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코라도 지아갱토의 카를로 브로스키 파리넬리의 초상화. 1746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코라도 지아갱토의 카를로 브로스키 파리넬리의 초상화. 1746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볼로냐국제음악박물관

'신이 내린 목소리'로 일컫던 이들. 이제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음악을 위해 철저하게 악기로 만들어진 인간, 목소리를 위해 자신의 일부인 '성'을 버려야 하는 카스트라토가 바로 그들이다.

성공한 카스트라토는 손에 꼽지만, 카스트라토의 범주에 속하는 가수는 18세기 이전까지 꽤나 흔했다. 변성기 이전의 소년을 거세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고운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성경의 교조주의적 해석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던 시대, 여성이 무대에 오르는 것은 불경하다는 인식 때문에 여자 목소리를 낼 남자 가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카스트라토는 자연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녹음 기술이 없었던 시기에 활동했던 가수이기에, 당시 이들이 얼마나 높은 음역대를 소화했고, 어떤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저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화만 몇 개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중 단연 돋보이는 카스트라토가 있다. 영화 <파리넬리>로도 널리 알려진 카스트라토, 바로 카를로 브로스키 파리넬리다. 그는 실제 인물이다. 원래 이름은 카를로 마리아 미켈란젤로이며 1705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파리넬리'는 그를 후원한 파리나 가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예명이라고 한다. 그의 친형 리카르도 브로스키 역시 실존하는 작곡가였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와 <살리에르> 등으로 이미 자신들의 창작능력을 증명한 HJ컬쳐가 또 한 번 '일'을 냈다. '웰메이드' 창작뮤지컬의 산실로 급부상하고 있는 HJ컬쳐가 2015년 첫 작품으로 뮤지컬 <파리넬리>를 지난 17일 공개했다. 뮤지컬 <파리넬리>는 바로 전설적인 카스트라토, 카를로 리카르도의 삶을 조명한 뮤지컬이다.

영화 <파리넬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뮤지컬 <파리넬리>

 지난 17일, 뮤지컬 <파리넬리>의 커튼콜 장면. 카운터 테너인 루이스초이는, 카스트라토 파리넬리를 멋지게 소화한다.

지난 17일, 뮤지컬 <파리넬리>의 커튼콜 장면. 카운터 테너인 루이스초이는, 카스트라토 파리넬리를 멋지게 소화한다. ⓒ 곽우신


뮤지컬 <파리넬리>는 1994년 작품인 영화 <파리넬리>와 기본 플롯이 유사하다. 두 작품 모두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다소 변주는 있으나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 자체를 거스르는 부분은 별로 없다. 뮤지컬과 영화 모두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카스트라토가 된 카를로 브로스키가 주인공이며, 음악적으로 뛰어나지 않은 자신을 한탄하며 동생의 그림자에 숨어 사는 리카르도가 나온다.

주체는 다르지만 헨델의 악보를 훔치는 장면도 나오고,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울게하소서'를 파리넬리가 부르는 부분이 등장한다. 심지어 형을 떠나 스페인으로 향한 카를로를, 리카르도가 찾아가는 부분 역시 비슷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우선 주변인물들에 변화를 줬다. 영화 <파리넬리>에서는 카를로를 위해 헌신하는 여성 알렉산드로가 등장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아예 빠졌다. 대신 남장여자 안젤로라는 창작 인물이 투입됐다. 실존 인물이자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포포라는 뮤지컬에서 제외됐다. 대신 흥행사 래리펀치는 뮤지컬에만 등장하는 창작인물이다.

헨델의 성격도 차이가 있다. 영국에서 왕립 오페라단을 위한 작품을 썼던 헨델은, 우수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실제 역사와 유사하게 파리넬리와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뮤지컬에서는 안젤로의 든든한 후원인으로 나오는 대신, 파리넬리와 직접 대립하는 부분은 없다.

무엇보다도 스토리의 포인트가 다르다. 자신의 의사를 거스른 '거세'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영화에서의 거세는 '욕망의 거세'였다. 때문에 영화 속 파리넬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탐닉한다. 여자를 안고 싶으나 안지 못하고, 아이를 갖고 싶으나 갖지 못한다.

그러나 뮤지컬에서 거세된 욕망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뮤지컬 <파리넬리>에서 주인공은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욕망은 가지고 있으나, 무엇보다 더 큰 욕망은 자아실현의 욕구다. 화려한 기교로 겉치장만 있는 음악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한다.

영화에서도 음악에 대한 갈등이 나오지만 보다 비중 있게 처리되는 부분은 사랑에 대한 욕구다. 뮤지컬에도 사랑에 대한 욕망이 표출되지만, 이는 리비도가 아니다. 나만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어 하는 파리넬리의 삶을 더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뮤지컬 <파리넬리>의 커튼콜 장면. 영화 <파리넬리>와 마찬가지로 뮤지컬에서도 리카르도는 스페인으로 떠난 카를로를 찾아 나선다. 몇 년 후의 재회, 영화와는 달리 뮤지컬에서는 리카르도가 새로 지은 오페라가 화해의 매개체가 된다.

