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금토드라마 <미생> 촬영 스틸컷. 장그래 역의 배우 임시완.

tvN 금토드라마 <미생> 촬영 스틸컷 ⓒ CJ E&M


후줄근한 양복, 머리 하나는 작은 왜소한 몸집, 자신만이 이방인듯한 표정과 눈빛, 원 인터내셔널에 이른바 '낙하산'이 되어 출근한 장그래(임시완 분)는 처음에 그랬다. 쟁쟁한 스펙을 가진 동료들 사이에서 고졸 검정고시라는 경력을 가진 그가 종합상사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좌절은 그가 이전에 프로 바둑 기사로 입문하지 못했던 좌절을 복기하게 만들었다. 과거 자신이 겪었던 패배가 지금의 자신을 규정하여 그를 또 좌절에 빠뜨렸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장그래가 바뀌어 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지난 날을 '최선을 다하지 않아 실패한 것'이라고 치부했던 그가 바둑판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졸 사원들이 수두룩한 종합 상사에서 생존의 돌을, '승부수'를 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별거 아닌 딱풀 때문에 장그래가 오해를 받고 전무(이경영 분)의 지적까지 받게 된 사건에서 영업 3팀 오상식(이성민 분) 과장은 '우리 애'라는 말로 은연 중에 장그래를 자신의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또 경험을 앞세운 변석률(변요한 분)에게 사사건건 무시당하는 듯한 장그래에게 태풍의 핵을 빗대어 무작정 그의 수에 말리지는 말라는 충고를 전하기도 한다.

자신을 받아들여 준 오상식에게 연서(?)로 감사함을 전하기까지 한 장그래는 그의 충고에 고무된다. 그리고 초를 다투며 승부를 가렸던, 배수진의 전쟁과도 같은 바둑판에서 승부사로 길러졌던 자신의 경험을 길어 올린다. 더는 어수룩한 낙하산이 아니다. 비록 동료 인턴 사원들이 무시하는 경력의 소유자지만, 남들이 공부를 하고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는 동안 오로지 승부를 위해 수를 놓았던 시간의 경험을 되살려 낸 것이다.

흑돌과 백돌의 승부의 세계가 종합상사 인턴 장그래에게 산 경험이 된다. 조치훈·조훈현 등 숱한 명인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결국은 홀로 바둑판에서 수를 결정해야 했던 그 시간이 이제 대기업 낙하산이 된 장그래의 승부수가 된다.

 tvN <미생>의 주요 장면들

tvN <미생>의 주요 장면들 ⓒ CJ E&M


그리고 장그래의 바둑을 통한 경험은 이제 오상식에게 배움을 준다. 종합상사라는 전쟁터에서 늘 이기는 싸움에만 익숙한 탓에 물러나기거나 무릎 꿇기를 주저하던 그에게, 때로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물러나는 것이 또 하나의 승부수라는 것을 장그래는 역으로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한석률과의 PT 과정에서 '그저 밀려나지 말 것'만을 주문하는 오상식을 넘어 장그래는 무작정 한석률을 누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한석률이 그렇게 내세우는 '경험'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또 하나의 승부수가 될 수 있음을 장그래는 십여년의 바둑 수련생의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tvN <미생>은 그 누가 보기에도 말이 안되는 검정고시 출신의 낙하산 장그래가 종합상사 원인터내셔널에서 그의 숨겨진 경력을 통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과정을 그려낸다. 지난 회까지 그저 실패담에 불과했던 그의 숨겨진 이력, 즉 십 여년의 한국 기원 연구생의 경험은, 이제 그저 쓰라린 추억이 아니라 종합상사 직원이 될 만한 경험치로 손색없는 '스펙'이 된다.

동시에 그를 통해 <미생>은 학력을 통해서만 증명되는 우리 사회의 경력들이 얼마나 일면적인가를 보여준다. 비록 프로 바둑 기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장그래의 세월이 공부에만 매달려 학력을 쌓은 동료 인턴 사원들에 밀리지 않음을, 때로는 그들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생존력 있음을 드라마는 증명해 낸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둑의 한 수를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냈던 원작 만화 <미생>과는 달리, 드라마 <미생>은 구체적인 바둑 이야기를 배제하여 때로는 드라마 속 대사들을 그저 '명언'이나 '경구'처럼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시청자의 대부분이 바둑에는 문외한이라는 점을 배려한 것이겠지만, 실제 바둑판이 보여줄 수 있는 '인생의 묘미'가 드라마 속에선 사라지면서 '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장그래의 매력이 원작에 비해 반감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장그래가 경쟁만을 내세운 종합상사에서 자신의 과거를 바탕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뭉클한 감동을 준다. 장그래를 그저 패배자로만 여기는 원인터내셔널 직원 및 인턴 사원의 협소한 시야, 나아가 결코 평범한 세상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스펙 좋은 그분'들의 탁상공론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세간의 잣대로만은 쉽게 측정할 수 없는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십 여년의 연구생 생활을 복기하며생존하는 장그래의 모습이, 그래서 더 가치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미생 임시완 이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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