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물등급위원회

영상물등급위원회 ⓒ 영상물등급위원회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무리한 소송을 진행한 것과 다름없는 것인데, 판결이 나왔음에도 아무런 사과가 없다. 마치 어떤 책임도 없다는 태도 같아서 너무 뻔뻔하게 보인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에 대한 등급심의위원을 지낸 한 영화계 인사의 비판이다. 독립영화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이하 '자가당착') 제한상영가 등급분류에 대해 법원의 취소 판결이 나온 가운데 영등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잘못된 등급 심의를 내리고 무리한 소송을 진행한 영등위가 사과는커녕, 재심의를 신청하라는 입장을 최근 밝혔기 때문이다.

영화계 인사들은 "법원의 판결이 난 사안에 대해 영등위가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사실상 상영을 막기 위해 억지 소송을 진행해 행정력을 낭비한 영등위원장과 실무 당사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영등위의 행태가 무례하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최근 영화계가 공론화시키고 있는 영등위 해체론이 힘을 받고 있다.

무리한 소송은 박선이 영등위원장 책임이 많아

정치풍자 영화 <자가당착>은 지난 2011년 6월 처음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고 2012년 9월 재심의를 요청했으나 같은 등급을 받았다. 국내에는 제한상영관이 없기 때문에 제한상영가등급 판정은 사실상 상영금지 조치에 해당한다.

영등위는 1차 심의에서 '특정 정치인의 목을 자르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 등 경멸적, 모욕적 수위가 다분히 의도적이며, 개인의 보편적 존엄과 가치를 현저하게 손상한 것으로 판단한다"며 제한상영가 등급 부여 이유를 밝혔다.

2차 심의에서는 "폭력성이 매우 높다"면서 "영상의 표현 수위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현저히 훼손하고 국민의 정서를 손상할 우려가 있다"며 1차와 같은 등급을 부여했다. 이에 대해 당시 영화단체들은 '<자가당착>의 제한상영가 판정은 영화의 정치적 자유 의지를 구속하는 사례'라며 영등위의 정치적 심의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었다.

제작자인 김선 감독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며 2012년 11월 등급분류취소 소송을 시작했고, 2013년 6월 1심인 서울행정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영등위가 항소하며 2심 법원인 서울고등법원으로 갔고, 지난 2월 영등위의 항소를 기각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영등위가 상고하면서 3심까지 갔으나 대법원은 지난 7월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로 원심을 확정했다. 영등위가 완패한 것이다.

 영화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포스터

영화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포스터 ⓒ 곡사필름


영화계에서는 영등위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를 반복한 것에 대해 등급분류를 담당해야할 기관이 검열기관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부산대학교 서대정 교수는 지난 10월 부산영화제 때 열린 등급심의 관련 포럼에서 영등위의 이 같은 행태를 '무모한 도전'으로 규정하며 "특권적 우월적 지위가 손상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애초 설립취지에서 한참 벗어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영등위의 한 등급 심의위원은 "심의를 했던 사람들도 책임이지만 궁극적 책임은 박선이 영등위원장에 있다"이라며 "패소가 유력한 소송을 무리하게 진행해 비용 등을 낭비한 것은 문제가 있는 데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있는 듯 해 안타깝다"고 개인적 입장을 나타냈다.

"창작가에게 부담만 떠안기려 해 안타깝다"

김선 감독은 "영등위에서 제한상영가를 취소해줄 테니, 재심의를 넣으라는 연락이 왔다"면서 "2012년에 등급신청한 영화에 대한 등급이 취소됐으면 반성하고 알아서 심의를 해주면 될 것을 일말의 미안함도 없이 창작가에게만 금전적·행정적 부담감을 넘기려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감독은 영등위에 '과도하게 제한상영가를 내리고, 2년간 온전한 상태로 개봉할 기회를 박탈한 것, 공공기관으로서 재량권을 일탈 남용해 위법을 행한 것과 이를 통해 국민의 볼 권리 및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에 대해 공식 사과하라'고 7일 사과 요청서를 발송한 상태다.

영화계는 김선 감독의 요청이 당연하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곽영진 영화평론가는 "영등위가 대법원 판결이 난 사안인 만큼 잘못된 심의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심의 비용을 면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의비용을 다시 부담해 재심의를 받으라고 하는 것은 법원 판결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 영화감독은 "정식으로 개봉을 못하고 소송 등을 거치면서 입은 피해가 있는 만큼 사과와는 별개로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등위의 잘못된 등급분류에 대해 제대로 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자가당착>을 제작한 김선 감독이 영등위에 보낸 공식 사과 요청서

영화 <자가당착>을 제작한 김선 감독이 영등위에 보낸 공식 사과 요청서 ⓒ 곡사필름


영화평론가협회장인 동국대 민병록 교수는 "영화인이 아닌 사람이 영등위의 수장을 맡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영화에 대한 이해가 넓고 영화계와 소통할 수 있는 인물이 영등위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등위 측은 "법원의 판결이 났더라도 극장 상영을 위해서는 규정상 재심의를 받아야 한다"고만 밝힐 뿐 사과와 관련해서는 "언급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입장이다. 영등위 관계자는 "위에서 아직 결정 난 사안이 없기에 딱히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자가당착>처럼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등급 심의를 바꿀 수 있었던 영화 <친구사이> 관계자는 "판결이 나온 후에 김조광수 감독이 영등위에 사과를 요구하러 갔었지만 담당자는 사과 한마디 없이 도리어 당당한 태도를 취하더라"며, "법원 판결에 아랑곳없이 영등위가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친구사이>는 2009년 영등위 심의에서 청소년불가 판정을 받았다가 소송을 냈고, 2013년 11월 대법원 판결이 난 이후 재심의를 요청해 15세 관람가로 조정됐다.

영등위 해체하고 민간자율심의기구로 전환하자는 목소리

영등위가 등급분류 문제로 계속 논란을 일으키면서 영등위를 해체시키고 민간자율심의기구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다. 현재 영화평론가협회가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영등위의 심의로 인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영등위 심의위원을 지낸 한 영화계 관계자는 "지금은 심의가 청소년 관객 보호 입장에 맞춰 있으나 제작자들의 입장도 두루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현재의 심의제도가 어떤 식으로든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영등위 자가당착 박선이 등급분류 곡사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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