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자유인 솔로몬 노섭.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 폭스 서치라이트


2014년 아카데미 영화제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노예 12년>이 상영되고 있다. 86년 세월 동안 흑인 영화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 태생인 스티브 맥퀸은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헝거>(2008)와 <셰임>(2011) 등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음악가 출신 감독이다.

21세기 들어 아카데미 작품상은 오락 중심에서 사회 드라마 쪽으로 선회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라크 전쟁의 어두운 면을 벗겨낸 <하트 로커>나, 염세적이고 파멸적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인종차별을 신랄하게 포착한 <크래쉬> 등이 본보기다. <반지의 제왕>이나 <검투사> 같은 예외도 있지만.

<노예 12년>은 아메리카 영화의 주류가 방향전환을 모색하는 좋은 예로 보인다. 우리가 잊고 있던 '노예제도'와 인권유린, 거기서 발원한 '남북전쟁'과 링컨 대통령까지 우리의 사유를 확장하기 때문이다. 익숙하지만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19세기 중반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 <노예 12년>을 만나보자.

왜 노예인가

솔로몬 노섭이 나무에 달려 있다. 그의 목에는 굵은 밧줄이 동여매져 있고, 밧줄은 나무줄기에 묶여 있다. 깨금발을 해야 숨을 쉴 수 있는 노예.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호흡이 잦아든다. 그때 백인 하나가 장총을 들고 나타나 소리친다.

"노새 타고 가서 주인 나리 모셔와!"

소리친 자는 농장의 백인 중간관리자. 다른 흑인 노예가 주인을 데리러 간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흑인 노예는 점점 더 지치고 늘어진다. 그런데 희한한 장면이 되풀이된다. 그를 둘러싼 다른 흑인 노예들이 일상적인 노동과 행동을 지속하는 것이다. 심지어 노예 자식들은 죽어가는 그를 보면서도 희희낙락 놀이에 여념 없다.

같은 처지에 있는 성인 노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기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이거나 투명인간처럼 그를 대한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게 생겼는데도, 그들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다. 어쩌다가 저렇게 되고 말았을까, 의구심이 든다. 

한 사람의 흑인 노예 팻시만 예외다. 그녀는 노섭에게 물을 먹인다. 하지만 그것도 딱 한 번뿐이다. 그것이 노섭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의 손길이다. 그런 연유로 그들 사이에는 말로 하기 어려운 인간적인 유대가 만들어진다.

자비로운 주인과 악마 같은 주인

솔로몬 노섭은 자유인이었다. 자유인 증명서를 가진 음악가이자 뉴욕 시민이었던 노섭. 그랬던 그가 노예로 팔리게 된 동기는 백인들의 납치와 감금 및 가공할 폭력이었다. 물질적인 유혹에 넘어간 노섭이 겪어야 했던 12년의 끔찍한 세월. <노예 12년>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때 얼마나 많은 '노섭들'이 있었을까?!

1841년 거리에서 납치된 노섭은 흑인 노예를 가장 악랄하게 혹사 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루이지애나 주로 팔려온다. 미시시피 강이 유유히 흐르고, 목화와 쌀, 사탕수수 같은 농산물이 풍부한 루이지애나. 그의 첫 번째 주인이자 농장주는 윌리엄 포드. 그는 자비롭고 신앙심 깊은 인물로, 노섭의 재능과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노섭이 본디 자유인이고, 상당한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포드는 돈 때문에 노섭을 악덕 농장주 에드윈 엡스에게 팔아넘긴다. <노예 12년>에서 우리가 만나는 설득력 있는 장면이 이 대목이다. 인간적으로는 흑인 노예를 동정하되, 경제적인 면에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 백인 농장주!

알코올 중독자 엡스는 즉흥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이다. 그의 사람됨은 팻시를 대하는 복잡한 면모에서 드러난다. 최대의 목화 수확량을 자랑하는 팻시. 동시에 엡스는 그녀를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팻시를 의심하고 남성적인 지배욕구로 가득 차 있다. 팻시를 질투하는 엡스의 아내. 막장도 이보다 더한 막장이 없다!

