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KBS 개그콘서트에는 <연애능력평가>라는 코너가 있다. 여성과 남성의 대화 내용을 보여주고 여성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들을 남자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코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여자친구는 놀러 나간 남자친구에게 "나 신경 쓰지 말고 놀아"라고 흔쾌히 말한다. 그러고는 3시간 뒤 SNS에 '남자친구가 있는데 왜 외롭지?'라는 글을 올린다. 여성들도 대체로 웃어넘기는 분위기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여성의 이해할 수 없는 요구나 행동에 남자가 적응 못 하고 좌절하는 일종의 도시괴담(?)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이야기다.

영화 <나를 찾아줘>도 일종의 연애능력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결혼능력평가라고 부르자. 여기서 여자가 남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환상의 충족'이다. 여자가 만든 환상에 남자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결혼 생활과 완벽한 남편이라는 환상. 물론 여자만 환상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자가 만드는 환상과 남자가 만드는 환상에는 규모적 차이가 있어서 남자는 결코 여자의 환상을 따라잡지 못하며, 거기에서 남자의 좌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정신분석학적 가설이기에 글을 읽는 사람의 너그러운 관용이 필요할 게다. 이 가설은 내 생각이 아니라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의 것이다.

아내의 환상과 좌절하는 두 남자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명제 "성관계는 없다"를 자주 인용한다. 일대일의 성관계는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성관계는 '환상'이라는 제삼자의 참관 속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성관계를 남녀관계 전반으로 확장시켜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환상의 규모와 정교함 등에서 남자의 것이 여자의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거다.

지젝은 이와 관련해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을 인용하곤 한다. 이 영화에는 부부가 등장하는데, 어느 날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의 '정신적 간음'을 고백한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남편은 심란해진다. 그러던 와중에 남편은 우연한 기회를 얻어 사이비 종교집단의 제의에 가까운 성적 오디세이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연스럽게 그 조직에 융화되지 못하고 쫓겨난다. 결국 남편은 가정으로 복귀한다.

지젝은 이 이야기를 남성이 여성의 환상에 대응하려고 시도했다가 결국 좌절하고 마는 이야기로 읽는다. <나를 찾아줘>에서 닉의 반응은 대응이 아니라 도망이다.

아내 에이미는 자기가 원하는 결혼 생활의 그림을 그려놓고 남편 닉을 거기에 속박한다. 어메이징 에이미(amazing amy)에 걸맞은 어메이징 닉(amazing nick). 시간이 흐르자 남편은 그 그림의 퍼즐이 되는 데 실패하고 바람을 피우며 여자의 환상 밖으로 도망가려 한다. 물론 그는 결국 실패한다. 두 영화의 남편들은 영화 말미에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아내의 환상에 직접적으로 대응하거나, 도피하거나.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둘은 모두 실패한다. <나를 찾아줘>와 <아이즈 와이드 셧>은 훌륭한 상호 레퍼런스다.

환상을 투영하는 미디어라는 거울

<나를 찾아줘>는 미디어를 끌어들여 환상의 거짓성을 부각시킨다. 미디어는 환상의 존재, 유지, 확장에 필수적인 요소다. 환상은 구경꾼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다.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나는 찍힌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현대의 존재양식이다. 미디어는 에이미의 환상을 수렴하고, 그것을 현실로 바꿔준다. 닉이 살인자가 되어버린 에이미에게 공포를 느끼면서 결국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에이미가 만들어낸 '재결합한 부부의 환상'이 미디어에 의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편을 사형장에 보내고 자신마저 목숨을 끊을 작정이었던 에이미가 닉을 용서하게 된 연유는 TV 속에서 자신의 환상을 다시 봉합해주는 남편의 '사과'를 봤기 때문이다. 닉의 사과가 거짓이라는 것은 에이미에게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기만적 사과는 미디어에 나왔기에 진실이 됐다.

<나를 찾아줘>는 다분히 한국적인 영화다

결국 <나를 찾아줘>는 지나친 환상을 품고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부의 이야기이며, 그것에 실패해 좌절하는 비극이며, 미디어를 통한 자기기만으로 봉합하는 희극이다. 물론 여성의 환상이 남성의 그것보다 더 크고 정교하다는 것은 하나의 정신분석학적 가설이며, 나를 찾아줘는 그 가설을 전제로 만들어진 영화다. 누구의 환상이 더 크건, 결혼이 부부의 환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 것 같다.

<나를 찾아줘>는 한국 관객에게 할리우드판 <사랑과 전쟁>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환상이 참여한 기만적 남녀관계는 국적을 불문하고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끊임없이 이성을 만나고 결혼을 하는 것은 환상의 존재를 일부분 인정하고 환상 이상의 것을 찾기 위한 노정을 하고 싶은 것일지 모른다.

다만 환상이 결혼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경구는 그래서 존재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한국의 결혼 문화에는 엄청나게 큰 '환상 거품'이 껴있다. 혼수 때문에 파혼하는 일은 주위에서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일이다. 30대 초반의 부부가 집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을까? 결혼 전에 학자금 대출이라도 다 갚았으면 다행일 것이다. 완벽한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이 '현실의 사랑'을 침범하는 상황이다.

한국 결혼에 낀 환상 거품에는 당사자 커플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자의 부모들의 환상까지 그 결혼이 품어야 한다. 건강한 결혼이 될 리 만무하다. 거품이 꺼지고 현실이 다가올 때, 에이미처럼 부서지지 않을 수 있을까. 혹은 닉처럼 좌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찾아줘>는 이 땅에서 다분히 현실적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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