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이웃집 찰스>의 한 장면. 이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프랑스인 아노 로드앙(28)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한 재래시장 한편의 노점상에서 프랑스 전통 먹거리인 크레페를 만들어 팔고 있다.

KBS 1TV <이웃집 찰스>의 한 장면. 이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프랑스인 아노 로드앙(28)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한 재래시장 한편의 노점상에서 프랑스 전통 먹거리인 크레페를 만들어 팔고 있다. ⓒ KBS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출신 셰프의 정통 크레페를 맛보기 위해 찾은 곳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재래시장. 그것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노점상이다. 군밤, 붕어빵, 꽈배기 등 한국식 간식거리가 꽉 잡고 있는 이곳에서 호떡이 아닌 크레페를 파는 가게 야마뜨(프랑스 지역말로 '건배')의 주인은 축구선수 베컴을 빼닮은 프랑스 청년 아노 로드앙(28)이다.

아노와 이 작은 가게는 지난 6일부터 KBS 1TV <이웃집 찰스>에 등장하며 조금씩 알려졌다. 낯선 한국 땅으로 온 외국인들이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 프로그램의 방송 초반까지 아노는 이 시장의 주 고객층인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그저 '신기함' '안쓰러움'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아노는 축구복을 입고 장사를 하는 독특한 방법과 장난기 넘치는 그의 성격 덕에 유독 초·중·고등학생 손님들에게 인기만점이다.

아노는 축구복을 입고 장사를 하는 독특한 방법과 장난기 넘치는 그의 성격 덕에 유독 초·중·고등학생 손님들에게 인기만점이다. ⓒ KBS


밀전병에 과일과 크림을 싸서 먹는 낯선 크레페를 보며 "뭔 맛이야?" "단 거 먹으면 이 썩어"라고 손사래 치고, 하물며 붕어빵 예닐곱 개를 살 수 있는 2000~3000원이라는 고가에 지갑을 여는 손님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할머니는 아노를 촬영 중인 제작진의 카메라에 "외국인이 저거 얼마치 판다고 저러고 살어. 지나다닐 적마다 한심해"라고 조금 과한 걱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4년 전 뉴질랜드 어학연수에서 지금의 한국인 아내를 만나 한국 생활 1년차에 접어든 아노. "적은 돈으로 장사를 시작할 수 있고, 진짜 한국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어 시장을 택했다"는 그는 "할머니·할아버지 고객을 유치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었다. 방송 3주가 지난 후, 그의 크레페는 신토불이 '순댓국 러버' 어르신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을까?

방송 이후 바뀐 삶..."매일 모르는 사람들이 전화 와"

21일 오후 1시께 찾은 야마뜨에는 손님만 기다리고 있을 뿐, 주인 아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아노가 바나나 한 뭉치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오전부터 손님이 많아 재료가 떨어진 것. 길을 지나던 아주머니는 "아이고 방송 나가더니 장사 잘 되네! 장모님 좋아하시겠네~"라고 인사를 건넸고, 숨 돌릴 틈 없어 보이는 아노도 "좡모님~ 좋아해요~"라고 웃었다.

그 뒤로도 손님이 계속 이어졌다. 화곡동에 살지만 가게엔 처음 와본다는 한 20대 남자 손님은 "방송을 보고 크레페를 사러 왔다"고 말했다. "어제 TV에서 봤어요"라며 연신 휴대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님들에게 포즈 취하랴, 크레페 만들랴 정신없는 아노에게 방송 후 매출이 어떤지 묻자 "너무 바쁘다. 쉴 시간이 없어서 피곤하다"고 답했지만 행복한 비명처럼 들렸다.

 <이웃집 찰스>가 방송된 지 3주가 지나 찾은 아노의 가게 야마뜨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웃집 찰스>가 방송된 지 3주가 지나 찾은 아노의 가게 야마뜨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 이현진


하교 시간이 되자 야마뜨의 진짜 단골손님인 학생들이 "아노! 프렌드(친구)" "하우 아유 투데이(오늘 어때요)?" "유 베리 비지(매우 바쁘군요)" 등 구사할 수 있는 각종 영어를 외치며 우르르 몰려왔다. 학생들에게 이곳은 영어공부의 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록 대화는 "바나나 앤 초콜릿 앤 아몬드 크레페" "땡큐" 등으로 한정되는 분위기였지만. 시장에서 크레페를 만드는 베컴 닮은 외국인은 아이들에게 충분히 '스타'인 듯, 트레이닝복을 입었을 뿐인 아노를 보고 "우리랑 같은 거 입었는데 왜 다른 느낌이지?"라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은 반갑기라도 하지만, 다짜고짜 "야, 너 몇 살이냐?"라고 묻는 어르신들 등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 어눌한 한국말로 전화 문의를 했을 때 뚝 끊어버리는 행동에 울상을 짓기도 했던 아노는 "나는 공손하게 대하는데 상대방이 막 대하면 당황스럽다"고 토로했다.

