인 남자 주인공 고이석(천정명 분)이 대인기피증 차홍도(최강희 분)를 치료하는 듯 보이지만, 기실 들여다보면, 차홍도가 없으면 환자조차 치료할 수 없는 고이석의 정신적 문제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고이석 역시 직업은 정신과 의사이지만, 자전거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고상규 회장의 단 하나뿐인 손자라는 점에서, 이른바 재벌가 남주의 계보를 잇는다.

여심을 흔드는 재벌가 남주의 등장은 이미 로맨틱 코미디를 비롯하여 여성들을 주시청층으로 하는 드라마에서는 빼놓을 없는 설정이 되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트럼펫을 불며, 거기에 매너까지 완벽했던 강풍호라는 캐릭터를 통해 신출내기 차인표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1994년작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만 해도 재벌가 남주는 가난한 여성을 위해 준비된 키다리 아저씨였다.

<하이드 지킬 나>에서 고전하고 있는 현빈의 히트작이 된 <시크릿 가든>(2010)에 들어서면, 재벌가 남주는 가진 것은 많되 지질하기 이를 데 없어 보살펴 주어야 하는 캐릭터로 변모되었다. 그러다가 2013년 <주군의 태양>의 주중원(소지섭 분)을 거치며 정신적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이제 아예 대놓고 해리성 장애라는 반사회적 정신적 증후군의 환자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그런 해리성 장애를 가진 주인공에 대한 반응이 갈린다. 원작 <지킬 앤 하이드>를 전복시킨 <하이드 지킬 나>의 구서진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여자의 손을 물고, 자신을 쫓아오는 여주인공을 엘리베이터에서 밀어버리는 싸가지 없는 행동으로 비도덕적인 캐릭터로 원성을 사는 것과 달리, <킬미 힐미>의 차도현은 재벌가의 불우한 혼외 자식으로 뒤늦게 입성한 사연을 가지고, 기억을 잃은 어린 시절의 상처가 감당키 힘든 7인격을 만들어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느라 전전긍긍하는 애처로운 존재로 대접받는다.

구서진이 '땅콩 회항'의 주인공인 모 재벌가 자제를 연상케 하는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비난을 사는 반면, 차도현은 극 중에서도 그를 설명하는 단어로 '책임감'이란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할 만큼, 자신은 물론 자신의 나머지 인격에 대한 뒤치다꺼리를 마다하지 않는 존재로 설정한다.

그런데 분명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땅콩 회항' 사건이지만 사람들이 여기에 손가락질을 하는 동안 정작 어쩌면 더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정치적 사안들이 물에 물 탄 듯 넘어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처럼, 구서진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불쾌감이나 차도현이란 캐릭터에 대한 연민으로, 실은 둘 다 한 기업의 중요한 직책을 맡기에는 심각한 결격 사유를 가진 인물이란 사실을 간과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다.

해리성 장애는 정신과 질병 중에서도 중증으로, 과연 이런 질환을 가진 인물이 놀이동산이나 엔터테인먼트라는 사업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 드라마는 전혀 반문하지 않는다. '도덕적인가, 책임감 있는가'라는 그 일개인의 자질 문제에 대해서만 논의가 분분할 뿐, 기본적으로 그 기업이 가진 본질적 전횡과 부조리에는 무감각하듯이 말이다.

<하트 투 하트>에서는 자신의 질병을 숨긴 채 고이석이 차홍도를 대동하고 환자를 진료하는 상황을 재연한다. 물론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상황이지만, 현실 사회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용인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보아야 하겠다. 차라리 다른 드라마에서 부도덕해 지탄받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 재벌들이 더 현실감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재벌남과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들이다. <하이드 지킬 나>의 여주인공 장하나(한지민 분)는 서진의 테마파크에 소속된 서커스단의 단장이자 배우지만, 첫 회부터 당장 구서진에 의해 서커스단의 해체를 통보받는다. <킬미 힐미>의 여주인공 오리진은 정신의학과 레지던트 1년차지만, 차도현이 속한 승진그룹의 입김으로 6개월 휴직 처리를 당한다. <하트 투 하트>의 차홍도는 어떤가. 대인기피증 치료를 위해 고이석을 찾아간 환자이다.

드라마 속 그녀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을'이다. 하지만 을로서 불이익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갑'인 남자 주인공들과 사랑에 빠질 예정이다. 심지어 그들의 정신적 상처를 보듬어 주고, 감싸 안아주고, 치유해 줄 예정이다. 정신과 의사인 오리진이야 그렇다 치고, 서커스단을 이끄는 장하나와, 사람만 만나면 얼굴이 빨개지는 차홍도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런 갑을 관계를 을의 정신적 우위, 도덕적 우위를 통해 설명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사회에서 을로서 분노와 저항을 해야 할 존재들이 드라마 속에서는 갑을 보듬어 주고 치유하고 있다. 그들로 인해 상처받고 치유되어야 할 존재들이 오히려 저들을 치유하는 존재로 등장하니, 제 아무리 '사랑' 이야기라지만 을인 그녀들에게 너무 가혹한 게 아닐까. 이건 뭐, '계급 화해'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퍼주기'가 아닌가 말이다.

물론 드라마는 재벌이라는 캐릭터, 혹은 다중인격 장애를 가진 남자 주인공을 넘어, 정신적으로 혼돈스런 세상에서 여전히 순수한 그 어떤 사랑과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대상이 재벌, 그것도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재벌을 을의 위치의 여성들이 구원해 주어야 한다는 이 전형적 구도는 청년 실업이 짓누르는 21세기의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너무도 허황한 설정이 아닌지,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