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해피투게더> 화면 갈무리(좌),   MBC <나혼자산다> 화면 갈무리(우)

KBS, <해피투게더> 화면 갈무리(좌), MBC <나혼자산다> 화면 갈무리(우) ⓒ KBS, MBC


국내 방송에 나오는 외국인 출연자들은 유창한 우리말과 함께 자신의 삶 속 한국 문화를 체험이 아닌, 이미 스며든 현실의 일부로 드러낸다. 제 안의 한국인을 한껏 뽐내는 것이다. MC들의 작위적인 멘트와 박수갈채에 감탄을 강요받지 않아도 그들의 한국어 센스와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다. 되레 역설적으로 외국인의 습성이 완벽하게 빠진 토종 한국인 같은 모습에 이질감을 느낀다.

실제로 게스트로 참여하는 외국인들에게 주어지는 단골 멘트는 '나 이럴 때 완전 한국 사람인 것 같다' 혹은 '가장 인상 깊었던 한국 문화'와 같은 것이고, 그들은 질문을 넘어 질문의 의도에 부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들 안의 한국인을 끌어낸다. 우리는 결국 그들을 통해 우리를 본다.

그러나 특정 외국인 게스트를 두고 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없이 마냥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미디어에서 차용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들을 그저 보다 객관적 시선에서 우리를 관찰하기 위한 거울 혹은 하나의 프레임과 같은 도구로 활용하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물론 그들의 의견 하나하나는 문화적 관성에서 벗어난 유용한 시선이기에 매체를 탈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미디어의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구제하고 상호적 이해를 전제하면서 '한국에 대한 피터의 생각'을 듣고자 그와 그의 배경에 오랜 시간 전파 낭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령 그 외국인이 살아온 환경이 궁금하고 그 나라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교양 프로그램을 찾아 시청하는 것이 모두에게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일 것이다.

외국인을 우리 그릇에 담는 방식, 변화가 필요해

그러나 외국인 스타를 활용할 때 내세우는 명분과 프로그램의 방향이 서로 반대의 지점을 향하고 있다면, 게다가 출연자의 의도와 관계 없이도 사회적으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면 어느 쪽이든 잠시 멈춰 생각해 봐야한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150만 명(안전행정부 집계) 이상의 외국인이 거주 중이다. 이는 대전, 광주와 같은 광역시 인구를 넘어서며 통계적으로 인구의 100명 중 3명꼴인 셈이다. 더 이상 마냥 신기한 소수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실체고 이웃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를 관찰하거나 인위적인 유착 관계를 확인하고자 하는 강박은 현실 속 그들을 자꾸만 브라운관 너머의 허상(시뮬라크르·Simulacre)의 수준에 묶어둔다.

한국에 대한 호감과 친근함을 표하는 출연진들과 달리 현실 속 제인과 줄리아는 김치를 싫어할 수도, 사교적이지 않아 한국인에게 친절하거나 미소 짓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며 그저 우리 뇌리 속 견본, 혹은 시뮬라크르의 모습과 다를 뿐이다. 그들이 한국의 문화를 싫어해도 절대 잘못은 아니며 그런 그들에게 우리가 반감을 가질 권한 또한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외국인들에겐 경쟁하듯 한국 문화를 예찬하는 모습들이 부담으로 여겨질 것이다.

물론 출연진은 자의에 의한 발언이겠지만 우리가 판을 깔아준 측면도 없지 않다. 묵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외국은 분명 매력적인 소재며 지리적, 민족적으로 폐쇄성을 지닌 우리나라에겐 더욱 그렇다. 미디어가 절대 놓칠 리 없는 테마다. 그러나 외국이든, 외국인이든 이제 그것을 '우리'의 그릇에 담는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

'비정상회담', 국가 벗어나 개인 드러나는 토론

 JTBC <비정상회담>의 한 장면.

JTBC <비정상회담>의 한 장면. ⓒ JTBC


11개국 청년들이 출연하는 JTBC 토크쇼 <비정상회담>은 그러한 측면에서 꽤 건강한 시도로 보인다. 포맷의 상당부분이 과거 KBS <미녀들의 수다>와 유사하다. 이에 대해 제작진도 신경을 많이 쓰는 듯 보이며 실제 제작발표회에서도 직접적으로 차이에 대해 언급했다.

햇수로 8년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그 시절보다 외국인의 수도 현격히 많아졌고, 그들의 한국어 실력 또한 상당 수준이기 때문에 시청자들 또한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원한다는 말이 핵심이었다. 이에 맞춰 <비정상회담>은 단순히 에피소드를 전달하는 것 이상으로, 한 가지 주제를 두고 토론한 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청춘들의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의견을 제시하겠다는 입장이다.

앞으로 어떤 의미 있는 주제들이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사실 과거 <미녀들의 수다>에서도 충분히 현실적이고 무게 있는 주제들이 등장했다. 고부갈등, 결혼과 같이 오히려 남자 패널들이 앞으로 담을 수 없는 부분까지 다양하게 이야기된 이력이 있다. 그러나 차이는 다른 부분에 있다. 토론이다. 그들은 제시된 하나의 쟁점을 두고 찬반으로 갈라서며 첨예하게 그들의 의견을 피력한다. 토론은 말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는 꽤나 피곤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작업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논리의 최선을 제시해야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들은 단순히 출신 국가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서의 특성까지 충분히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그들 나라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제시되고 이로 인해 인위적인 자국 홍보대사의 모습 또한 지워낼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한국인)의 개입 없이 그들 간에 한국어로 진행되는 첨예한 논쟁은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두고 존재하는 두 가지(우리를 관찰하기 위한 프레임 vs 실체) 사이의 간격을 메워줄 뿐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외부인이라는 그들의 위치를 희석시키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전제는 그들의 뚜렷한 가치관과 더불어 유창한 한국어 실력이다.

외국인에게 씌운 거울, 우리가 깨줘야 한다

우리 주변에 외국인을 둘러싼 두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메워 줄 바로미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시청자의 절대 다수가 한국인인 TV프로그램에 나와 한국에 관해 쓴 소리할 마녀사냥의 희생자나 왜곡된 그림을 교정해 줄 유능한 외국인 비교문화학자가 당장에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등장해 옳은 소리를 늘어놓을지라도 우리의 정서상 자연스럽게 수용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변화의 방향이 이처럼 마치 반항하듯 단편적으로 변화할 리 만무하지만 그런 영웅이 나타나도 결정적으로 미디어를 통해선 완전한 해갈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가당착이다. 실체란 표본으론 끝내 그려지지 않는다. 이것이 미디어의 전형적 특성이고 한계다. 설령 (있을 리 없는)완전한 대표성을 확보한 초월적 존재가 교정에 최선을 다해도 그는 누군가에 의해 무기력하게 또 다시 곡해될 것이다.

그래도 반드시 변해야 한다. 우리가 진실이 전달된다는 것의 한계를 알고도 사실을 보도하는 뉴스에 끊임없이 집착하듯 그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는 끝없이 그들을 찾을 의무가 있다. 브라운관 너머 우리가 제멋대로 그들 목에 씌워둔 거울은 이제 우리 스스로가 깨줘야 한다. 조금씩 실체를 닮아가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우리 역시 실체를 마중 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반도에 앉아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글로벌(Global)라이제이션(Lization)이다.

비정상회담 미녀들의 수다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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