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금토드라마 <미생>에 출연 중인 가수 겸 배우 임시완

tvN 금토드라마 <미생>에 출연 중인 가수 겸 배우 임시완 ⓒ CJ E&M


바둑이 인생의 전부였지만 프로입단에 실패한 후 고졸 검정고시 출신으로 냉혹한 사회에 던져진 청년 장그래. tvN 금토드라마 <미생>에서 그를 연기하는 배우 임시완을 보면서 한 농구선수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최고였던 레지 밀러다.

축구도 마찬가지겠지만 농구에도 '온더볼 무브먼트(on the ball movement)', '오프더볼 무브먼트(off the ball movement)'라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 하자면, '볼을 가졌을 때의 움직임'과 '볼이 없을 때의 움직임' 정도로 옮길 수 있겠는데 카메라는 주로 공을 쫓기 때문에 경기장 밖의 우리들은 주로 '온더볼 무브먼트'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감독과 코치들은 '오프더볼 무브먼트'를 중요하게 본다.

NBA 역사에 길이 남을 슈팅가드인 레지 밀러는 학창 시절에는 센터를, 대학에서는 포워드를 보았으나, NBA 데뷔 후에는 포워드 포지션에서 슈팅 가드로 전향하게 된다.(일반적으로 농구에서 포지션별 키와 체격 순은 센터>파워포워드>스몰포워드>슈팅가드>포인트가드 순이다.) 워낙에 깡말라서 포워드 포지션의 다른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 버티기는 힘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슈팅가드는 농구에서 가장 화려함을 요구하는 포지션인데, 레지 밀러에게는 그것도 없었다. 점프력도 별로였고, 드리블 실력도 다른 슈팅가드들에 비하면 몇 수 아래의 수준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의 화려한 패스도 없었고, 스피드도 평범한 수준이었다. 포워드 포지션에서도 힘에 부치던 수비는 슈팅가드 포지션에서조차 힘에서 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BA 역대 슈팅가드를 논할 때 언제나 TOP10, 간혹 TOP5의 수준으로 그가 손꼽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일단 필살의 3점슛 덕이다. 몇 해 전 레이 앨런이란 선수가 그 기록을 깨기 전까지 레지 밀러는 NBA 통산 3점슛 성공 횟수 1위 기록의 보유자였고 그만큼 3점슛의 대명사였다. 80년대 중반까지 NBA에서는 '왜 굳이 더 먼 거리에서 확률 낮은 슛을 던지는가' 하여 3점슛은 공격의 주된 옵션이 아니었으나 지금 NBA의 가장 기본적인 공격 옵션이 3점슛이 되도록 패러다임을 바꾼 데에는 레지 밀러의 등장도 일조한다.

하지만 레지 밀러가 더욱 찬양받고 인정받는 까닭은 슛을 쏘기 전에 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최고였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프더볼 무브먼트'가 역대 최고였던 선수였다. 그는 공이 없을 때 가장 빠른 선수였고 가장 얄미운 선수였다. 쉴 틈도 없이 공격 코트를 돌아다니며 상대팀의 수비를 엉망으로 꼬아 놓았고 자신의 수비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상대팀의 헝클어진 수비를 틈타 자신의 슛 기회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그는 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3점슛을 쏠 수 있었고 이것이 그의 위대한 3점슛 통산기록을 쌓아 올릴 수 있게 한 것이다.(이 지점에서 슬램덩크의 신준섭이 생각난다면 정확하다. 많은 농구팬들은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가 신준섭은 레지 밀러를 모티프로 삼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러나 '오프더볼 무브먼트'가 더욱 중요한 까닭은 해당 본인이 공격 기회를 잡기 위한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의 중요성은 오히려 볼을 가진 자기편을 살리는 데에 있다. 즉 '오프더볼 무브먼트'는 '온더볼 무브먼트'에 기여하는 데에서 빛이 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오프더볼 무브먼트'는 상대팀의 수비를 헝클어 놓기 때문에 '온더볼 플레이어', 즉 볼을 가진 선수의 공격을 훨씬 더 용이하게 만든다.

수비하는 팀으로서는 헝클어진 수비를 재정돈해야 하며, 또 '오프더볼 무브먼트'를 하고 있는 선수의 슈팅 능력이 뛰어나다면 수비시 그 선수에게 신경이 쏠리게 된다. 바로 그때 수비의 틈이 생기고 '온더볼 플레이어'는 보다 편한 방법으로 공격을 할 수 있게 된다.

레지 밀러의 팀 인디애나 페이서스가 그가 있는 동안 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레지 밀러의 '오프더볼 무브먼트'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가 상대적으로 미진한 수상 실적과 기록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슈팅가드의 반열에서 거론되는 까닭도 바로 '오프더볼 무브먼트' 덕분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나 아무것도 없을 때 더욱 빛나던 선수.

화려한 배우들 옆 '미생'의 배우가 빛나는 이유

 tvN 금토드라마 <미생>의 출연진

tvN 금토드라마 <미생>의 출연진 ⓒ CJ E&M


<미생>의 임시완을 보면서 레지 밀러가 떠올랐다면 이는 너무 큰 비약일까? 그러나 임시완이라는 배우는 대사가 있을 때보다 대사가 없을 때 더욱 빛난다. 원작에서의 장그래와는 일견 또 다른 모습의 장그래이지만, 그것이 실망스럽지 않은 것은 임시완의 '오프더볼 무브먼트'가 훌륭해 보이기 때문이다.

