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더 데빌> 캐릭터 포스터

뮤지컬 <더 데빌> 캐릭터 포스터 ⓒ 설앤컴퍼니


신을 숭배하기보다는 자본을 숭배하기는 '자본주의의 정글' 월스트리트. 내가 매수한 종목이 부디 탈이 나지 않고 환율은 예측한대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자본이 신이 되는 물신주의가 가득한 곳이 바로 월스트리트다.

그럼에도 뮤지컬 <더 데빌>의 주인공, 증권맨 존 파우스트는 유물론이 지배하는 세상을 거부한다. 도리어 월스트리트의 세상과는 맞지 않을 듯한 신의 존재를 상정한다. 아마도 이는 <더 데빌>의 원작 <파우스트>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데빌>은 <파우스트>를 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 재해석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존 파우스트가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에서 벗어나 유신론이라는 자장 안에 안착할 수 있던 건 그레첸의 공이 크다. 극 중에서 그레첸은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로 대변될 X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가를 존 파우스트보다 제일 먼저 감지하고 경고하는 인물이다. 항상 초월자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면서 존 파우스트가 신의 영향력 아래 있기를 바라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작품 속 세계관이 신이 있다는 걸 가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니 상투스, 키리에, 도미니와 같은 라틴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창세기의 표현, 아가서의 대사, 그레첸이 노래하는 "144,000의 사람들", "이마의 표"와 같은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나 찾을 수 있는 표현이다. <셜록 홈즈 2: 블러디 게임> 이후로 종교적 상징이 강한 뮤지컬이다.

<더 데빌>은 <풍월주>마냥 극도의 미니멀리즘 방식의 무대를 구현하고 있다. 그 흔한 영상 투사 방식, 혹은 <드라큘라> 속 4중 회전 무대와 같은 다채로운 무대 연출은 뒤로 한 채 철제 빔으로 된 무대 하나를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다. 무대 위 조명은 <스타 워즈> 시리즈에서 제다이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광선검처럼 강렬한 직선으로 표현된다. 관객이 편안함보다 긴장감을 느끼는 건 이 수평 혹은 수직으로 내리꽂는 조명 때문이다.

X는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악마라기보다는 존 파우스트가 심리적으로 투사한 인물에 가깝다. 존 파우스트는 증권맨임에도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 돈을 만진 인물이 아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돈을 굴려서 투자자에게 돌려주기를 바라는 양심적인 증권맨이다. 하지만 그는 1987년에 일어난 블랙먼데이로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착한 계기로 행동한 사람에게 왜 하늘은 블랙먼데이라는 나쁜 결과로 되돌려 주는가에 대한, 뿌린 대로 거두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회의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신은 블랙먼데이로 어려움을 겪는 존 파우스트를 살펴주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렇듯 신의 침묵에 회의를 품는 존 파우스트에게 X가 나타나 물질적인 혜택을 제공한다는 설정은 X가 단지 하늘에서 떨어진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존 파우스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심정을 반영하는 투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참신한 초반부 설정에도 <더 데빌>은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뮤지컬이 아니다. <블러드 브라더스>처럼 연극적인 대사가 많은 뮤지컬이라면 모를까, 밴드 음향에 묻혀 배우들의 발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가사 전달이 안 된다는 걸 의미함과 동시에 가사 안에 내포한 중의성을 관객이 제대로 해석하기에는 버겁다는 의미다.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전라 연출로 회자되었던 <살로메> 만큼의 파격은 아니지만 <스프링 어웨이크닝> 이후로 파격적인 연출이 시도된다. 하지만 가사 전달이 명확히 되지 않으면서, 파격적인 연출은 극 전개에 힘을 실어준다고 보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존 파우스트가 왜 그토록 이타적인 삶에 집착해야 했을까에 대한 동기, X의 뚜렷한 악마성의 부재 등은 각본의 문제로 보인다. 다만 원작에서는 극히 수동적인 인물인 그레첸이 적극적인 인물로 묘사된 점, 귀에 꽂히는 곡이 1막과 2막에 각각 하나 이상 되는 건 발군의 성과로 평가된다.

더 데빌 블러드 브라더스 파우스트 드라큘라 셜록 홈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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