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 포스터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 포스터 ⓒ 쇼박스


* 기사에 영화 내용의 일부가 담겨있습니다

서부극은 대개 단순하고 전형적이었다. 내러티브에서 '권선징악'이 분명히 드러나야 하고, 주인공은 보통 아내 등 가족이 악당에 의해 희생당한 쿨한 마초들이 맡는다. 배경은 모래먼지가 화면을 누렇고 뿌옇게 채색하는 황무지가 대부분이고, 작렬하는 태양에 미간을 찌푸린 미남들이 허리춤에 찬 권총을 전광석화의 속도로 뽑아든다. 대부분이 복수극이지만, 가끔은 너무도 강한 적을 무찌르기 위한 주인공의 성장담도 그려지곤 한다.

이러한 장르의 전형성에도, 서부극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충성도 높은 마니아들을 형성해왔다. 감히 짐작해 보건대 그 이유는 서부극이 '멋져서'다. 기실 서부극만큼 '오락'이라는 영화적 기능에 최적화된 장르도 드물다. 눈을 즐겁게 하는 액션과 몰입이 쉬운 단순한 스토리 덕에 온전히 극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서부극의 매력이다.

물론 자본가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가 법의 제약을 넘어서는 액션으로 통쾌하게 터져 나온다는 점 또한 관객들을 잠시나마 자유롭게 하는 서부극의 요소 중 하나다. 게다가 복잡하게 머리를 쓰지 않고 그야말로 '가슴이 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순정남' 주인공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그들은 '개싸움' 따위는 하지 않는 총격전의 달인이다.

그럴 듯한 '김치 웨스턴'...그런데 '말'이 너무 많다

<용서받지 못한 자> <범죄와의 전쟁>의 윤종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쟁쟁한 하반기 기대작 중에서도 단연 기대를 모았던 <군도> 역시 서부극의 전형을 좇는다. 첫 장면부터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 속에 흐르던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사운드트랙이 황무지 위로 낮게 깔린다. 이에 웨스턴 장르의 팬들은 전율했을 터다.

캐릭터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조밀한 세계관은 윤종빈 감독의 섬세함을 돋보이게 한다. '일격필살'의 총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활의 명인인 마향(윤지혜 분), 천으로 감싼 쇠구슬을 휘두르는 천보(마동석 분)는 물론이고 키보다 긴 창칼을 쓰는 대호(이성민 분)까지 자신의 성정과 꼭 닮은 무기를 사용하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화적떼 '군도'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그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스님 땡추(이경영 분)와 책사 태기(조진웅 분) 역시 눈길을 끄는 캐릭터다. 또 소 잡는 칼을 무기로 쓰는 주인공 도치(하정우 분)는 정글도를 들고 다니며 적들의 목을 베는 '마셰티'를 떠오르게 하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극이 후반부로 치달을 즈음 도치가 적들에게 난사하는 기관총은 흡사 '장고'가 아내의 관 속에 넣고 다니던 것과도 같았다.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의 한 장면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의 한 장면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이처럼 유명 서부극들 속의 멋진 설정, 멋진 장면들은 <군도> 안에서 어엿한 '김치 웨스턴'으로 재탄생했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야기 안으로 풍덩 빠져 들었다가도 다시 건져진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필요 이상으로 삽입된 내레이션이, 세계관을 친절히 설명해 주는 역할을 넘어서 해당 시퀀스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버린 탓이다. 극 중 인물들의 대사로라도 풀어내기엔 분량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특히 이 내레이션 문제는 악당 조윤(강동원 분)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조윤과 맞붙는 주인공 도치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조윤의 수하들에게 살해당하며 복수를 결심한다. 이는 전형적인 만큼 매우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그려졌지만, 그 이상이 필요치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조윤의 경우, 세상에 났을 적부터 받아온 트라우마를 일일히 조명하며 그가 악당이 된 이유를 관객들에게 납득시키려 한다. 조윤은 '그냥 악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윤의 전사(前史)에 꽤나 많은 분량이 할애됐음에도, 이를 거의 내레이션으로 처리한다. 이 내레이션은 조윤의 과거를 설명하는 내내 끝나야만 했을 지점을 몇 번이고 지나친다.

세밀하게 묘사된 악당에 비해 뭉뚱그려진 민중들

그 때문인지 137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군도> 안에 포진하고 있는 생명력 넘치는 조연 캐릭터들에게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양반과 민중의 대결이라는 자못 거대한 구도를 영화 안으로 가져다 놓았지만, 악당 한 명의 행위 동기를 세밀하게 묘사한 것에 비해 민중은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채다. 엔딩크레딧에 '마향 과거 남편' 등 통편집된 듯한 역할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조연들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

캐릭터들은 보기 드문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은 오로지 민중의 입을 빌렸을 때만 발언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다소 긴 내레이션으로 희석된 오락적 요소도 '군도'에 총집합한 명품 조연들의 감초 연기로 어느 정도 극복된다.

땡추는 '복수심은 일을 그르칠 수 있다'며 앞뒤 분간 없이 조윤에게 덤벼 들려는 도치를 만류한다. 이는 주인공이 품고 있던 '선(善)'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려 했던 장치였지만, 결국 그들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것은 또 다른 민중일지도 모르는 이들이었다. 조윤이라는 '끝판왕'에게 다가가기 위한 희생이라기엔 너무 끔찍한 동족상잔이다.

<군도>가 도치 이하 주요 캐릭터들의 단순 복수극이었다면 외려 이런 찜찜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거대한 '민중'을 극 안으로 끌어올 것이었다면, 민중의 경계 역시도 분명히 그어주는 편이 좋았을 듯하다. 대체, 군도는 누구를 단죄하고 있는가?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의 강동원(최윤 역).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의 강동원(조윤 역).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이처럼 무수한 의문이 생겨남에도 이 영화, <군도>를 봐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멋져서'다. 정두홍 무술감독 특유의 화려한 액션이 기다란 강동원의 몸에 덧입혀지고 단단한 하정우의 칼에 깃들 때면, 그 순간순간이 전부 아름다운 정물이 된다.

벚꽃 나무는 없어도 벚꽃 잎은 흩날리는 가운데 펼쳐지는 도치와 조윤의 마지막 결투 역시 눈여겨 봐야 할 장면이다. 적을 만난 순간, 땟국물이 흐르던 얼굴에 급히 안광이 번뜩이며 무기를 휘두르는 군도의 모습은 단연 '화적계의 프로'였다. 황무지에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말을 달리는 군도의 모습 역시 서부극다운 장쾌함을 자랑한다. 그래서 <군도>는 그 '멋짐'만으로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나 지하진 감독의 <철암계곡의 혈투> 같은 '김치 웨스턴'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는 영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귀띔하자면, <군도> 속 강동원은 정말 무시무시하게 멋있고, 하정우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어리다.

군도 하정우 강동원 김치 웨스턴 윤종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