나약해 보이지만 어쩐지 강단은 있어 보이는 눈빛, 무언가 주저대는 입술, 햇볕 한 번 쐬어 보지 못했을 것 같은 낯빛, 불편해 보이는 넥타이, 얹어 놓은 가방끈이 흘러내릴까 걱정되는, 옷걸이마냥 처진 어깨, 몸에 맞지 않는 와이셔츠와 통바지, 대사가 없을 때조차 그의 얼굴과 몸집이 연기를 하고 있다.

저절로 나도 모르게 그를 빤히 쳐다보게 하고, '아, 정말이지 술 사주고 싶다!'라는 말이 튀어 나오게 만든다. 원작에서의 '독함'이 상대적으로 희석된 대신 '나약해 보임'이라는 이미지를 보다 진하게 탔다. 그리고 그 맛이 나쁘지 않다. 그의 대사가 아니라 그의 표정이 자꾸 어른거린다.

임시완이 더욱 빛나는 순간은 바로 '온더볼 플레이어'와 함께할 때이다. 이 드라마에는 대사가 화려한 배우가 많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방향으로 대사의 감칠맛을 살리는 화려한 개인기를 가진 오상식 과장(이성민 분), 덩치에 맞지 않는 얄쌍한 목소리와 말투가 재미있는 김동식 대리(김대명 분), 말투 한 마디 한 마디가 톡톡 튀는 한석율(변요한 분), 이 드라마의 화려한 베리에이션의 대사를 책임지고 있는 플레이어 옆에는 임시완의 장그래가 있다. 주저하는 입술과 함께.

그 인물들과 함께 잡힌 투샷에서도 나는 자꾸 임시완의 표정을 살피게 되고 그 표정 안의 심경을 이해하려 든다. 그의 '오프더볼 무브먼트'에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함께 있는 배우들의 화려한 '온더볼 무브먼트'들도 빛이 난다. 대사들이 맛이 난다. 레지 밀러의 '오프더볼 무브먼트' 덕분에 다른 선수들이 보다 편안히 득점에 성공하듯이.

 지난 17일 첫 방영한 tvN <미생> 1회 한 장면

tvN <미생>의 장그래(임시완 분). ⓒ CJ E&M


그러나 아직 임시완이 대사를 할 때는 사실 좀 '깬다'. 그의 배우로서의 '딕션(발음)'이 훌륭하지는 않은 탓일 것이다. 때로는 너무 어색하기도 하고 때로는 '저건 도대체 어떤 감정을 표현한 걸까?' 의문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고 그의 '오프더볼 무브먼트'에 감탄을 하고 있는 터에 그의 모자란 '온더볼 무브먼트'도 감싸 줄 아량이 생기게 된다.

임시완이라는 사람이 보다 발전을 하게 되면 '오프더볼 플레이어'가 아닌 '온더볼 플레이어'로서도 빛을 발하게 될까? 그것은 잘 모르겠고 그다지 예상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아직 완전히 살아 있지 아니한 '미생(未生)'의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미생>이라는 드라마도 그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화려해 보이는 오상식 과장이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인디애나 페이서스란 팀에서 저메인 오닐이, 잘렌 로즈가, 론 아테스트가 레지 밀러보다 더 많은 득점을 했을 때에도 그 팀은 레지 밀러의 팀이었다.

이게 다 임시완의 예쁘장한 얼굴과 나약해 보이는 몸집 때문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램덩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능남고의 변덕규가 "난 그저 덩치만 큰 녀석이라고 뒤에서 험담하는 것도 알고 있어요"라며 자책할 때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덩치만 클 뿐이라고? 그걸로 충분하지 않니? 체력이나 기술은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다. 하지만 널 크게는 할 수 없어! 네 키는 정말 멋진 재능이다!"(이 대목에서 나는 능남의 감독이 참 명장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임시완이 가진 것이 예쁘장한 얼굴과 나약해 보이는 몸집뿐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모는 정말 멋진 재능이다. 그것은 그가 잘 생겼네, 어쩌네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생>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고 난 어떤 지점에 중점을 두고 지켜보게 될까? 처음 레지 밀러의 팬이 되었던 순간처럼 나는 임시완의 팬이 되어 가고 있다. 나이지리아 농구선수 하킴 올라주원같이 유려한 오상식 과장의 대사들도, 앨런 아이버슨같이 화려한 한석율의 플레이도 모두 나의 재미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나는 임시완의 '오프더볼 무브먼트'를 바라보며 이 드라마를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나아가 레지 밀러가 '오프더볼 무브먼트' 후에 꽂아 넣던 3점슛을 기대하듯 임시완의 필살의 결정타도 기대하게 될 것 같다.(아직은 못 본 것 같다.) 그리고 '그래, 그래, 장그래!'를 외치게 되기를.

임시완의 <미생>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개인 페이스북에도 게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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