뮤지컬 <파리넬리>의 커튼콜 장면. 영화 <파리넬리>와 마찬가지로 뮤지컬에서도 리카르도는 스페인으로 떠난 카를로를 찾아 나선다. 몇 년 후의 재회, 영화와는 달리 뮤지컬에서는 리카르도가 새로 지은 오페라가 화해의 매개체가 된다. ⓒ 곽우신


그래서 결말도 다르다. 두 작품 모두 갈등했던 형제의 화해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화해의 매개체가 다르다. 영화에서 리카르도는, 동생을 위해 어렸을 적부터 약속했던 오페라 <오르페우스>를 끝마친다. 카를로는 자신을 찾으러 스페인까지 온 형과 재회한다. 그리고 형의 새 작품이 이전 작품과 달리 훌륭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신 자신이 사랑하는 알렉산드로를 형이 대신 안아준다. 그가 선물한 '아이'가 형제의 갈등을 해결한다. 그리고 <오르페우스>는 불태워진다.

뮤지컬은 다르다. 리카르도는 자격지심을 극복하고 진정성 있는 오페라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 오페라 악보를 들고 스페인으로 동생을 찾아갔을 때, 두 형제는 웃으며 화해의 포옹을 나눈다. 주요 대립지점이 사랑이 아닌 음악이었기에, 그리고 음악을 통한 자아탐색과 실현이 이 극의 메시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만의 인생을 살라... 뻔하지만 어려운 메시지

인생의 주체는 '나'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수많은 '고전'이 그렇게 말하고, 여러 '멘토'가 끊임없이 외친다. 그러나 이토록 식상한 진리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여전히 희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나의 욕망이 나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욕망이 온전히 '나'의 것인 사람은 드물다. 어렸을 적에는 대개 부모의 욕망이 투여된다. 부모의 욕망을 대리로 실현하도록 종용받는 일이 잦다. 서서히 자아가 확립될 시기, 사춘기의 첫 갈등은 대개 여기서 시작된다.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이 아니라 나의 진정한 꿈을 찾기 위한 방황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꿈을 강요받는다. 기성세대의, 사회의, 자본의 욕망이 내게로 투여된다.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개인, 자본을 위해 충실하게 스스로를 겁박하는 노동자까지…. 심지어 부모가 돼도 친부모나 시부모의 바람과 사사건건 충돌한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역사로 봤지만,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욕망 투쟁의 인생이다.

자아실현의 수단은 노동이다. 노동이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나의 하루 끼니를 해결해주는 수단이어서만이 아니다. 노동은 나 스스로의 주체성을 일깨우고, 대상에 나를 투여해 가치를 생산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노동은 신성하다. 우리가 보통 '꿈'에 대해 물을 때, '직업'을 떠올리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노동은 나를 나로써 오롯이 존재하게끔 한다. 그러므로 내가 욕망하는 노동을 업으로 삼기를 모두가 욕망한다.

리카르도 브로스키 지난 17일 첫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파리넬리>의 커튼콜 장면. 리카르도 브로스키를 연기한 배우 이준혁. 그는 '동생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했지만, 실은 자신의 욕망을 동생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 리카르도 브로스키 지난 17일 첫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파리넬리>의 커튼콜 장면. 리카르도 브로스키를 연기한 배우 이준혁. 그는 '동생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했지만, 실은 자신의 욕망을 동생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 곽우신


뮤지컬 <파리넬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사는 이는 아무도 없다. 어렸을 적 타인의 의지로 거세된 카를로는, 카스트라토로서 살아가며 돈과 명예를 얻지만 행복하지 않다. 똑같이 거세됐지만, 자기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기 위해 거세를 선택하고, 이를 노래로 승화시킨 <헤드윅>의 헤드윅과는 전혀 다르다.

뮤지컬 <파리넬리>에서 그가 카스트라토가 된 이유는, '신'을 위해서다. 인간이 아니라 신이 시대를 지배했던 중세적 발상이다. "오, 파리넬리, 신이 선택한 목소리"라고 사람들은 노래하지만 실은 신의 이름을 빌은 종교적 광기다. 번제물로 바쳐진 희생양 중, 기꺼이 그 제단에 오른 자는 없다. 종교적 광기가 삶의 이유가 된 이들이, 얼마나 그 종교 본연의 정신과 동떨어진 행위를 하는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지는 최근 <샤를리 에브도> 테러에서 여실히 증명됐다.

