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은밀한 기쁨>의 추상미.

연극 <은밀한 기쁨>의 추상미. ⓒ 박정환


요즘 스크린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넘어서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현상이 대두되고 있다. <화이>가 대표적인 영화다. 자신을 킬러로 키워준 대리 아버지들을 넘어설 때에야 비로소 대리 아들은 한 남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은밀한 기쁨>은 이런 점에 있어 <화이>와는 반대에 위치하는 연극이다. 추상미가 연기하는 이사벨의 집안에 혼돈이 들이닥친 건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비롯한다. <화이>의 가치관대로라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한 개인으로 발돋움을 내딛을 수 있겠지만 <은밀한 기쁨>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이사벨 집안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사벨은 아버지의 가치를 새엄마인 캐서린을 통해 지키고자 노력한다. 결점투성이 캐서린을 껴안을 때에야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버지의 가치관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캐서린은 이런 의붓딸 이사벨의 노력과는 정반대의 결정을 일삼는 결점 많은 새엄마다. 아버지의 추억이 깃들어있는 집을 의붓딸과 한 마디 상의 없이 마음대로 처분하질 않나, 의붓딸의 애인인 어윈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민폐를 끼치기 일쑤다.

캐서린의 청개구리 같은 행동은 아버지의 가치관이 이사벨과 얼마나 상극인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이사벨은 자신에게 불합리한 아버지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캐서린이라는 인물을 끝까지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의 가치관을 훼손하지 않고자 하는 신념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가치관을 배격하고 몰아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가 될지언정 최대한 끌어안고 포용하려고 애를 쓴다.

 연극 <은밀한 기쁨>의 한 장면.

연극 <은밀한 기쁨>의 한 장면. ⓒ 박정환


이사벨의 혈육인 언니 마리온과 형부 톰은 '위선'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두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다. 언니 마리온은 환경부에 몸을 담는 공무원이면서도 환경을 보호하는 일보다는 부를 쌓는 일에 더 열심인 듯하다. 톰은 툭하면 하느님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처제 이사벨을 이용해서 탈세를 꾀하는 이중성을 갖는다. 동생 혹은 처제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유익인 경제적인 부를 추구하려는 속물적인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캐서린과 언니 마리온, 종교적인 속물 톰의 틈바구니에 끼인 이사벨이 자신의 순수한 영혼을 훼손하지 않고 이들과 공존할 수 있을지 묻는 연극이 <은밀한 기쁨>이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바라보고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한 요즘 같은 세태에서 이사벨의 캐릭터는 한없이 답답하고 가련해 보이기만 하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에게 희석되지 않고 소신을 지키고자 하는 꿋꿋함을 찾을 수 있다.

예매 사이트에서 연극 순위 1~10위를 보면 당의정 같이 달달한 로맨스 코미디가 70~80%를 차지한다. <은밀한 기쁨>은 그런 요즘의 관람 세태에 역행하는 듯 보이는 정극이다. 속물적인 인간 군상 가운데서 이들에게 오염되지 않고자 노력하는 이사벨의 연기를 만끽하고자 한다면 달달한 당의정 대신 이런 정통 연극을 찾아도 좋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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