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정국'이 장기화 되고 있다. 단원고 유가족들이 원하는 특별법 제정에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난색을 표하고 있는데다가, 사이에 낀 새정치민주연합 또한 제대로 된 중재에 나서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만을 반복하고 있는 탓이다. 세월호를 둘러싼 갈등 양상은 대중문화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영화 <해무> 보이콧 논란이다.

'해무' 보이콧 논란, 도대체 왜?

경찰 충돌 후 건강 악화 된 유민아빠 세월호특별법제정 촉구 단식농성 39일째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21일 오전 서울 광화문 단식농성장에서 전날 청와대 앞에서 경찰과 충돌로 인해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특별법제정 촉구 단식농성 39일째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21일 오전 서울 광화문 단식농성장에서 전날 청와대 앞에서 경찰과 충돌로 인해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 이희훈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뮤지컬 배우 이산이 자신의 SNS에 유가족 중 한 명인 김영오씨의 단식을 두고 "유민이 아빠라는 자야, 그냥 단식하다 죽어라. 그게 네가 딸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고, 전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다. 죽어라"라는 막말을 쏟아내자, 여기에 정대용이라는 단역 배우가 "황제단식"이라며 동의를 표한 것이다.

이 글은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져나갔고 수많은 네티즌의 공분을 샀다. 정치적 색깔을 떠나 자식 잃은 아비의 단식을 이런 식으로 천박하게 폄하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비판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글을 올린 이산은 물론이고 동조하는 댓글을 단 정대용이 십자포화를 맞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다.

그런데 상황이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다. 정대용이 최근 상영 중인 영화 <해무>에 출연한 단역 배우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네티즌들 사이에서 <해무> 보이콧 논란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의도는 단순하다. <해무>를 보이콧함으로써 정대용의 연예 활동에 제동을 걸고, 그에게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겠다는 이유에서다.

<해무> 보이콧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정대용은 부랴부랴 자신의 SNS에 장문의 사과와 변명을 올렸다. 그는 25일 오후 "황제단식" 발언 논란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것은 내 잘못이다. 아파하고 힘들어 하시는 세월호 유가족 분들과 생사를 오가며 힘겹게 단식을 이어가시는 김영오 님께 무릎 꿇어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지난 겨울 추위와 싸우며 엄청난 제작비를 들이고 훌륭하고 멋진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로 개봉한 영화 <해무>가 보잘 것 없는 단역 한 사람인 나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 있어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면서 "내가 저지른 잘못의 죄책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반성하며 후회와 뉘우침의 날로 며칠을 밤새우며 괴로워하며 지냈다. 30여년 무명배우이지만 사랑했던 직업을 내려놓기로 결정했다"며 은퇴할 것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네티즌의 분노는 가시지 않고 있다. 수세에 몰리자 억지 사과를 했다는 비판부터 인과응보라는 비아냥까지 쏟아지고 있다. <해무> 보이콧 움직임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재빨리 수습에 나선 정대용은 물론이거니와 얼떨결에 그와 엮이게 된 <해무> 측 또한 난감하기 이를데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해무' 보이콧은 '애국'이란 이름의 '광기'다

 영화 <해무> 스틸 컷

영화 <해무> 스틸 컷 ⓒ (주) 해무


그러나 이 정도면 됐다. 이성을 되찾고 사안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다. 정대용은 <해무>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잠시 얼굴을 비춘 단역 중의 단역이다. 그에 대한 분노를 <해무> 보이콧으로 푸는 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유치하다. 정대용에 대한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바 아니지만 이런 식의 대응은 복수와 증오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해무>의 제작자인 봉준호 감독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를 주장하며 릴레이 단식에 동참했고, <해무>에 출연한 문성근은 야당 대표까지 지낸 전통적인 야권 지지자이자 세월호 유가족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대표적 배우다. 정대용 때문에 <해무>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 이유라면, 봉준호와 문성근 때문에 <해무>를 봐야 한다는 것도 설득력을 얻는다. 이거야말로 아이러니한 상황 아닌가.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해무>에 출연한 단역배우 정대용이 아니라 영화 <해무>가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는 메시지다. 또 지금은 만만한 상대에 돌을 던지고 침을 뱉을 것이 아니라 세월호 사건의 본질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볼 때다.

세월호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 황금주의에 물들은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을 당연시했던 부조리한 사회가 만들어 낸 비극이다. 그 속에서 어린 학생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만 철썩 같이 믿었다가 바다 속에 수장됐고,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들은 변명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심지어 국민의 절반도 이 험악한 사회에 대해 일말의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영화 <해무>는 바로 작금의 부조리한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영화다. 서서히 가라앉는 작은 배 안에서 서로의 욕망에 굶주려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치열하게 다투고 날뛰는 모습을 보노라면 징글징글한 2014년 대한민국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까지 든다. 이런 현실을 담아내고 있는 영화를 고작 단역 배우의 망언 하나 때문에 외면하겠다고? 이거야말로 애국을 가장한 광기다.

물론 이산과 정대용에 대한 단죄는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자식 잃은 부모에게 막말을 쏟아낸 것에 대한 책임은 그들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다. 그러나 지금 이런 식의 복수는 잔인하다 못해 치졸하고, 통쾌함을 느끼기엔 희생양이 너무 엉뚱하다. 지금이라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정말 분노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2014년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상처만 남는 복수와 증오만을 반복하는 이 시대. 이 일그러진 시대를 우리는 참 재미없게 살아가고 있다.

해무 정대용 이산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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