파리넬리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의, 그리고 신의 이름 뒤에 숨은 종교인과 귀족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악기'일 뿐이다. 그는 천국을 노래하고, 신의 영광을 찬미한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저주하고 지옥 같은 삶을 견뎌내야 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만 오페라는 그저 귀족들의 놀음에 지나지 않고, 런던의 민중은 굶주린다. 그에게 돈을 구걸하는 런던의 부랑자가 카를로를 축복한다. "당신의 아내와 아이에게도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이라는 기도를 듣고 카를로는 깨닫는다. 오히려 그 자신이 평범한 가정도 꾸릴 수 없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도 욕망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에게 가수는 직업이다. 그는 재능을 타고 났고, 그 재능을 토대로 노래하는 자다. 자신의 재능와 특기를 살려 노동하는 행위는 건강하다. 그러나 거기에 자신의 욕망이 빠져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카를로는 끝없이 리카르도를 닦달한다. 더 본질적인, 더 아름다운, 더 세련되고 진정성 있는 오페라를 요구한다. 악기의 사명이 연주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그 연주는 악기 자신을 위한, 악기가 고른 곡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사는 이가 아무도 없는 뮤지컬

 뮤지컬 <파리넬리>의 커튼콜. 안젤로 역의 안유진. 안젤로는 창작인물로 영화 <파리넬리>에도 등장하지 않던 인물이다. 영화 <파리넬리>의 알렉산드로 역할과 묘하게 겹치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뮤지컬 <파리넬리>의 커튼콜. 안젤로 역의 안유진. 안젤로는 창작인물로 영화 <파리넬리>에도 등장하지 않던 인물이다. 영화 <파리넬리>의 알렉산드로 역할과 묘하게 겹치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 곽우신


하지만 리카르도 역시 자신의 삶을 사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어렸을 적 동생이 강제로 거세된 순간부터, 동생을 위해 살겠다고 아버지와 약속한다. 아버지의 죽음 후, 이 맹세는 그를 옥죄는 족쇄가 된다. 그는 헨델처럼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페르소나인 동생은 만족시키고 싶다. 그래서 동생만이 소화할 수 있는, 화려한 음악적 기교만 담긴 텅 빈 오페라를 공장식으로 찍어낸다.

그 역시 알고 있다. 자신의 음악은 그런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리카르도는 이미 동생의 그림자에 속박됐다. 그래서 그가 실현할 수 없는 자아실현의 욕망은 다른 욕망으로 풀어낸다. 도박에 돈을 탕진하고, 세속적 욕망에 도취된다. 그 과정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파리넬리에게 억압받는 리카르도가 되려 카를로를 억압한다. 리카르도는 어느새 동생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여하게 된다.

동생을 위해 산다고 하지만 실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된 리카르도. 하지만 그런 삶 역시 온전한 자신의 삶이 아니라 동생의 불행을 매개로만 유지될 수 있는 삶이다. 동생의 행복을 바랐지만 오히려 동생의 불행이 있어야만 존속되는 모순의 고리를 그는 끊지 못한다. 그 고리를 끊어주는 것은 결국, 형을 떠나는 동생이었다.

여장남자인 안젤로 역시 비슷하다. 그의 본명은 마리나다. 자신의 죽은 남동생 안젤로를 위해, 그는 동생의 못 다 이룬 꿈을 대신하기로 했다. 그래서 자신이 안젤로가 돼 동생의 인생을 대신 산다. 불경하다는 이유로 여자는 무대에 설 수 없던 시대, 안젤로는 자신을 남자로 속인 채 카스트라토인 척 오페라 무대에 서야만 했다. 그래서 남성으로 존재할 수 없는 남자 파리넬리와 여자이지만 남자인 척 해야 하는 안젤로의 애정이 더 애틋해진다.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군가의 삶을 대신할 수 없다. 안젤로 역시 이 진부한 진리를 깨닫고 무대에서 내려온다. 재능도 있고, 노래도 좋아하지만 안젤로가 아니라 마리나의 노래를 불러야만 그가 그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여러 단점에도 충분히 박수받을 수작

뮤지컬 <파리넬리>에는 자잘한 단점들이 있다. 예컨대 다소 톤이 튀는 미용실 장면이나 난해한 듯 조야한 일부 의상,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앙상블의 조합이나 관객의 집중을 흐트러트리는 음향이 그렇다. 소재는 독특하지만 스토리 자체가 참신하지는 않다. 일관된 감정선은 평이하게 흘러가는 스토리를 약간은 지루하게 만든다. 래리펀치를 열연한 배우 원종환마저 없었으면 극 전체가 경직될 뻔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고려하고도 충분히 박수를 줄만한 수작이다. 무대에 잔뼈가 굵은 안유진, 이준혁의 호연은 말할 것도 없다. 1막에서는 다소 파리넬리에 묻히는 감이 있었지만, 2막부터는 듀엣을 부르거나 합창을 할 때도 훌륭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빛나는 배우들이다.

특히 파리넬리를 연기한 카운터테너 루이스초이는 등장부터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연기는 다소 서툴지만, 그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그 모든 단점을 지워버린다. 비록 전곡이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루이스초이가 열창하는 오페라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 무대는 충분히 직접 볼 가치가 있다. 그는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카스트라토의 비애를 잘 풀어낸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하지만, 꿈꾸기 참 어려운 시대다. 아직도 나의 인생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여러모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테다. 누군가에게 강요받았던 욕망과 자신의 좌절을 뒤로한 채,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간 어느 가수의 이야기가 있다. 식상하지만 여전히 울림 있는 메시지를 품에 안은 채….

 뮤지컬 <파리넬리>의 포스터

뮤지컬 <파리넬리>의 포스터 ⓒ HJ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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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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