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오프닝 시퀀스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오프닝 시퀀스 ⓒ KBS


한 남자가 왕좌를 바라보고 서 있다. 남자는 이내 왕좌를 등진 채 그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가 지나간 자리의 모든 것이 무참히 부서진다. 어느새 의복이 바뀐 남자는 멈춰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마치 머릿속에만 머물던 그의 꿈이 투영된 듯, 새로운 나라의 모습이 환영처럼 그려진다.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의 오프닝 시퀀스다.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사건을 은유한 이 영상은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만으로도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쾌감을 선사했다.

기실 새 나라에 대한 열망이란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기에나 있어왔다.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요순시대조차도 이론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왕위 계승 체제를 파괴당하며 종언을 맞았다. 한 나라의 이상과 체제가 옳든 그르든,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었던 탓이다. 누군가는 요순시대의 소박함에 만족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야심을 마음껏 펼치기 힘든 시대를 원망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흐르며, 반복된다.

대업을 위해 스스로 괴물을 자처한 주인공

<정도전> 역시 이처럼 흐르는 시대를 붙잡아 극의 형태로 풀어냈다. <정도전>은 사극에서 종종 다뤄져왔던 인물 정도전(조재현 분)을 비롯, 격동기였던 여말선초를 살던 주요 인물들을 조명하며 '지키고자 하는 자와 부수고자 하는 자의 대결'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이인임(박영규 분), 정몽주(임호 분), 이성계(유동근 분), 이방원(안재모 분), 하륜(이광기 분) 등이 주인공을 능가하는 존재감을 뽐냈다. 이들의 감정선은 단순히 인물의 선함과 악함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되며 시청자들의 엄청난 공감을 얻어냈다. 그러나 막상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정도전은 극 중 비중으로 보든, 감정선 처리의 측면에서 보든 여타 주요인물에 비해 다소 불친절하게 그려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는 <정도전>이 50부작으로 결정됐다는 한계적 상황과 맞물려, 해당 분량 안에 주인공 정도전이 자신의 숙원이던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이뤄낼 목적으로 정적들을 하나씩 물리쳐 나가는 과정을 풀어나가기 위해 필연적인 연출이었다. 가끔은 잔혹하기까지 한 정도전의 행동에 납득할만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와 맞서는 정적들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방송화면 ⓒ KBS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고라도 <정도전>은 주인공을 홀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도전이라는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을 도울 만큼의 틈을 보여주는 순간이라고는 그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이미 친절하게 설명돼있는 양지(강예솔 분)의 감정, 이인임의 감정, 정몽주의 감정,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의 감정에 기대지 않았더라면, 대의를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겠다던 정도전은 그야말로 누구에게도 이해와 사랑을 받지 못할 인물이었을 것이다.

정도전은 양지로 대업의 정당성을 설명했고, 정몽주를 통해 정적간 대결을 아름다운 우정으로 마무리했으며, 모두에게 무시당하던 대업을 이성계에게 인정받음으로써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캐릭터가 아니었던가.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인간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듯했다. 그는 왕자가 된 이방원에게 살고 싶으면 정치에서 손을 떼라며 살벌한 경고를 날리고, 넘치는 패기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선 이숙번(조순창 분)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피칠갑이 되도록 구타한다. 대업을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죽이겠다는 말 역시 서슴지 않는다.

그에게 무언가를 상의해오는 사람은 있지만, 그는 어떤 것도 누군가와 상의하지 않는다. 게다가 연출 상으로도 정도전이 이룩한 대부분의 업적이 내레이션으로 처리되며, 그가 마치 '대업 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인상까지 줬다.

최근 방송분에서는 정도전의 생애 마지막 정적 이방원과의 마찰 이상으로 대업의 동지였던 조준(전현 분)과의 갈등이 불거졌다. 권문세가 출신이지만 정도전과 손을 잡고 역성혁명에 가담했던 조준은 실리에 밝고 경제에 능통해 조선 전제 개혁을 주도했던 인재다.

그러나 극 중에서 정도전은 조준을 '대업의 동지'라 부르면서도, 자신의 계획을 일방적으로 지시한다. 윤소종(이병욱 분)이 병사한 뒤 조선의 기틀을 세우는 데 정도전만큼 큰 역할을 한 조준이었기에 이 같은 대접이 반가울리 없었다. 조준은 정도전에게 "더 이상 그 옛날 당여 대하듯 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끝내 절연한다.

여말선초라는 시대, 그 자체와도 같은 인물

이처럼 대하사극 <정도전> 속 정도전은 전형적인 극 장르의 주인공처럼 절대선을 표방하지도, 인간미가 넘치지도 않았다. 그의 도움으로 왕좌에 오른 이성계나 끝까지 그의 최측근이었던 남은(임대호 분) 정도가 아니면, 정도전의 곁에 있던 이들은 그에 의해 죽임을 당했거나, 그에게 질려 떠났거나, 그의 적이 됐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정도전은 자신이 남긴 업적에 비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위인이기도 하다. <정도전>의 정도전은 그야말로 사극 역사상 가장 고독한 캐릭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정도전인 까닭은, 그가 여말선초라는 시대 그 자체와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눈은 양지와 천복(장태성 분) 남매를 훑으며 민초들이 나라의 근간임을 깨우쳤다. 그는 귀로 이성계를 향한 민심을 들었으며, 입으로는 끊임없이 이성계를 설득했다. 40년 지기 정몽주의 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으나, 정도전은 그의 시신을 부둥켜안은 팔로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시대의 필요를 자신의 오감으로 체득해 나가다 결국 시대를 짊어지고 만 이가 바로 정도전인 것이다.