주인 철학과 노예 철학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 폭스 서치라이트


역겨웠던 것은 백인 주인들이 성서를 인용하며 노예들과 기도하는 장면이었다. 흑인 노예를 가축이나 물건처럼 대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근거로 성서를 들이대는 이중적인 성격의 백인 농장주들! 목화농장에 벌레가 들끓는 것은 신을 믿지 않는 노예 탓이고, 벌레가 사라진 것은 신실한 자기네 덕택이라는 주인들!

노예들은 어떤가?! 그들은 단결이나 투쟁에 근거한 해방의 이념과 전혀 관계없는 인물들이다. 노예들은 소나 말 같은 가축처럼 자기 소임을 다하고, 언젠가 신의 품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나약한 존재다. 그들이 장례식에서 부르는 만가는 해방과 탈출을 지향하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인생과 운명과 죽음을 수용하는 노예들.

영화배우 스티브 맥퀸은 <빠삐용>에서 끝없이 탈출한다. 붙들리면 잡혀 와서 옥살이 하다가 탈출하고, 다시 붙잡히면 또 탈출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빠삐용은 탈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전율케 한다. 머리가 허연 빠삐용이 하얀 포말이 이는 바닷가의 아스라이 높은 언덕에서 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노예 12년>에서 노예들은 순종적이다. 노섭은 탈출을 꿈꾸지만, 우연히 보게 된 탈주 노예들의 교수형을 보고 마음을 돌린다. 텔레비전 드라마 <추노>를 기억하시라! 그가 선택하는 방식은 적극적이며 투쟁적인 탈출이 아니라 인내심 있는 기다림이다. 그런 기적 같은 우연을 가져다 줄 구원의 동아줄은 어디서 오는가?!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절망>에서 김수영 시인은 절망적으로 절규한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拙劣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시인을 찾은 구원처럼 노섭에게도 구원은 갑자기 찾아든다. 뉴욕에 있을 가족을 향한 절절한 마음에도 죽음의 공포 탓에 탈출을 결행 못하는 노섭. 그런 노섭에게 다가서는 캐나다인 베스. 여기서 나는 <파워 오브 원>이 떠올랐다. 문제제기와 해결의 열쇠는 늘 백인만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자유인 증명서를 가진 흑인 솔로몬 노섭을 노예로 삼은 것도 백인. 노예시장에 그를 팔아서 루이지애나로 데려간 것도 백인. 자비와 함께 바이올린을 선물한 것도 백인. 그를 개돼지 이상으로 학대한 것도 백인. 그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한 것도 백인. 결국 흑인의 운명은 완전하게 백인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가축이나 가구처럼.

하기야 역사는 웅변하고 있다. 1861년 남북전쟁으로 아메리카가 양분될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나의 최대목적은 유니온을 살리는 것이지 노예제도를 유지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다.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아도 유니온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 하겠다. 더러는 해방시키고 더러는 그대로 두어 유니온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 하겠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흑인종과 백인종의 사회적·정치적 동등권을 이룩해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할 마음도 없고 찬성한 일도 없으며, 흑인에게 투표권이나 배심원이 될 자격을 준다거나 그들에게 공직을 맡게 한다든가, 백인과 결혼하게 한다는 생각에 찬성할 마음도 없고 찬성한 일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하는 바이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흑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차이점은 너무나 커서 두 인종이 사회적·정치적 동등권을 유지하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인종이 함께 살 수 없지만, 함께 살아야 할 경우라면 반드시 지위의 우열이 구분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백인종에게 부여된 우월권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감한다." (James Cone, <흑인신학과 흑인의 힘>에서 인용.)

구원은 어딘가 멀리 혹은 밖에 있지 않다. 구원의 출발은 없는 자, 빼앗긴 자, 배우지 못한 자의 각성과 행동에서 나온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한낱 비겁에 지나지 않으며,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은 거기서 생겨난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닥칠 구원을 그저 기다릴 것인가?! 아니다. 구원은 지금과 여기, 오직 당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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