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의 한 장면.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12척의 조선 Vs 330척의 왜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이순신 함대의 전설적인 승전인 정유재란의 명량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의 홍보문구다. 영화 <명량>의 공식 예고편, 홍보 포스터, 홈페이지 등에서 명량대첩은 '조선수군 12척 대 일본 수군 330척의 대결'이라 소개됐다.

그러나 이 수치는 백과사전에 수록된 명량해전 기록과 차이가 있다. <두산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명량해전을 조선수군 13척 대 일본수군 133척의 전투라 정의한다. 조선수군 함선 차이는 1척으로 대동소이하다. 반면 일본수군은 133척과 333척으로 무려 3배 가량 차이가 났다. 이 때문에 네이버 <명량> 페이지와 <명량> 공식 페이스북에서 누리꾼들의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화 <명량>의 홍보 포스터 영화 <명량>의 홍보 포스터.이처럼 영화 <명량>은 명량해전의 '조선수군 함선 12척, 일본수군 함성 330척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이 수치에는 문제가 있다.

▲ 영화 <명량>의 홍보 포스터 영화 <명량>의 홍보 포스터.이처럼 영화 <명량>은 명량해전의 '조선수군 함선 12척, 일본수군 함성 330척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이 수치에는 문제가 있다. ⓒ CJ엔터테인먼트


명량해전 이순신 함대... 12척이냐, 13척이냐

명량해전에 참전한 조선수군 함대를 12척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다. 이는 삼도수군통제사(오늘날 해군참모총장)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오늘날의 보고서)의 기록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선조임금이 조선수군을 육군에 편입할 것을 주문하자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는 내용의 장계를 쓴다. 이 기록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분의 <행록>을 통해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문신인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도 이순신 함대는 12척으로 기록됐다.

이와 달리 조선왕조실록인 <선조실록>에는 조선수군의 함선이 13척으로 기록됐다. 당대에 쓰인 이항복의 <총민사기> 역시 "함선 13척을 거느리고"라는 구절이 있다. <선조실록>의 해당 기록은 명량해전 승전 장계를 인용해 명나라에 보고한 내용이다. 즉, <행록>은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내용이며 <선조실록>의 기록은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두 기록 다 신빙성이 높다.

명량해전 당시 조선수군 규모 기록 <행록>의 기록은 이순신 장군이 전투 전 올린 장계다. 또, <선조실록>에서 인용한 기록이 인순신 장군이 전투 후 올린 장계에 근거한다. 즉, 전투 전 1척의 배가 추가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 명량해전 당시 조선수군 규모 기록 <행록>의 기록은 이순신 장군이 전투 전 올린 장계다. 또, <선조실록>에서 인용한 기록이 인순신 장군이 전투 후 올린 장계에 근거한다. 즉, 전투 전 1척의 배가 추가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 금준경


그러나 이순신 장군 본인이 각기 다른 기록을 남긴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책 <이순신의 두 얼굴(김태훈 저)>은 장계가 올라간 시점을 비교해 답을 찾는다. <행록>의 12척 기록은 명량해전 이전에 올린 장계 내용이다. 반면 <선조실록>의 13척 기록은 전투 후 승전 보고서를 토대로 한다.

즉, 전투 전 장계를 쓸 때는 12척이었지만 이후 한 척을 수리하거나 건조해 13척이 참전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종학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전 소장은 1997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597년 음력 9월 9일(명량해전 일주일 전) 송여종 장군이 전선 1척을 이끌고 합류한 만큼 배는 13척으로 늘어났다"며 한 척이 추가된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3배 가까이 차이나는 일본 함대 수... 무엇이 진실일까

그렇다면 일본군 함대는 몇 척이었을까? 공식적인 기록은 133척이다. 백과사전뿐 아니라 현충사의 명량해전 기록 역시 133척이라 소개하고 있다. 반면 영화 <명량>을 비롯한 극 작품은 330척 혹은 333척이라는 설정을 쓴다. 영화 <명량>은 330척,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330여척. 영화 <천군>은 333척이라는 설정이다. 조선군 함선은 단 한 척 차이로 해석이 엇갈리지만, 일본군 함선은 극화를 거치면서 3개 가깝게 차이가 난다.