정도전은 이 드라마 안에서 여말선초라는 격동기에 매몰되고 걸출한 인물들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정도전>의 등장인물들은 정도전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는 앞서 말했듯, 시대 그 자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정도전이며, 우리가 그의 눈으로 당시를 바라봐야 하는 까닭이다.

정안군 이방원의 책사 하륜을 찍어내려 음모를 꾸미던 정도전에게 조준은 말했다. "대업이란 말 앞에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지금 대감의 모습과 민본의 대업이 어울린다고 보십니까? 대업 이전에 군자가 되셔야 했습니다!" 정도전은 조준의 뼈아픈 질책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반대하는 자가 단 한사람이라도 남아있는 한, 난 철저히 악당이 될 것이네"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군자는 내가 자네에게 기대하고 있는 역할일세."

그 옛날 역성혁명의 끝자락에서 용상에 앉기를 주저하던 이성계를 몇 번이고 찾아가 "더러운 일은 모두 제가 도맡아 할 것"이라 말했던 순간부터, 정도전은 '시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도전이 대의를 위해 차츰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보다 많은 인간에게 가까워지려 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의 정적들은 정도전에게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고 일갈하지만, 시대를 위해 괴물이며 악당을 자처한 그였다. 정도전은 그렇게 만들어낸 새 시대를 뺏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자신을 믿어준 이성계 앞에서 드러낸 인간미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방송화면 ⓒ KBS


그러나 당시에는 지나치게 새로웠던 시대정신이 한 개인의 몸에 함축돼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신에게 크나큰 재앙일 터다. 정도전이 처음부터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은 채 자신의 대의를 관철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극 중에서 끝내 설득하지 못했던 가장 가까운 벗, 정몽주에 대한 부채감 탓에라도 얼른 번듯한 나라를 완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 그는 빠르게 노쇠해지는 스스로의 육신에도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다지면서도 마치 쫓기듯 조급했고, 이때 많은 사람들과 척을 지게 됐다.

그렇게 요동 정벌이라는 단 하나의 관문을 남겨두고 조정의 반대로 동북면에 가게 된 정도전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보내는 사람은 '송헌거사'. '송헌'은 이성계의 당호다.

"삼봉이, 오늘은 아무런 격식도 차리지 않고 직접 편지를 쓰고 싶었수다. 그간 내 임금 노릇 재미도 없고 잔병치레에 중전까지 떠나고 나니 잠깐 실의에 빠졌었지비. 헌데 삼봉이 요동 얘기를 꺼내니까 귀가 번쩍 하는 게, 갑자기 기운이 솟지 않았겠음? 근데 그렇게 중대한일을 대놓고 어쩐담메? 해서리 내 눈 딱 감고 삼봉을 동북면으로 보냈던 거우다.

지란이한테 들으니 삼봉도 거기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성곽을 쌓는다니 마치 처음부터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거겠지비 싶어서. 삼봉이. 이젠 돌아오시우다. 나와 힘을 합쳐서리 요동을 칩세다. 주원장 그 간나새끼 쭉다리를 확 분질러 놓잔 말이우다. 변방서 많이 적적할 것 같아서리 내 술 한 병 보냈구마. 옛날 삼봉 집에 찾아갔을 때 가져갔던 그 호박주우다. 그때를 생각하면서리 한 잔 하면서 기운 내시우다. 멀리 한양에서 평생의 동무가."

정도전은 주군 이성계의 진심어린 편지를 붙들고 오열한다. 괴물이니 악당이니 스스로 세상에 대한 설득을 포기하며 위악적 태도를 취했던 그였지만, 그 순간만은 인간의 얼굴로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이 바란 시대에 너무도 애착이 컸던 나머지 스스로를 시대처럼 여겼던 그이지만, 그 시대를 진심으로 믿어준 사람에게까지 냉철함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정도전> 안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주인공의 인간미는, 이처럼 간혹 단비처럼 등장했다.

정도전이라는 인물의 인생은, "정치가의 발은 진창을 딛고 있어도 손은 하늘을 가리켜야 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말에 그대로 함축돼 있다. 요동 정벌 계획을 "불가능한 몽상"이라며 비웃는 이방원에게 "밥버러지를 면하고 싶으면 불가능한 꿈 하나 정도는 품고 살라"며 스승다운 충고를 건넸던 정도전. 그는 마음속에 품었던 불가능한 꿈, 그 꿈의 실현 불가능성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던 그 꿈을 결국 이뤄내며 스스로 시대정신이 됐다.

당장은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의 가능성조차 믿지 못하게 막지는 않는 시대. 정도전은 그런 자신의 시대를 만들기 위해 왕좌에 앉힌 이성계의 앞에서 "조선은 신하의 나라"라고 말했으며, 대업의 동지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다뤘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민본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가련하고 외로운 주인공 정도전을 어떻게 끝까지 미워할 수 있을까.

정도전의 제자나 다름없는 이방원 역시 덕망이 부족하다며 아버지로부터 내쳐진 후에도 다섯째 왕자의 몸으로 조선의 3대 임금이 됐다. 불가능한 꿈을 품은 뒤 그것을 이뤄내고야 만 이방원도 '정도전'이라는 시대를 계승해 나가고 있었다. 결국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임으로써, 모든 것이 불가능한 황무지에 희망의 씨앗을 떨어트렸던 스승의 시대정신을 받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도전>에서 보인 이 같은 두 사람의 대립에서, 여말선초를 품은 '정도전'이라는 시대정신이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이는 <정도전> 속 이방원과 죽음을 앞둔 정도전의 마지막 환담이 종영의 아쉬움보다 앞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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