아노는 부업으로 드라마, CF 등에 보조 출연하는 모델로도 일하고 있다. 하정우가 주인공인 CF에서는 군중 속에서 엉덩이와 뒤통수만 출연하더니, 최근 빅뱅 탑과 함께한 CF에서는 쇼핑을 제안하는 역할로 꽤 오랫동안 등장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아노에게 '스타'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단박에 "노"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누군가 인터넷에 내 휴대폰 번호를 올려놔서 매일 모르는 사람들이 '친구 하자' '사업하자' 연락해온다"고 곤란해 했다. 노점상에서 일하며 비싸다고 난로도 안 켜고, 매달 집세와 각종 청구서를 걱정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어 보였다.

"장사가 잘 돼서 (노점상이 아닌) 진짜 식당을 차리는 게 꿈이에요. 스타가 되고 싶진 않아요. '슈퍼맨'? 아이들이 나오는 그 TV 프로그램을 보면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쫓아다니잖아요. 너무 피곤할 것 같아요. 적은 돈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요."

"외국인 예능 너무 많아...한국생활 정착기에 초점"

<이웃집 찰스>가 나타났을 때 '또 외국인 예능인가' 싶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tvN <섬마을 쌤>, JTBC <비정상회담>, MBC <헬로 이방인> 등 외국인만 출연하는 예능이 줄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다른 생김새에 유창한 한국어로 입담을 뽐내는 이방인들은 식상한 예능 판의 신선한 캐릭터, 나아가 잠재적 스타로 소비되며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아이 러브 코리아'를 외치는 게 응당 미덕으로 여겨지는 한국인 같은 외국인을 철저히 우리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졌을 때 방송을 시작한 <이웃집 찰스>는 다큐에 무게 중심을 두고, 어쩌면 예능이 놓쳤을 평범한 외국인들의 '리얼 한국 정착기'에 초점을 맞췄다. 현재는 아노(프랑스)의 한국 시장 생존기와 함께, 아델리아(러시아)의 신입사원 고군분투기, 줄리아(이탈리아)의 시댁 적응기를 전하고 있다.

이 중 아노를 맡아 촬영 중인 구자영 PD는 섭외배경에 대해 "외국인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기존 예능에 출연하는 분들이 아닌, 실제로 한국생활에 정착하고자 하는 진정성 있는 분들을 찾고 있었다"면서 "같이 일하는 작가의 친구 집이 화곡동인데 시장을 지나다니며 아노를 봤다고 소개했다. 당시 여러 방송 프로그램이 아노를 섭외하려 하고 있었는데, 아노 역시 자칫 방송인 이미지로 굳을까 봐 다큐 성격의 <이웃집 찰스>에 출연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크레페를 굽고 있는 아노.

크레페를 굽고 있는 아노. ⓒ 이현진


TV 출연 이후 아노는 장사가 잘 되거나 유명해진 걸 떠나서 오로지 크레페 때문에 예민해져 있다고. 구 PD는 "방송이 나가면서 동네 주민뿐 아니라 멀리서 크레페를 사러 오기도 한다"면서 "그런데 예를 들어, 오늘은 바닐라 크림이 조금 덜 달더라도 매번 사 먹는 분들은 야마뜨의 크레페 맛이 어떤지 알지만, 처음 드신 분들이 '방송에서 보기보다 맛이 없네'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인가 보다. 아침마다 제대로 된 소스를 만드는 데 혈안이 돼 있단다"고 전했다.

"홈메이드로 매일 2시간씩 공들여서 '아노 표' 소스를 만들어요. 사실 포차에서 저런 거 파는데 무슨 소스를 저렇게 신경 쓰나 싶기도 했는데(웃음), 크레페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하더라고요. 할머니와 삼촌을 거쳐 내려오는 레시피를 고수하면서 한국 사람들 입맛에도 맞게 팥 같은 걸 넣은 신메뉴를 개발 중이에요. 프랑스 속담에 '시도한 것 자체로도 값지다'는 말이 있대요. 그런 아노의 믿음처럼 '장밋빛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 사람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내용을 방송에 담고 싶어요."

아노의 목표는 올해 안에 홍대 근처에 식당을 내는 것이다. 프랑스 국기가 아닌 브르타뉴 깃발을 걸고 전통적인 맛을 전하겠다는 아노의 눈빛에서 뚝심이 읽혔다. 그건 그렇고, 화곡동을 떠난다는 비보(?)에 아노의 '프렌드'를 자처하던 고등학생 단골손님들은 간절하게 "돈 고(가지 마세요)!" "온리 강서구(강서구에 있어줘요)!"라고 외쳤다. 아직은 아노의 바람대로 어르신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소소한 축배를 들어도 될 것 같다. 아노의 한국 정착기에 야마뜨(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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