130여 척 및 133척, 그리고 330여 척과 333척은 모두 문헌에 기록된 내용이다. 지금 <난중일기>라 불리는 <난중일기 친필초고본>은 130여 척,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 역시 133척이라 기록했다. <선조실록> 역시 130여척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달리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행록>에는 333척으로 기록됐으며 역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인 <이충무공전서본>은 330여척 이라 쓰여 있다. 이뿐이 아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200여 척, <명량대첩비>에 따르면 500여 척이라는 기록도 있다.

일본수군 함선 기록은 조선수군 함선 기록과 달리 <난중일기>에 언급돼 있다. 제3자의 어떤 기록보다 신뢰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의 글이 전해지는 것이다. 현존하는 <난중일기> 두 판본의 일본수군 함선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난중일기 친필초고본>
"적선 3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본>

<난중일기> 기록에도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난중일기 친필초고본(편의상 난중일기)>이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본>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 두 판본의 편찬 시기에 답이 있다. <난중일기 친필초고본>은 말 그대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대에 남긴 기록이다.

이에 반해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본>은 정조임금 때인 1795년에 편찬됐다. 임진왜란 200년 후의 기록인 것이다. 즉,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각종 기록들을 후세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본 함선 수가 부풀려졌다. 임진왜란 직후 이순신 장군의 조카가 쓴 <행록> 역시 <이충무공전서>로 재편찬하는 과정에 왜곡됐다. 본래 <행록>은 일본수군 함선 수를 133척이라 기록했지만 정조임금대에 재편찬되면서 333척으로 늘어난다.

명량해전 참전 일본 수군 규모 기록 명량해전 당시 참전한 일본수군 규모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크다. 그러나 당대의 기록이 후대의 기록보다, 이순신 장군 본인의 기록이 제3자의 기록보다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130여척(133척)'이 정설이다.

▲ 명량해전 참전 일본 수군 규모 기록 명량해전 당시 참전한 일본수군 규모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크다. 그러나 당대의 기록이 후대의 기록보다, 이순신 장군 본인의 기록이 제3자의 기록보다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130여척(133척)'이 정설이다. ⓒ 금준경


절충안도 있다. 왜군 포구에 정박된 배가 더 있었으나 사실상 참전한 배가 130여 척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130~330척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 본인이 당대에 남긴 기록에 우선할 정도로 타당한 주장은 아니다. 만일 사실이라 해도 수치 계산은 실제 참전한 함선의 수로 따지는 편이 옳다.

"왜군 규모 과장, 이순신 장군 업적에 도움 안 돼"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영화 <명량>의 '조선수군 12척 대 일본수군 330척'이라는 함선 수는 문헌에 기초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명량>은 현존하는 다양한 기록 중에서 조선군선의 수는 가장 적은 기록, 왜선의 수는 가장 많은 기록을 채택했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듯 타당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다. 영화 <명량>뿐이 아니다. 영화 <천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타당성이 떨어지는 수치를 썼다. 심지어 KBS 다큐멘터리 <역사스페셜>에서도 일본 수군 함선 수를 330여 척이라 방영하기도 했다.

조선 수군의 함선 수가 12척보다 한 척 많은 13척이라고 해서, 일본 수군 함선 수가 330여 척이 아닌 133척이라 해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폄하되는 건 아니다. 탁월한 전략과 집념으로 비교할 수 없는 병력의 차이를 극복해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백의종군 당하면서도 전장에 나서고, 백성을 지킨 이순신 장군의 정신 또한 변함 없다. 같은 맥락에서 이종학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전 소장은 1997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왜군 배의 수를 과장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영화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극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은 극적 상상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영화 <명량>은 역사적 고증에 충실했음을 자부하는 작품이다. 영화라는 매체의 파급력도 무시할 수 없다. 가장 타당한 것으로 평가받는 정설을 쓰는 편이 바람직하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순신의 두얼굴(창해)>, <난중일기(민음사)>
댓글3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