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9회 부산국제영화제 전야제 행사에 참석한 서병수 부산시장(왼쪽에서 세번째)과 이용관 집행위원장(우측 끝)

2014년 19회 부산국제영화제 전야제 행사에 참석한 서병수 부산시장(왼쪽에서 세번째)과 이용관 집행위원장(우측 끝) ⓒ 성하훈


"이건 부산시의 문제라기보다는 현 정권이 한국 영화계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명박 정권 때처럼 영화계와 전면전을 하겠다는 건데, 절대 물러설 수 없다."

23일 부산시가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에게 자진 사퇴를 압박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영화인들은 하나같이 격앙된 반응을 나타냈다.

한 유명 제작자는 "저쪽에서 영화 하는 인생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멀쩡한 대학 나와서 부모 말 안 듣고 영화 하면서, 내가 하는 영화는 우리 사는 세상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고, 동창들에게 술값 한번 제대로 못 내는 인생이라도 떳떳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런 영화인들을 잘 못 봤다. 한번 해보겠다는 건데, 우리의 존재감, 우리의 연대, 우리의 모든 것을 보여 줘야 할 것 같다"고 굳은 결의를 다졌다.

'다이빙벨' 상영에 따른 정치적 보복

지난 23일 오후 부산시 관계자는 이용관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최근 감사 결과를 전하며 사퇴를 권고했다. 이용관 위원장은 이날 오후 전화통화에서 "사퇴 권고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고 확인했다. 이에 대해 부산시 관계자는 "감사 결과에 따른 시스템 개선과 비전 등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부산영화제 관계자는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부산시의 사퇴 요구는 지난해 <다이빙벨> 상영에 따른 정치적 보복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부산시는 지난해 영화제에서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다이빙벨>이 상영작에 포함되자 상영 중단을 요구했으나 부산영화제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국내 영화제들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가 시작됐고, 부산시도 지도·감독(감사)에 착수했다. 감사원의 감사는 국내 영화제들에 대한 경고성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부산시의 감사가 결과적으로 이용관 위원장에 대한 사퇴 권고로 나타낸 셈이다.

하지만 부산시의 이 같은 결정은 영화제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판단이라는 것이 영화계의 비판이다. 특히 최근 들어 표현의 자유 위축과 맞물리며 영화계를 자극하는 모습이다. 영화계가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건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 지역의 한 영화계 인사는 "부산영화제 위원장이 정관에 위배되거나 큰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닌데, 꼬투리 잡기 감사를 통해 나가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위원장이 결코 물러나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산영화제 조직위원회의 내부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한 관계자는 "위원장이 바뀌면 뭔가 자기들 맘대로 될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면서 "내부적으로 위원장이 사퇴하는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부산시 앞세운 정권 차원의 탄압, 영화계 향한 선전포고

 2014년 10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이빙벨>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2014년 10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이빙벨>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 이정민


영화계는 부산시의 이 같은 조치를 사실상 정권 차원의 탄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최근 전문성이 약한 인사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지난 2010년 영화계의 갈등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인사를 영진위원에 임명하는 등 영화계의 소통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영화인의 표현대로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으로 "부산영화제 위원장 사퇴 요구는 사실상 영화계에 대한 정권 차원의 선전포고"로 해석되고 있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SNS에 글을 올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최악의 상황'을 만나게 되는 지금 여기 우리"라고 황당해 했다.

국내 영화계 인사들은 23일 오후 대응책 마련에 돌입했다. 한 제작 배급사 관계자는 "영화인들이 연락하면서 분주하게 대책을 협의 중이다"면서 "각자 해외 영화계 인사들과 연락해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있다. 국제적인 연대도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베를린국제영화제가 2월 5일 개막할 예정이기 때문에 부산영화제의 상황이 국제적인 이슈로 부상할 가능성도 커 보인다. 부산영화제는 칸과 베를린, 베니스영화제 등과 함께 국제적으로 손꼽히는 영화제로 평가받고 있어 해외 영화인들의 관심이 상당히 높다. 이 상황을 해외 영화계가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국제적인 문제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독립영화 진영 역시 비슷한 반응이다. 23일 오후 광화문의 한 주점에서는 한국독립영화협회 신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독립영화인들은 부산영화제의 소식이 전해지자 "결국 예상했던 탄압이 시작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우린 그저 묵묵히 영화나 열심히 만들고 싶은데, 현 정권은 그게 싫은 것 같다. 이것은 단순히 부산영화제나 이용관 위원장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한국영화 전체에 대한 도전이다. 영화계를 잘못 건드리는 것 같다"고 반발했다.

정치인 시장의 영화제 흔들기, 국제적 위상 하락 가능성

부산영화제의 국제적 위상 하락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이용관 위원장에 대한 사퇴 압박은 부산시장이 과도한 간섭으로 사실상 영화제를 망쳐 놓겠다는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허남식 전 시장이 영화제가 정치적 공격을 받을 당시 예산을 늘리며 적극적인 지원을 하는 등 바람막이 역할을 한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부산지역 영화계 관계자는 "예전에 부천영화제가 비슷한 일로 위상이 추락했는데 부산도 같은 경우를 당하는 것 같다"면서 "지원을 하니 간섭을 하겠다는 서병수 시장의 문화적 인식 수준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비판했다.

지난 2004년 12월 말, 당시 부천시장이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강제로 쫓아내면서 이듬해인 2005년 국내 영화인 대부분이 부천영화제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부천영화제는 오랜 시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위원장은 국내 대표적 영화학자이자 평론가다. 중앙대학교 영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이 위원장은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부산 경성대와 중앙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예술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세계 영화사 Ⅰ,Ⅱ,Ⅲ> <한국영화를 위한 변명> <전위영화의 이해> <영화구조의 미학> 등이 있다.

이 위원장은 1992년, 당시 후배였던 전양준(현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지석(현 부산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등과 함께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에 참석한 후 영화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들었다. 

이용관 위원장은 김동호 위원장을 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한 이후 한국영화프로그래머, 부집행위원장, 공동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2011년 김동호 위원장이 2선으로 후퇴하자 집행위원장을 맡아 영화제를 이끌어 오고 있다.

그는 당시 집행위원장을 고사했으나 김동호 위원장이 "영화제를 처음 구상해 만든 사람이 영화제를 이끌어야 한다"며 그에게 집행위원장 자리를 넘겼다. 지난 20년간 부산영화제가 시작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 2010년 당시 이명박 정권이 영화계 좌파들을 청산한다면서 주요 영화제를 좌파들의 근거지로 지목해 공세를 취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때도 이용관 위원장을 물러나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주 출신인 이 위원장은 당시 "우리 집안이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간 대립으로 희생자가 많았는데, 주로 좌익 쪽에 의해 희생됐다. 그런 나를 좌파라고 한다"고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부산영화제 초창기 정치적 독립성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치 않은 국내 영화제 1세대다. 후배 영화인은 "이용관 위원장이 한국영화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한데, 부산시가 이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서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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